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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과 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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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과 당위


           

교인의 바람직한 삶 | 롬 12:14-21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3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306


교인의 바람직한 삶 | 롬 12:14-21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3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306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녹취록>



1. 서론: 신자, 성도, 교인


만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돌보심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하고 성취해야 하는 부담이 인생 중에 있으나 하나님이 큰 길을 내셔야 우리가 가고 알맞게 베푸셔서 여물게 하셔야 우리가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 생각을 해 봅니다. 성경 전부가 교회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이요 하나님의 몸이요,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개인 개인이 아닌 교회를 두셔서 말씀 듣고 예배 드리고 찬송드리게 하시고 그 일을 기뻐하십니다. 오늘 특별히 교회에 대한 말씀을 보면서 교인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 초대교회의 모습을 우리가 금방 떠올립니다. 

본문은 우리가 은사의 장이라고 쉽게 알고 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물을 뜻합니다. 이런 선물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오늘 본문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명찰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써있습니다. 안디옥에서 처음 이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이 이름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몸을 이루는 교인인 것입니다. 신자요 성도요 교인이라는 이름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니 당연히 신자이고 그의 의로 살아남과 살아감이 은혜요, 생명과 생활을 얻고 그리스도와 사귐이 은혜이니 성도요, 그리스도의 은혜로 날마다 거룩해지고 새로워지고 날마다 죽고 살아나니 성도요, 그리스도가 머리요 우리는 지체로 한 몸을 이루니 교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속에 계시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자, 성도, 교인이라는 귀한 이름을 얻는 것입니다.



2. 교인


작년에 우리는 새것, 거듭난 것, 그리스도의 것, 값주고 사신 것이라는 주제로 일년간 나누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여러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잘 하려는 중에 생긴 어려움, 즉 연보, 직분 등에 관해 생긴 어려움들이지만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개별로 다루기보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값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것임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3). 갈라디아서에도 동일한 말씀이 나옵니다. 혈육의 후손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귀한 이름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을 누구라도 가질 수 없다면, 예수님을 쫓아다닌 열두 명의 제자들,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닌 여자들 등 몇 명에게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름이 주어졌으나, 이제 신약시대는 이방의 모든 민족에게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 자리, 즉 제자의 자리, 따르는 자의 자리, 예수와 함께 일하는 자리 등에 우리를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전부 그리스도만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고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사도가 아니라는 의구심이 제기되었을 때 그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게 있다는 것과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과 11장에 나오는 이 말, 특히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정말 담대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미련한 것을 자랑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나고 우리의 없는 것을 자랑하면 하나님의 부요함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일들을 말함으로써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변증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그리스도의 편지니"(고후 3:3). 

교인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교인이 어떤 자인지 먼저 살펴봐야 하는데, 우리는 바로 주의 종인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영적 예배라는 것은 우리의 몸을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주체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따른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은 영적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데 우리의 몸이 무엇입니까, 값으로 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으로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약한 것, 없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강한 것, 하나님의 부유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값으로 사신 것인데 그러므로 (내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로 사신 것이므로) 우리 몸이 그 증인이 되는 것이요, 우리 몸으로 영광을 올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의 분량, 분수대로


성경에는 어떤 것도 우리에게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감사와 찬양, 예배를 요구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떻게 영광을 올리나요? '나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셨다. 믿는 만큼, 믿음 주신 만큼 한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믿음에 비추어, 믿음의 분수대로 한다'는 것이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믿음의 분량대로 입니다. 영어로 보면 '믿음을 저울로 달아서'라고 쓰여 있습니다.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믿음으로 산을 옮깁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믿음은 사실상 선물입니다. 내가 해서는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내 공로입니다. 또한 믿음의 분량, 분수대로라는 말씀은 믿음 주신 만큼이라고 보면 됩니다. 믿음 주신 것을 조금만 사용해도 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분수대로(롬 12:6)라는 말씀은 믿음이 비추어 주는 대로라고 보면 됩니다. '믿음과 나란히 비추어서'라는 말입니다. 거울에서 믿음이 비추어 주는 대로만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 받은 만큼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선물을 크게 받으면 크게 기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믿음의 분수대로,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이 말씀들을 이해해야 오늘 말씀이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겨가 바람에 흩날리는 것 같은 삶이 아니라, 가라앉는 것,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받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에 관한 본문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특히 15장까지 아주 빡빡한 교리가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삶에 대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입니다. 특히 선물의 분량대로라고 하면 눈물로 울면서 씨를 뿌리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에 오면서, 저도 설교 하면서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의 분량대로 하는 것입니다. 선물이 바로 은사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하고 내가 뭔데 이런 귀한 일을 맡겨서 하게 하시는지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저주하지 말라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울며 씨를 뿌리는 삶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분량대로 삶에 있어 가장 드러나는 것은 바로 세상과의 갈등, 세상의 박해 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이제 더 이상 정치적인 박해가 있지는 않으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그런 것들이 여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정서적인 박해도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까지만 해도 교회 다닌다고 하면 어떤 영예, 좋게 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적 정서가 교회 다닌다고 하면 좋지 않게 보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양심의 박해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주변이 우리에게 박수를 치고 동조해주고 칭송해서가 아닙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일을 해야만 합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가 가만히 있으면 전부 다 평화로다라고 합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망한다고 합니다. 언제든지 이러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평안하다 우리 신앙이 온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오늘 박해에 관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박해는 굳이 때려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복의 마지막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같은 맥락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세상을 탓하고 송곳으로 찌르듯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축복하라는 것은 좋은 말을 하라는 말인데, 가장 좋은 말은 하나님이 당신이 어떻게 하든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 박해를 받을 때 오히려 축복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스데반이 돌로 맞으면서도 가해자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좋으면 좋고 나쁘면 나쁘고를 넘어서야 교회입니다. 세상의 모임과 다른 지점입니다. 세상의 단체는 돈을 벌거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공중 권세 잡은 세속의 권세와 항상 맞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축복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항상 뭔가 모르게 불안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는 마음이 편한데 세상에 나가면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내가 아직까지 그들을 축복하지 않고 저주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은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물론 썩은 것은 잘라내야 합니다. 그러나 좋은 말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저주는 하나님이 떠났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꿈 속에 하늘의 사닥다리를 보고 여호와께서 여기 과연 계시다고 한 것, 그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교회의 선교가 이것입니다. 믿음의 분량,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5. 거듭난, 그리스도의 마음: 동고동락의 마음, 겸손한 마음, 악을 선으로 갚는 마음, 화목하고자 하는 마음


두 번째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곳에 거창한 이야기가 많을 텐데 박해를 받으면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는 말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이 있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동고동락하라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냥 지나가는 것이 세상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울면 같이 울어주고 기쁜 일이 생기면 시기하지 말고 같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돈이 얼마나 있는지 남에게 주면 자신의 것이 줄어드는 것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갈하지 않으므로 더 주십니다. 그러니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으면, 같이 울고 같이 기뻐해주면 오히려 더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첫 번째 표적이 가나안의  혼인잔치이고 마지막 표적이 나사로의 장례식장 표적입니다. 혼인잔치에서 같이 기뻐하시고 장례식엥서 같이 우셨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삶의 질곡이 많습니다. 내가 남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것은 내 자신을 열어줄 때 가능합니다. 내 자신을 열지 못하면 외톨박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가, 교회가 세상과 단절되어 독야청청 외톨박이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가에도 있었고 잔치와 장례에도 계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교인이라는 것입니다. 부족함 가운데 같이 마음을 다해 열어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의 마음, 거듭난 마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내 심장을 보혈로 적셔야 한 마음이 됩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처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또한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은 에스겔서 말씀처럼 굳은 마음을 제하고 새 살 같은 마음으로 들으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내 말을 하면 안됩니다.

네 번째로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한 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21절은 이것을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합니다.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은 세상의 정치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인은 그것이 아닙니다. 악으로 씨름하면 안 됩니다. 선을 붙들고 씨름하면 됩니다. 가장 슬픈 일은 사람 붙들고 사람 생각하면 잠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과 씨름하면 안 됩니다. 얍복강의 야곱과 같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악을 주제로 삼지 마십시오. 선으로 돌이키십시오. 저 사람이 나를 괴롭히고 음해를 한다고 해서 그것에 걸려 넘어지면 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베푸십시오.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는 최선의 법은 본문 20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입니다. 숯불을 머리에 쌓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 말씀은 잠언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벌하시는 일을 하시고, 우리는 먹이라는 것입니다. 악을 이기려다 내가 악하게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악마가 되려면 악마가 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십니다.

다섯 번째,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동일한 말씀이 고린도후서에도 나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내가 받은 은혜와 감사가 없이는 절대 선으로 악을 이기지 못합니다. 만 입이 있어도 다하지 못할 감사가 있다면 어떤 박해가 가해져도 선으로 이깁니다. 교회는 착한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니라 은혜 받은 사람이 모인 곳입니다. 은혜로 너끈히 이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