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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과 당위


           

버가모 교회의 믿음 | 계 2:12-17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6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327


버가모 교회의 믿음 | 계 2:12-17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6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32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녹취록>



1. 버가모교회와 말씀의 칼


버가모교회는 다른 교회가 위치한 지역처럼 여러 헬라 신전이 위치한 큰 도시였습니다. 특히 이 도시에는 뱀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본문 2장 13절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자리가 있다고 한 것은 우상 숭배가 횡행했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우리가 뱀이라고 하면 에덴동산에서 창세기에 가장 먼저 나오는 사탄의 수하이자 유혹자로 나오는 것을 압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0장 2절과 3절을 보면 역시 옛 뱀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계 20:2-3).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뱀이 이렇게 나오는데 버가모 교회에 그 당시 뱀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또한 이 도시는 황제숭배 중심지입니다. 전체적으로 버가모교회는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는데, 본문에는 칭찬과 책망이 모두 나옵니다. 

본문은 우선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계시록 1장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교회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다른데 본문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라고 선포합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말씀의 검이고 성령의 검이 바로 좌우에 날선 검인데, 이를 그리스도가 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라는 말씀과 함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검과 같은데 그것을 성령의 검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보다 더 예리합니다. 그런데 검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반면 말씀은 스스로 운동력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면 말씀이 내 입을 끌고 갑니다. 그것이 복음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우리의 마음과 뜻을 감찰합니다. 좌우에 날선 검이라고 하면 왼쪽에 거추장스러운 것, 즉 세속적인 것과, 오른쪽에 거추장스러운 것, 즉 세상의 학식과 명망 등을 쳐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고상하다고 하는 것이 좌우로 들러붙어 있는 것을 싹 베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라고 정확히 할 것을 산상보훈에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좌우에 날선 검은 성령의 검이고 오직 믿음으로 받으면 부요해지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으면 두려워집니다. 마치 성찬과 같습니다.



2. 속이는 자, 사탄


무엇보다 마귀 사탄은 속이는 영입니다. 뱀은 속이는 자입니다. 하와를 속여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게 했습니다.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거짓으로 꾀었고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먹지도 보지도 말라고 했다고 과장합니다. 또한 그는 진리가 없으며 거짓의 아비가 되는 자라고 성경은 알려줍니다. 처음부터 살인자라도 하는데 이것은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국 에덴 동산에 있지 못하게 한 것을 말합니다. 거짓은 진리가 그것에 없으므로 화려해 보이고 지어서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보다 달콤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습니다. 진리에 서면 그것이 생명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것이 시온의 대로입니다. 큰 문으로 다니는 것은 전부 도둑입니다. 문은 좁습니다. 양의 문, 선한 목자가 이끄시는 양의 문은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강도들은 문도 길도 없습니다. 이리 저리 타넘고 다닐 뿐이지요. 특별히 본문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을 버가모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주님을 말씀의 성령의 검을 가지신 자로 본문은 말하는 것입니다.



3. 칭찬: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음


이 버가모교회에 주님이 먼저 칭찬을 하십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순교 가운데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황제의 이름도 있고 제우스, 아프로디테의 이름도 있지만 그 신들의 이름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은 것입니다. 천하 만민에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 은금은 내게 없으나 일어나 걷게 하는 오직 그 이름을 굳게 잡은 것입니다. 물속에 흙탕물을 헤엄치는 것이 우리 인생 같아도 붙잡아야 할 것은 주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우리의 구원이요 영광이요, 나의 명찰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을 불러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그 이름을 굳게 잡은 것입니다. 주여, 그리스도여 하고 꿈에서라도 붙잡아야 합니다. 언제나 잡을 이름은 이것뿐입니다. 아무리 요동치고 지진과 파도가 있어도 만세 반석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만세 반석이 열려서 우리를 안전히 보호하십니다. 주님이 그 반석을 열어서 우리를 품에 안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아서 순교의 핍박이 있더라도 놓지 않은 것입니다. 환란의 때에 믿음을 보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다 이깁니다. 그러나 겨울에 조금 추워보면, 여름에 더워 보면 견디기 힘듭니다. 불 속이라도 들어간다고 하지만 불 곁에만 가도 뜨겁다고 하면서 도망칩니다. 우리가 불 속에 들어갈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이야기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핍박 가운데서도 버가모교회에서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이 교회들이 있는 위치는 사실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교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확실합니다. 안디바는 버가모교회의 장로라는 것까지만 알려져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아 그리스도의 말씀, 다른 복음에 타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주로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이 환란은 초대교회부터 살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부인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가 날 위해 죽으시고 내가 그와 함께 산다는 것과 그가 나의 영생의 주시라는 것을 부인하게 합니다. 이것 때문에 순교를 당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재물 관리나 어떤 물질적 피해가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라는 요구를 따르지 않아 순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환란은 거짓의 유혹으로부터 옵니다. 환란은 내 자신이 나 된 것을 부인하게 만듭니다.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요 그 은혜로 사는 것을 부인하게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떠나고 영적으로 궁핍하게 됩니다. 그러면 확신이 사라지고 불안합니다. 그래서 결핍 가운데 마지막으로 세상의 유혹을 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이 시대에 환란이 무엇입니까? 모이지 못하게 하거나 모이면 감옥에 넣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환란이 없습니까? 언제든 성경의 말씀은 지금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환란은 내 믿음에 대한 시험이라고 봐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기쁨이 없고 말씀 본다고 하면서도 열매가 없고 끊임없는 불안함이 있고, 그러다 보니 끝없이 다른 것을 쫓아다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비록 우리가 뱀을 세우지 않더라도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충족함이 없다면 내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지는 환란인 것입니다. 

끊임없는 영적 전쟁이 내 안에서 벌어지는데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가 주시는 성령의 말씀의 검, 살아 운동력이 있어 심령과 골수와 혼과 영을 쪼개기까지 하고 우리의 말씀을 감찰하시는 그 말씀, 그것만으로 이깁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오늘 찬송 중에도 환란과 핍박 중에 성도는 믿음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옥중에 매인 성도가 죽어도 영광되리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사에도 보면 옥중 순교 성도들이 많습니다. 평양대부흥만 세계 교회사에 나오지만 순교사가 사실 더 크게 보여야 합니다. 그때 오히려 기쁨이 넘칩니다. 오히려 요새 우리 안에서 우리 신앙은 너무너무 내 속을 들여다봅니다. 신앙은 항상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니 이게 기쁨이고 즐거움이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만으로 기쁘고 주님께만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란 날에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버가모교회에 이 기쁨이 있었습니다.



4. 책망: 발람의 교훈을 지킴


이제 이후에는 책망이 나오는데 사실 칭찬과 책망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리 되겠습니다 하고 믿으면 칭찬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책망이 있는 것입니다. 발람의 교훈을 지켰다고 하는데 발람은 세 번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망하게 해 달라고 소원하는 굿에 불려서 굿을 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 굿 가운데 이 발람의 입에서는 계속 여호와 밖에 찬미할 분이 없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발람이 선한 것이 아닙니다. 발람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발람의 교훈에서 주요하게 나오는 것이 칼입니다. 발람의 교훈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을 하는데 행실은 이방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입에 말은 담고 있는데 행실은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발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의 신을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모압 여인과 간음을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됩니다. 그것이 민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담았다고 하지만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우상숭배와 행음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 가운데 칼이 등장합니다. 모압 여인과 동침을 한 이스라엘 백성을 대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가 창으로 찔러 죽이고 발람 역시 칼로 죽게 됩니다. 본문 가운데 검이라는 말이 계속 나올 때 이것과 맥락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말씀을 입에 담는데 이 말씀을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망과 칭찬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책망 받은 교회를 보고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 일곱 교회에게 말씀하신 모든 말씀이 우리 모든 교회들에게 적용됩니다. 모든 교회가 그 책망과 칭찬을 한가지로 교훈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터, 예배의 터가 아닌 우상의 제물을 섬기는데 가서 우상숭배 자리에 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이 바로 발람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니골라 당이 나옵니다. 성경이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므로 굳이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는 없으나 세속적인 철학, 진화론,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등이 이에 속합니다. 이 시대의 사조를 니골라 당이라고 보면 됩니다. 신학을 철학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와 신앙 가운데 철학이지 대체품은 아닌 것입니다.



5. 회개하라


그러니까 버가모교회는 말씀에 열심이 있고 종교성이 있었으나 미묘한 신앙의 마지막 자리에서 성령의 검으로 자르듯 예와 아니오가 분명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 16절은 회개하라고 합니다. 회개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두 마음을 갖지 말고 듣는 말씀을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할 수는 없으나 말씀을 듣고 행하려 하지 않으면 애통함이 없고 그러면 복이 없습니다. 말씀이 나에게 떨어질 때 행하려고 어떻게든 발버둥칠 때 애통함이 생기고 그때 복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 울음을 들으십니다. 그러니 지금 슬퍼하고 애통하는 자에게 기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떨어졌습니다. 봄에 대지를 가르고 새싹이 치고 올라오듯 그저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있는 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우리 신학은 애통함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나의 어떠함에 대한 부대낌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내가 스스로 하려고 하면 니골라 당으로 가게 되고, 예수의 편에 서서 그에게 의지하면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다 애통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하고 신령한 애통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의 17절 감추었던 만나, 일용할 양식, 신령한 꼴을 주시는 것입니다. 비밀스러운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삽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결코 말씀만 주시지 않습니다.

계시록에서 희다는 것은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또한 새 것은 마지막 때 우리가 누릴 영화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에 완성되나 지금 우리가 누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택함 받은 우리만 이 비밀을 압니다. 세상 만국을 치리하시고 마지막에 이기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 같은 거친 돌, 연한 순과 같은 자로 우리를 위해 온갖 풍상을 다 겪으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은혜로 흰 세마포를 받고 흰 돌, 새 몸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검과 같은 말씀, 많은 물소리와 같은 말씀은 너무 귀합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에게 가는 자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말씀이 떨어질 때 그것을 행하려고 하는 자, 그 애통함이 있는 자에게 자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