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포하는 교회

주일낮예배


교회의 본질과 당위

선포하는 교회  |  주일예배 설교


교회의 본질과 당위


           

사데 교회의 남은 자 | 계 3:1-6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8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424


사데 교회의 남은 자 | 계 3:1-6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8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424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녹취록>



1. 사데교회와 그리스도의 영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 말씀을 마저 보고, 교회에 관한 말씀의 대미를 장식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중에 다섯 번째 교회인 사데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밧모 섬 유배지에 간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이 직접 환상으로 알려주신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에서부터 지중해 해안가를 따라 내려오면서 차례대로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그리고 사데교회가 있습니다. 오늘 사데교회는 영어로 '사르디스'(Sardis)라고 합니다. 당시 사데도 큰 도시였습니다. 서머나가 한때 리비아의 수도였는데, 그 직전 수도가 바로 사데입니다. 사데는 산과 강, 도로가 있고 내륙에 있으나 수로와 육로와 협곡이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고 무엇보다 두아디라 지방처럼 염색업, 양털 가공업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털 가공이라고 하면 양모가 될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고급 산업인 양모업이 흥행했고 로마 군영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상업적으로 발달한 곳이다 보니 영적으로 타락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준비된 그런 지방의 삶과 달리 도시의 삶이라는 것은 많은 것이 오가고 음란합니다. 사데에도 아프로디테라는 여신을 섬기는 큰 신전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도시의 중심에 이러한 신을 섬기는 신전이 위치해 있던 것이 일반적입니다. 

매 교회마다 주님을 뜻하는 표현이 있는데 사데교회에는 일곱 별과 일곱 영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별은 사자, 하나님의 효령을 받아 일을 하는 천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곱은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모든 천사들을 예수님이 머리가 되어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교회와 천사들의 머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곱 영이라고 할 때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일곱 눈이 온 세상에 두루 다닌다고 하는데 이 눈이 바로 영이라고 보면 됩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완전하고 하나이고 충만한 일곱 영, 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이 성령의 역사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우리가 영을 받았는데 우리가 그 영을 받았는데(롬 8:9)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빌 1:19)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이 영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것이 모두 우리의 것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양자의 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상속자이자 자녀가 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스가랴서의 눈이 바로 본문의 영이라고 했는데, 이는 완전한 영, 삼위일체 영, 충만한 영으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다스림을 이 마지막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영을 우리가 자녀가 되게 하는 양자의 영으로 부를 뿐 아니라 우리를 값 주고 사시고 주가 우리의 주인이 되시므로 주의 영이라고(고전 3:17-18)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고 그의 영광을 보니 우리가 그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7-18). 그러므로 본문의 일곱 별과 일곱 영을 가진 그리스도라고 하면 그가 자기의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자녀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시는데, 그 주님이 사데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먼저 알면 우리에게 평화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임합니다.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살펴보시고 기뻐하시고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니 그 책망이 그저 절망이 아닌 것입니다.



2.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1) 영적 생명


사데교회를 향한 책망은 우선 살았다고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 곧 겉은 멀쩡한데 속은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하신 설교 중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사데교회에 대한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전체 한국교회가 모인 자리에서 내 일생의 목회를 할 때 하나님께 회개한다고 무릎을 꿇고 설교하신 기억이 납니다. 한국교회가 살았다 하나 죽었다고 하며 그 말씀을 하신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영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창세기에 사람을 흙으로 빚고 생기를 불어넣으니 생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그 사람이 지정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으면 죽은 것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비록 죽은 듯해도 에스겔 환상에서 골짜기의 뼈처럼 생기가 임하면 뼈와 가죽과 힘줄과 살이 생긴 여호와의 군대가 됩니다. 그것이 진짜 살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에스겔의 다른 환상, 예루살렘 성전에 동편으로부터 생수가 흘러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환상에서 생수는 보혜사 성령입니다. 바로 살았다 하나 죽었다는 것은 다름이 아닌 우리 안에 보혜사 성령이 육체에 막혀 우리를 주장하고 있지 않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계속 육체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가로막고 육체적인 생각으로 영적인 것을 계산하다 보니 모든 것이 실상은 죽어 있는 실상을 사데교회에 말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주님이 잡히시기 전 거의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것이 종말의 때에 대한 경고입니다. 


2) 위선


마태복음 23장인데, 바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24장에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불법과 미혹이 많을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은 밖에만 희게 칠하고 안은 썩은 것이 가득합니다. 평토장한 무덤 역시 겉으로는 깨끗하나 그 밑에는 더럽고 썩은 것이 가득합니다.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뼈와 더러운 것이 가득한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고는 비석을 세워놓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때에 외식하는 모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외식이 무엇인가요. 겉은 멀쩡하고 살아있으나 속은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릇만 닦지 말고 네 자신을 닦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릇의 밖도 물론 닦아야 하지만 속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 잠을 못잘 만큼 시험에 들면서 큰 죄는 보지 못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거짓말하고 시기하고 이런 것은 죄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큰 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정작 작은 것 하나, 누가 길 가다가 쓰레기 버리고 버스에서 기침하는 것을 눈을 부릅뜨고 판단합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눈의 티끌을 탓하는 것입니다. 


3) 회개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편합니다. 살아 있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배드림, 찬송함, 말씀 봄, 내가 찔리는 것이 기쁨입니다. 힘들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말씀이 찔리는 것은 평강이 넘치는 것입니다. 일순간 찌르는 듯 해도 한순간 터집니다. 그것을 믿음과 경건의 비밀로 아는 것입니다. 경건의 비밀을 아는 자는 바로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찌르기도 때리기도 하지만 곧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 잘못해서 어머니께 혼나고 밥먹으라고 하면 밥먹고 어머니 곁에서 잘 때, 그 때가 가장 평화롭습니다. 죄를 가지고 조마조마하다가 오후에 학교에서 마음이 불안하다가 집에 가서 혼나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밥을 안 주시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정면으로 나서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실하고 솔직하게 나서십시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말씀하십시오.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면 하나님은 수십 수만 배도 용서하십니다. 사데교회를 향한 책망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은혜라고 바라봅니다.



3. 행위의 온전함: 헌신


그리고 사데교회가 또 책망받은 것은 행위에 온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원함이 없는 행위를 책망한 것입니다. 양이 많아서 온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것을 다 드려서 온전한 것입니다. 내 소유의 다소가 아니라 무엇으로 하나님께 드리는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의 헌금처럼 말입니다. 이는 곧 달란트대로, 받은 대로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받은 대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청교도 정신입니다. 높낮이가 없습니다. 다만 기뻐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도서관도 병원도 학교도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청교도 정신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짓는 것입니다. 모든 곳에서 가장 첫 번째로 교회를, 그리고 학교, 도서관, 병원을 짓는 것이 바로 청교도 정신, 곧 미국입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 우리에게는 충만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대로, 달란트 곧 선물의 분량대로 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살지 말고 두 달란트를 받은 대로 기뻐하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너비를 깨달아 어떠한지 알아 행하는 것이 충만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은 곧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잘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신 은혜를 가장 잘 누리는 것이 가장 잘 행하는 것입니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4:10). 또한 삼위일체의 충만함을 입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이 가운데 우리가 달란트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울며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4. 남은 자의 회복


사데교회는 우리가 주로 설교할 때 절망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데교회는 두 가지 책망, 살아 있다고 하나 죽은 자, 행위가 없는 자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회복시키는 분입니다. 남은 바 주께 된 것을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이 남은 자입니다. 이스라엘에 칠천 용사를 남겼다고 하십니다. 우리 시각은 언제든 그 남은 자, 그루터기로 향해야 합니다. 사데교회에도 타락하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깨워서 그 사람들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시대에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다음 세대를 살리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다시 교회로 모으는 것입니다. 종기는 잘라내되 어둠에 속한 것을 버리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교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그들이 찾아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는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풀어주시니 마음이 뜨겁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입었습니까. 

성도의 삶은 한가지입니다. 감사가 있으면 모든 게 온전합니다. 힘이 납니다. 생기가 솟습니다. 감사가 없이 불평하면 모든 것이 가라앉습니다. 병도 생깁니다. 머리도 아픕니다. 감사는 빛의 역사입니다. 은혜의 역사입니다. 사데교회에 이것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감사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 성경에 보면 다음 것이 따로 없습니다. 처음과 다음 것이 똑같습니다. 사데교회에게 이것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데교회에도 남은 자가 있습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몇 명이 있다고 하십니다. 사데를 사르디스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중 가장 먼저 나오는 자가 사르디스의 멜리토, 사데의 멜리토 입니다. 이 사데는 책망만 받았다고 하지만 멜리토라는 교부가 사데교회 출신입니다. 유명한 주석가이자 기독교 신앙을 견고히 지킨 초대교회 최초의 신학자 중 하나가 사데교회에서 났습니다. 본문의 모든 말씀들은 다 소망이라고 봐야 합니다. 



5. 결론


일곱 교회의 말씀은 모든 교회들이 다 들어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 특정한 말씀이 속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도 생기를 얻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믿음으로 살고 찬미하고 송영하는 즐거움으로 살면 됩니다. 괜히 기뻐하고 괜히 감사하고 괜히 영광돌리고 괜히 찬미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흰 옷을 입혀 주십니다. 흰 옷은 어떻게 보면 가장 약한 색입니다. 어느 색이든 섞이면 바로 변합니다. 색은 흰 것이 힘이 없으나 빛은 흰 빛이 모든 빛을 이깁니다. 색으로 살지 말고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나 영적인 빛은 흰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 우리를 이긴 자, 남은 자로 지키시고 우리에게 흰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일곱 영으로 살피시고 지키시고 이끄시고 끝내 열매 맺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