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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과 당위


           

인내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 | 계 3:7-13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9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515


인내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 | 계 3:7-13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9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515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녹취록>



1. 빌라델비아교회


오늘은 여섯 번째 교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칭찬만 받은 교회 중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가 있는데 그중 후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미국에 필라델피아라는 지역이 있는데 같은 단어로 이는 헬라어로 형제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서머나에서 브루기아를 잇는 선상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 지역은 그리 큰 도시는 아니지만 역시나 서머나처럼 황제숭배가 심했습니다. 무엇보다 포도주 생산으로 유명한 지역으로 술의 신을 숭배하는 것이 강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이 교회에 대해 뚜렷히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 지역은 현재 터키 지역, 소아시아 지역 중 이슬람화가 가장 늦게 된 지역이니 과연 주님의 말씀이 맞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2. 거룩하신 주님


예수께서 계시록 말씀에서 연속하여 자기를 드러내시는데 본문 말씀은 '거룩하고 진실하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거룩함은 유일하심, 절대적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마리아를 통해 나실 것을 나실 바 거룩한 자로 천사들이 찬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예수님이 고치셨을 때 귀신들이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합니다. 귀신이 가장 영적으로 더러운 영인데 그 영이 예수님의 거룩함을 보자 바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씀이 어렵다 하여 예수님을 떠난 바 있었는데 사실 어렵다고 한 것은 말 그대로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말을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의 말씀이 있으니 어디로 가오리까 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는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말씀을 하시고 신령한 말씀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쫓는 것은 옷 잘 입은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말처럼 말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거룩이요, 둘째는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분별되고 신령하고 속되지 않은 것으로 거룩한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진실하신 주님


또한 '진실'하시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거짓이 없으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고 식언하고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만 우리 주님은 진실하시고 거짓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하십니다. 그에게만 예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예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능력도 없고 진실도 없습니다. 둘은 곧 같은 말입니다. 내가 책임진다고 해도 그럴 능력이 없으니 거짓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에게 부모가 책임진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상 능력이 없으니 거짓이나 다름없습니다. 노력은 하겠지만 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능력이 진실함이고 진실함만이 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변개치 아니하심과 전능하심이 참된 능력입니다. 우리는 설령 변개치 않는다고 해도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고린도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부인하니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다'고 항변합니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 



4.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


다윗의 열쇠가 되신 분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의 열쇠, 자기 자신을 주심으로 모든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다스리는 그 열쇠를 가지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열쇠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 문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찢긴 예수님의 몸으로 휘장이 갈라지고 살 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그러므로 예수의 몸을 통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합당합니다. 주님의 공로, 주님의 의, 예수님을 주로 믿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열쇠, 곧 내가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를 하거나 말씀을 볼 때 그분이 누구신지 먼저 잘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시며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5. 열린 문


좁은 문 좁은 길로 갈 때 시온의 대로를 열어 주시고 지경을 열어 주십니다.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에 갈 때까지는 좁은 문 좁은 길로 갑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 3:8). '볼찌어다'는 송영입니다. 열린 문을 두었다는 것은 이미 완료형으로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열어서 젖혀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상한 몸이 살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완료형으로 이미 열어 주신 것입니다. 내가 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언제 먼저 했습니까. '두었다'는 말도 완료형입니다. 문을 열고 닫고 너가 알아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열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가 중요합니다. 바로 네 앞에, 우리 앞에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계시록 말씀은 이것이 핵심입니다. 모르는 어떤 복잡한 말씀을 여러 이단들처럼 푸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칭찬만 받았지만, 이미 그 칭찬을 받기까지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가 지성소라고 말씀을 나눈 바 있습니다. 누구나 그 살과 피로 들어가지 않고는 영생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로 들어가는 선택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는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앞에 이런 문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이 문을 우리에게 열어 두신 것입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메시아 예수께서 그 문을 열어 두신 것입니다. 우리가 간혹 두 문 앞에서 어디로 갈지 선택해야 한다면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미 문이 열려 있는 것이고 빛이 비추고 있으니 참으로 쉬운 길이 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선택과 견인


그래서 사실상 빌라델비아교회에 주신 말씀이지만 모든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은 곧 언약입니다. 언약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지체들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했다는 것은 우리 각자와 동시에 몸 된 교회를 선택하신 것도 맞습니다. 그렇게 보면 창세 전에 십자가지기교회도, 빌라델비아교회도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언약의 선택이요, 그 머리가 그리스도시요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창세 전에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은 한번 택하면 불변합니다. 그것은 끝까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견인입니다. 영접도 믿음도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 나는 것입니다. 선택인 것입니다. 고백 역시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닙니다. 혈육이 알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발이 잘 뛴다고 해서 잘 뛰는 것이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은혜로 주어져야 불변합니다. 은혜로 주어져야 안 다칩니다. 내 공로로 하는 것은 변하고 상합니다. 조변석개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주어가 되면 변덕스럽습니다. 내가 주어가 되서 주의 일을 하면 변덕스럽습니다. 그러니 불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어가 되면 나는 그 뒤에 감추어 따라가면, 그러면 불변합니다. 닫으면 열 자가 없습니다. 이미 본문 7절, 8절에서 빌라델비아교회에 대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잘못하면 윤리가 되어버립니다. 참았으니 문이 열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문이 열렸고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하시니 하나님이 빌라델비아교회처럼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서머나교회나 빌라델비아교회의 칭찬을 역으로 인간에게 원인을 돌려 우리 교회도 이렇게 하자고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말씀을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7. 하나님에게서 받아야 행한다


본문에 '두었다'는 말은 사실상 '주었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해야 천국을 간다고 했는데 사실 어린아이가 아는 것은 없습니다. 할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문을 열어 떠받들어 줘야 어린아이가 들어옵니다. 본문이 그 말씀입니다. 모든 게 은혜입니다. 그리고 나서 은혜에 대해 은혜로 은혜에 이르는 삶에 대해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자꾸 계시록을 공로로 읽으면 안 됩니다. 말세에는 은혜가 더 크게 역사합니다. 말세라고 공로가 있어야 한다, 내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단의 가르침입니다. 말세일수록 더욱 어린 양 예수에게 면류관을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천년이 어쩌고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에 대한 아멘만 정확하면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에 대한 첫 칭찬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지켰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은혜입니다. 평소에 백 미터를 20초에 뛰던 사람은 결코 갑자기 10초에 못 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니 작은 능력이 있었으나 말씀을 지키고 배반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예와 아니오가 분명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중심이 하나님께 합해야 합니다. 마음은 몸의 등불이라고 한다면 행위는 마음의 지표입니다. 마음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마음은 몸의 등불이요 행위는 마음의 지표입니다. 행위가 마음의 지표입니다. 행위가 그렇지 않은데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므로 모순됩니다. 물론 이것은 스스로가 요량해야 합니다. 남이 판단하기보다는 말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중심이 하나님께 합했다는 것은 작은 능력이지만 초라하고 작은 문 같아도 하나님이 열어 두신 것을 알고 작은 행위라도 드러낸 것입니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안하지는 마시라는 것입니다. 잘하려고 하면 낙담하거나 남을 질투하게 됩니다. 안 하지는 않으면 족합니다. 가장 작은 것이라도 한다면 큰 마음으로 가지고 안 하는 것보다 좋은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안 하지는 않는 것, 아주 작은 것을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바로 이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겉으로 화려하게 해도 중심이 없으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금식과 기도시간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설교하는 저부터 그렇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진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온전합니다. 신실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찌 신실합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는데 어린아이는 스스로 가기보다 업혀서 다니고 인도와 안내를 받는, 문을 열고 밥을 퍼서 갖다 줘야 하는 존재입니다. 아이 때는 화장실도 갖다 줍니다. 그게 바로 문을 열어 주는 것, 곧 문을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옮겨 주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의 칭찬은 그러므로 믿음이나 행위보다는 은혜에 대한 것입니다.



8. 말씀을 믿는 자에게 주님이 이루어 주신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어쨌든 우리는 두 번 생각하지 말고 말씀이 과하다고 하지도 말고 모자란다고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아멘 하고 그저 말씀대로 해야 한다, 말씀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원수 사랑에 대한 말씀도 못 지키더라도 말씀을 아멘하라는 것입니다. 지키는 그 자리에 일단 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하나님이 이미 택함 받은 백성을 끝까지 끌고 가시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능히 닫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 서신서에서 은혜를 말하다가 갑자기 계시록에서 행위를 말하는 이 한국교회의 풍조를 갈아 엎어야 합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성도들이 인내가 어디 있냐고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인데 지키는 것은 내 공로를 내세워 내가 지키고 행하는 것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물론 지키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지만 은혜가 없는 사람은 결국 말씀을 떠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 하고 받고 말씀을 지키면, 즉 아멘 하고 받으면 주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내가 지키거나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저 받아서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험의 때가 임한다고 합니다. 환란의 때입니다. 말씀 힘들다고 말씀 버리면 진짜 환란을 당합니다. 그게 마지막 때입니다. 내가 지킬 만한 것은 택하고 그렇지 않은 말씀을 버리면 반드시 영적으로 시험이 옵니다. 내가 할 수 있다 없다는 하나님께 맡기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내가 하지 못하는 말씀을 변개하는 것이요, 어린아이는 내가 지키지 못할 말씀은 지키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을 지키고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9. 결론


인내가 뭘까요. 인내는 은혜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인내의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우리의 면류관은 나는 부족하지만 은혜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비밀, 경건의 비밀입니다. 나의 연약함과 애통함을 헤아리시고 내가 기도하면 응답하시는 주님, 그 주님이 나의 면류관입니다. 이 면류관을 마지막 때 보좌의 어린양께 던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은혜로 내가 이 면류관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한다는 것과 거기에 우리 이름을 새겨 준다는 것은 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새 언약을 이루시고 언약의 백성임을 인 쳐 주신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첫 부분에 나오는 '이기는 자'는 오직 은혜로 이기는 것입니다. 은혜가 이기는 것입니다. 은혜 위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