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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2 주일낮예배] 라오디게아 교회에 명령된 열심과 회개(계 3:14-22) - 문병호 목사


라오디게아 교회에 명령된 열심과 회개 | 계 3:14-22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30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5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녹취록>



1. 라오디게아교회


작년부터 우리가 교회 설립 10주년을 기념으로 교회에 대한 말씀을 계속 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나서 4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오늘 일곱 번째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한 말씀을 보고 바로 다음주에 시작하려다가 요한계시록 21장의 천상의 교회에 대해서도 나누어야 할 것 같아 마지막으로 다음주 31주제로 마무리한 후 4복음서에 나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라오디게아교회에는 길게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데교회와 같이 이 교회도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위치에 대해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자면 지중해에서 직선으로 올라갔다가 지난번에 본 빌라델비아보다 동남쪽으로 70킬로미터, 현재 터키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골로새교회와 인접한 곳입니다. 골로새서에 이 라오디게아 지명이 계속 나오고 충성된 종으로 기록된 에바브라가 골로새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그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 옆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문안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 역시 제우스 신을 섬겼습니다. 무엇보다 라오디게야는 최고급 양모 산업이 발전한 관계로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이곳에는 안질에 잘 듣는 약이 있었습니다. 그 약이 구체적으로 뭔지 알 수 없으나 본문에도 눈에 약을 바르라는 표현이 나오니 관계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라오디게아교회 역시 예수님이 천사를 통해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이 부분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시는 것으로 '아멘'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멘'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우리가 모든 것이 그러하며 그렇게 된다고 '아멘' 합니다. 이 아멘은 두 번은 확증, 세 번은 찬송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할 때 신실하고 진리의 증인이신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신실함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참된 증인이라는 말은 요한계시록 1장 5절에서 이미 본 것과 같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계 1:5). 무엇보다 증인이라는 것은 부활의 첫 번째 열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마지막 때 의인의 부활을 할 것인데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보증이 되십니다. 그리고 창조의 근본이라고 14절에서 또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가 항상 중요한데 이는 골로새서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 첫 번째 피조물이라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의 근원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해 주님이 먼저 자신은 아멘이요, 충성되고 진실된 증인이요, 그리고 모든 창조의 근원으로 소개하시고 이 교회에 대한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3. 미지근함: 성령의 감동을 이성으로 막음


새벽에도 책망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것은 그저 혼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막대기로 지팡이로 모는 것입니다. 산길을 가는 말을 몰 때 채찍으로 치는 것은 말이 길에서 벗어나 발을 다쳐 산에서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을 그저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책망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징계입니다. 징계는 연단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계속 읽으면서 어떤 교회는 책망만, 어떤 교회는 칭찬만 받는다고 하여 따지기보다 사실상 이 모든 말씀이 나와 우리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는데 그 행위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아 미지근하다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토한다는 것은 속에 쓰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푯대를 향하여 성령의 감동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는데 이성이 이것을 판단하여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멘이요 진리인데 내 이성으로 이리저리 판단하여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미지근한 것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내가 너무 똑똑하여 성령의 감동을 내가 안 된다고 하고 어떨 때는 앞서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미지근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성령의 감동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서 뜨거워지는 것, 우리 안에 아멘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으면 성령의 감동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4. 영적 곤고함과 가련함


둘째 책망은 그들이 부자라고 하나 실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사데교회가 책망받은 것은 살아 있다 하나 죽은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야교회는 스스로 부요하다고 하나 메말라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입니다. 이를 설명하여 본문은 곤고하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굶주린 것을 곤고하다고 합니다. 거듭나도 우리에게 여전한 곤고함이 있는데, 이 곤고함은 어릴 때 냇가에서 놀다 모래를 모으면 위에서 맑은 물이 내려오듯 우리도 그래야 하는데 흙탕물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적으로 피곤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우리에게 꽉 차 있어서 주님께 받은 것들이 자리잡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듭난 후에 곤고한 자로 스스로를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25). 거듭난 사람에게 죄의 지배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한 곤고함은 있습니다. 그런데 곤고함이 있을 때 즉시 주께 이미 된 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고백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하늘 법정에서 이미 우리를 인쳐 주셨는데 우리가 근심이나 어떤 것으로도 이길 수 없습니다. 오랜 기도도 아닙니다. 오직 고백으로 이깁니다. 시편에 나오는 것도 이것입니다. 사방에서 적에 쫓기는 곤고함 가운데 감사함의 찬송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이런 곤고함과 더불어 가련한 것이 있었습니다. 가련함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의 길로 가지 않고 마땅히 구할 것이 아닌 것을 쫓는 것입니다. 자녀로서의 품격을 잃는 것입니다. 다른 주인 밑에 가 있을 때 가장 가련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6-19). 그러므로 부활의 삶을 소망하는 자만이 가장 복된 자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5. 영적 가난함: 하나님께 구하지 않음


또한 라오디게아교회는 자신들의 가난한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의 신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으로 가난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부요한 것입니다. 옆집 사람에게 꾸러 가는 것이 가난한 것이지 아버지에게 꾸러 가는 것, 기도하는 것은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만물을 지으시고 온전케 하시고 주인이신 아버지께 자녀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하지 못하는 것이 가난한 것입니다. 그리고 눈먼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영적인 눈이 어두운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음날 아침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불기둥이 가자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야말로 눈이 밝은 사람들입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눈먼 자 같으나 눈먼 자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것이 바로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가는 것입니다. 또한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수치입니다. 이방의 신에게 음란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와 같이 책망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교회가 되지 말자고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말은 은혜입니다. 종말은 찬송이고 송영이고 더 진리와 확신입니다. 불법과 미혹의 영이 많지만 진리의 역사도 더욱 큽니다. 복음의 더 큰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부터 이미 종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주셔서 우리를 사신 것은 자기 백성이 회개하여 진리 가운데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예수 시대 때 비진리 가운데 열심을 낸 것이 바로 열심당원입니다. 우리는 진리 가운데 열심을 내는데, 그것은 이미 우리가 디도서에서 본 것처럼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신 주님입니다. 그 의로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내 의가 아닙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3-14).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친 백성 삼기 위한 것이요, 그러니 불로 연단한 금처럼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여기서 금은 바로 말씀입니다. 물질이 아닌 불로 연단한 금, 곧 정금,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6. 영안: 주님께 간구하는 눈물


또한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했는데 이것 역시 영안으로 보아야 합니다. 육신의 눈이 닫힐 때 영안이 뜨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보고 눈에 가시같은 것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눈이 흐물흐물 해야 합니다. 어떤 대단한 것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바라보고 눈물 흘려서 내 눈이 허물어지면서 하나님 앞에 가라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은 계시록의 교회에 대한 말씀 중 하이라이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주님은 스스로 두드리시고 이것을 우리가 두드린 것으로 해 주십니다. 열심히 구하고 기도하라고 해서 마치 우리가 그것을 할 때 공로를 세운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신 것에 대해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더이상 책망이 없습니다. 주님과 한 상에서 밥을 먹는 것이 곧 성찬입니다. 이어서 21절은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 함께 다스리게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일곱교회에 대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