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 교회의 처음 사랑 | 계 2:1-7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4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313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녹취록>
1. 모든 교회를 향한 요한계시록의 말씀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를 가서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고 천사가 전해 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기록입니다. 환상 가운데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를 전하는 계시입니다. 환상 가운데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피로 우리를 해방하신 분이며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종말의 상황에 이 말씀이 기록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다 이루시고 마지막 때에 호령 가운데 다시 오신다는 그 일을 미리 알려 주신 것은 지금 구원 받은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때 이루어 주실 완전한 구원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 중 책망만 받은 교회도 있고 칭찬만 받은 교회도 있습니다만 특정 교회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와 성도는 칭찬 받을 일도 책망 받을 일도 모두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우리 교회에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지체입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그것이 종말의 이 때 우리의 관심입니다. 그가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나누어주시는지, 그리고 나타나시는지에 관한 것이 종말론입니다. 일곱 교회는 완전한 수, 꽉 찬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만국의 교회에 주는 말씀이라고 보면 됩니다.
2. 모든 교회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인자(人子)에 관한 말씀을 복음서에서 잘 보았습니다. 인자의 성육신과 고난 승천과 재림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사람의 아들로 부르는 것이 당연한데 굳이 인자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자 같은 이라고 하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본 제자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맡긴 자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인자 같은 그 분이 촛대 사이로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발에 끌리는 옷이라고 할 때 그것은 만국을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쭉 끌고 가시면 높은 산이 평평해지고 땅이 잠잠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짧아서 가닿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충만함으로 끌고 다니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또한 불꽃 같은 눈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만물을 살피고 감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난 주석 같은 발은 권능과 신속함을 의미합니다. 해 같이 힘차게 비추는 얼굴은 생명의 구원주의 광채를 의미합니다. 좌우에 날선 검 같은 입은 우리의 심령의 깊은 곳을 쪼개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다는 것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양처럼 완전한 영광을 의미합니다. 예수가 교회의 주와 머리가 되십니다. 자기의 의를 모든 백성들의 의로 삼아 주시고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이것을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빼내고 다른 사건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우리의 관점을 맞춰야 합니다. 예수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것이 우리의 종말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를 영접했지만 그를 다시 마주할 것으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종말의 신앙입니다. 사건이나 변화가 아니라 본질은 예수입니다. 1장 17절과 18절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과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교회의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로 묘사된 것입니다. 일곱 별이라고 하면 사자를 의미합니다. 일곱 촛대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환상을 보여주지만 어떤 때는 해석도 직접 기록합니다. 이런 것은 바로 받으면 됩니다. 반면 해석이 담기지 않은 다른 것들을 해석하는 것에 너무 매달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보기 전에 먼저 예수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일곱 천사, 즉 모든 천사를 사자로 부리셔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에베소교회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일곱 별을 붙잡았다는 말은 천사들을 호령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신다는 말은 일곱 교회를 다니심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지상의 모든 교회 사이를 다니시면서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살아계시고 움직이시면서 일곱 영, 일곱 별을 붙들고 그렇게 다스리시는 주님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에베소교회의 수고와 인내와 변증
사도 바울이 3년간 에베소교회에서 섬겼습니다. 이곳에는 아볼로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가서 세례를 줄때 성령의 큰 역사가 임한 교회입니다. 에베소는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 오늘날 터키 지방입니다. 로마의 최고 큰 군대 진영이 있었으며 신전이 또한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큰 여신, 아덴 신전이라고 합니다. 황제 숭배도 했던 곳입니다.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의 선교의 핵심은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회당에서 석달, 두란노에서 2년 동안 강론을 한 곳이 바로 에베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다 주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3차 전도여행 첫 부분의 기사가 바로 에베소에 대한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선포했습니다. 우상이 횡행하고 황제 숭배가 있었으며 병영이 있어 여러모로 문란했던 지역 가운데 있던 에베소교회입니다.
주님은 에베소교회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데, 먼저 칭찬을 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그것은 우선 일하고 기다릴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일하고 기다릴 줄 모르면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또한 변증, 즉 거짓된 것, 악한 것을 용납하지 않고 반박하여 잘라낸 것으로 칭찬을 받습니다.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이 그런 말입니다. 니골라 당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복음에서 멀어진 자들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시험하여 쳐낸 것입니다. 이것을 변증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잘못되면 잘못됐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가 행해야지 썩고 고름 생긴 것을 아무리 치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에베소교회는 참음과 인내로 칭찬을 받습니다. 2절의 참음이 말씀대로 행하고 열매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3절의 참는다는 것은 고난을 참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참아서 견디되 게으르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힘쓴 것입니다. 낙심이라는 것은 열심히 일을 했으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생깁니다. 그러나 조금 부족해도 결과에 낙심하지 않은 것으로 에베소교회가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열심히 섬기고 땀을 흘리고 잘못된 것은 분별하여 잘라내고 인내로 열매를 맺을 줄도 아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 이후 초대 교회에 가장 중요한 교회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교회입니다.
4. 에베소교회의 처음 사랑
1) 하나님의 내리사랑
그런데 4절은 이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여 책망합니다. 칭찬은 구체적인데 책망은 아주 모호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듯 합니다. 처음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 받은 것을 버린 것인지, 내가 처음 사랑한 것을 버린 것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라는 하나님의 부르심도 보면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말인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분법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은 사랑 받아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겠지요. 그래서 예수를 주라 부르고 아버지의 그 사랑 가운데 구원 받음을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처음 사랑은 이처럼 구원의 사랑, 내가 거듭난 사랑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암전, 어두움 가운데 스위치를 누르면 훨씬 빛이 강합니다. 이것과 같은 것으로 보면 됩니다. 도시에서 촛불이나 전조등을 들어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었던 우리에게 빛이 임하면, 지금도 있는 똑같은 빛이지만 새벽에 불을 켜면 밝아지는 것처럼 우리를 깨우시고 일으키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눈을 뜨고 일어난 그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사랑은 여호와의 유일하심을 인정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입니다. 소유를 나눠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여호와는 유일한 여호와시니 마음과 뜻과 정성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내리사랑이라고 합니다. 폭포가 아래로 떨어지듯 내리치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 무조건적 내리사랑입니다. 우리의 의사를 묻지 않는 절대적 사랑, 우리의 공로를 찾지 않는 무조건적 사랑,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내리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처음 임했을 때 우리가 생명을 얻고 성령이 임했을 때 우리 눈과 영안이 열리고 찬송의 입술이 열립니다. 그 첫사랑을 버렸다고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첫사랑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뭐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나 우리에게 믿음의 비밀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렸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 4:7). 세속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을 주시는 사랑이고 그 사랑은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가서 8장 6절은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다고 한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이전보다 나중에 더 창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처음 사랑이 더 크고 강하고 순수합니다. 왜요, 우리를 끝까지 이끌어가시는 첫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하셨다가 내일은 모레는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첫사랑은 하나의 시도에 불과하지만 마지막 때까지 끌고가시는 사랑이라면 생명을 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이 쭉 지나가시면 모든 것이 평정되어 평안해집니다.
2) 처음 믿음을 회복하라
그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가 떠났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만난,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서 만난, 사개오, 바디메오가 만난 그 처음 사랑입니다. 고백이 있고 변화가 있는 그 처음 사랑을 떠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처음 사랑이 떠났다는 것은 무조건적 감사가 떠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 은혜가 떠났습니다. 열심을 내지만 하나님께 맡기는 은혜가 떠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았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우리가 그 일의 증인이라고 한 그 고백이 강단에서 사라진다면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교회로 볼 때 처음 사랑은 오순절 성령을 받은 그 사랑을 의미할 것이니다. 이것이 부족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뭔가 우리에게 구체적인 것을 요구하신다면 더 편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의 심령이 쪼개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가 있습니다. 왜요,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말씀을 보지 마십시오.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봐야 합니다. 은혜인지, 감사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아멘이 온전하면 자질이 따라오니 자질은 아닐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냐고 물을 때 하나님의 보내신 자의 일을 하라고 답하신 그것과 같습니다. 모든 교회가 이 일에 대해 답변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든 처음 사랑에서 다 떠나 있습니다. 어느 자식이라도 처음 낳았을 때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스스로 난 자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지상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더 은혜로, 감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무조건적 내리사랑으로 회귀하자, 이것이 바로 에베소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이기는 자라고 하니 이단들이 난리를 치는데 이것은 바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이것을 공로로 읽어서 해석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은 내리사랑이니 우리가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되새기면 됩니다. 그리고 이 내리사랑을 받으면 우리가 생명나무 열매를 받습니다. 예수님 품에 있으면 그것 자체가 귀한 것이요 전부입니다. 뭔가 받는 것, 열매가 무엇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생명나무는 표징이고 상징일 뿐입니다. 뭔가 거기에 실체가 있는 것처럼 따지는 주석은 모두 틀린 것입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있는 것입니다.
5. 결론
우리는 진보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거룩해지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이런 묘한 관계 속에 우리의 성숙함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시면서 딱딱한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 신비한 함수관계에 우리가 믿음으로 아멘 하는 것입니다. 첫 사랑은 내 공로가 전혀 없는 순수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진보에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처음 사랑 | 계 2:1-7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4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313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녹취록>
1. 모든 교회를 향한 요한계시록의 말씀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를 가서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고 천사가 전해 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기록입니다. 환상 가운데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를 전하는 계시입니다. 환상 가운데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피로 우리를 해방하신 분이며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종말의 상황에 이 말씀이 기록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다 이루시고 마지막 때에 호령 가운데 다시 오신다는 그 일을 미리 알려 주신 것은 지금 구원 받은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때 이루어 주실 완전한 구원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 중 책망만 받은 교회도 있고 칭찬만 받은 교회도 있습니다만 특정 교회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와 성도는 칭찬 받을 일도 책망 받을 일도 모두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우리 교회에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지체입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그것이 종말의 이 때 우리의 관심입니다. 그가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나누어주시는지, 그리고 나타나시는지에 관한 것이 종말론입니다. 일곱 교회는 완전한 수, 꽉 찬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만국의 교회에 주는 말씀이라고 보면 됩니다.
2. 모든 교회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인자(人子)에 관한 말씀을 복음서에서 잘 보았습니다. 인자의 성육신과 고난 승천과 재림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사람의 아들로 부르는 것이 당연한데 굳이 인자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자 같은 이라고 하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본 제자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맡긴 자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인자 같은 그 분이 촛대 사이로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발에 끌리는 옷이라고 할 때 그것은 만국을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쭉 끌고 가시면 높은 산이 평평해지고 땅이 잠잠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짧아서 가닿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충만함으로 끌고 다니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또한 불꽃 같은 눈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만물을 살피고 감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난 주석 같은 발은 권능과 신속함을 의미합니다. 해 같이 힘차게 비추는 얼굴은 생명의 구원주의 광채를 의미합니다. 좌우에 날선 검 같은 입은 우리의 심령의 깊은 곳을 쪼개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다는 것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양처럼 완전한 영광을 의미합니다. 예수가 교회의 주와 머리가 되십니다. 자기의 의를 모든 백성들의 의로 삼아 주시고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이것을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빼내고 다른 사건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우리의 관점을 맞춰야 합니다. 예수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것이 우리의 종말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를 영접했지만 그를 다시 마주할 것으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종말의 신앙입니다. 사건이나 변화가 아니라 본질은 예수입니다. 1장 17절과 18절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과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교회의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로 묘사된 것입니다. 일곱 별이라고 하면 사자를 의미합니다. 일곱 촛대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환상을 보여주지만 어떤 때는 해석도 직접 기록합니다. 이런 것은 바로 받으면 됩니다. 반면 해석이 담기지 않은 다른 것들을 해석하는 것에 너무 매달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보기 전에 먼저 예수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일곱 천사, 즉 모든 천사를 사자로 부리셔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에베소교회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일곱 별을 붙잡았다는 말은 천사들을 호령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신다는 말은 일곱 교회를 다니심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지상의 모든 교회 사이를 다니시면서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살아계시고 움직이시면서 일곱 영, 일곱 별을 붙들고 그렇게 다스리시는 주님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에베소교회의 수고와 인내와 변증
사도 바울이 3년간 에베소교회에서 섬겼습니다. 이곳에는 아볼로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가서 세례를 줄때 성령의 큰 역사가 임한 교회입니다. 에베소는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 오늘날 터키 지방입니다. 로마의 최고 큰 군대 진영이 있었으며 신전이 또한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큰 여신, 아덴 신전이라고 합니다. 황제 숭배도 했던 곳입니다.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의 선교의 핵심은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회당에서 석달, 두란노에서 2년 동안 강론을 한 곳이 바로 에베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다 주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3차 전도여행 첫 부분의 기사가 바로 에베소에 대한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선포했습니다. 우상이 횡행하고 황제 숭배가 있었으며 병영이 있어 여러모로 문란했던 지역 가운데 있던 에베소교회입니다.
주님은 에베소교회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데, 먼저 칭찬을 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그것은 우선 일하고 기다릴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일하고 기다릴 줄 모르면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또한 변증, 즉 거짓된 것, 악한 것을 용납하지 않고 반박하여 잘라낸 것으로 칭찬을 받습니다.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이 그런 말입니다. 니골라 당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복음에서 멀어진 자들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시험하여 쳐낸 것입니다. 이것을 변증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잘못되면 잘못됐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가 행해야지 썩고 고름 생긴 것을 아무리 치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에베소교회는 참음과 인내로 칭찬을 받습니다. 2절의 참음이 말씀대로 행하고 열매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3절의 참는다는 것은 고난을 참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참아서 견디되 게으르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힘쓴 것입니다. 낙심이라는 것은 열심히 일을 했으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생깁니다. 그러나 조금 부족해도 결과에 낙심하지 않은 것으로 에베소교회가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열심히 섬기고 땀을 흘리고 잘못된 것은 분별하여 잘라내고 인내로 열매를 맺을 줄도 아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 이후 초대 교회에 가장 중요한 교회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교회입니다.
4. 에베소교회의 처음 사랑
1) 하나님의 내리사랑
그런데 4절은 이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여 책망합니다. 칭찬은 구체적인데 책망은 아주 모호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듯 합니다. 처음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 받은 것을 버린 것인지, 내가 처음 사랑한 것을 버린 것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라는 하나님의 부르심도 보면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말인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분법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은 사랑 받아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겠지요. 그래서 예수를 주라 부르고 아버지의 그 사랑 가운데 구원 받음을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처음 사랑은 이처럼 구원의 사랑, 내가 거듭난 사랑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암전, 어두움 가운데 스위치를 누르면 훨씬 빛이 강합니다. 이것과 같은 것으로 보면 됩니다. 도시에서 촛불이나 전조등을 들어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었던 우리에게 빛이 임하면, 지금도 있는 똑같은 빛이지만 새벽에 불을 켜면 밝아지는 것처럼 우리를 깨우시고 일으키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눈을 뜨고 일어난 그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사랑은 여호와의 유일하심을 인정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입니다. 소유를 나눠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여호와는 유일한 여호와시니 마음과 뜻과 정성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내리사랑이라고 합니다. 폭포가 아래로 떨어지듯 내리치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 무조건적 내리사랑입니다. 우리의 의사를 묻지 않는 절대적 사랑, 우리의 공로를 찾지 않는 무조건적 사랑,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내리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처음 임했을 때 우리가 생명을 얻고 성령이 임했을 때 우리 눈과 영안이 열리고 찬송의 입술이 열립니다. 그 첫사랑을 버렸다고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첫사랑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뭐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나 우리에게 믿음의 비밀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렸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 4:7). 세속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을 주시는 사랑이고 그 사랑은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가서 8장 6절은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다고 한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이전보다 나중에 더 창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처음 사랑이 더 크고 강하고 순수합니다. 왜요, 우리를 끝까지 이끌어가시는 첫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하셨다가 내일은 모레는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첫사랑은 하나의 시도에 불과하지만 마지막 때까지 끌고가시는 사랑이라면 생명을 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이 쭉 지나가시면 모든 것이 평정되어 평안해집니다.
2) 처음 믿음을 회복하라
그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가 떠났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만난,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서 만난, 사개오, 바디메오가 만난 그 처음 사랑입니다. 고백이 있고 변화가 있는 그 처음 사랑을 떠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처음 사랑이 떠났다는 것은 무조건적 감사가 떠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 은혜가 떠났습니다. 열심을 내지만 하나님께 맡기는 은혜가 떠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았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우리가 그 일의 증인이라고 한 그 고백이 강단에서 사라진다면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교회로 볼 때 처음 사랑은 오순절 성령을 받은 그 사랑을 의미할 것이니다. 이것이 부족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뭔가 우리에게 구체적인 것을 요구하신다면 더 편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의 심령이 쪼개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가 있습니다. 왜요,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말씀을 보지 마십시오.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봐야 합니다. 은혜인지, 감사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아멘이 온전하면 자질이 따라오니 자질은 아닐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냐고 물을 때 하나님의 보내신 자의 일을 하라고 답하신 그것과 같습니다. 모든 교회가 이 일에 대해 답변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든 처음 사랑에서 다 떠나 있습니다. 어느 자식이라도 처음 낳았을 때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스스로 난 자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지상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더 은혜로, 감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무조건적 내리사랑으로 회귀하자, 이것이 바로 에베소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이기는 자라고 하니 이단들이 난리를 치는데 이것은 바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이것을 공로로 읽어서 해석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은 내리사랑이니 우리가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되새기면 됩니다. 그리고 이 내리사랑을 받으면 우리가 생명나무 열매를 받습니다. 예수님 품에 있으면 그것 자체가 귀한 것이요 전부입니다. 뭔가 받는 것, 열매가 무엇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생명나무는 표징이고 상징일 뿐입니다. 뭔가 거기에 실체가 있는 것처럼 따지는 주석은 모두 틀린 것입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있는 것입니다.
5. 결론
우리는 진보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거룩해지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이런 묘한 관계 속에 우리의 성숙함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시면서 딱딱한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 신비한 함수관계에 우리가 믿음으로 아멘 하는 것입니다. 첫 사랑은 내 공로가 전혀 없는 순수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진보에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