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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과 당위


           

서머나 교회의 충성 | 계 2:8-11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5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320


서머나 교회의 충성 | 계 2:8-11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5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320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녹취록>



1. 서머나교회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서 주의 날에 환상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일곱 교회의 사자들, 천사들에게 편지를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서버두사빌라.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에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주일에 나팔 소리와 같은 음성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입니다. 마지막 때에 다 듣게 되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사도 요한이 듣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교회인 서머나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처럼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여겨야 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을 들으라”라고 항상 마지막에 말씀하십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위로 56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서머나는 작은 도시가 아닙니다. 과거 리디아라는 나라의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로마 군대로 여기에 진주했습니다.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모두 무너뜨린 후 대 박해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살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는 유대인과 로마인도 많습니다. 그래서 로마인과 유대인의 핍박이 많았던 곳입니다. 그럼에도 칭찬만 받은 서머나교회입니다. 폴리캅이라는 순교자가 섬긴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나쁘게 대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하나님을 배반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2.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창조주 하나님, 구원주 하나님


이 서머나교회에게 편지하신 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계 2:8). 십계명이나 신앙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정확한 정립을 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뛰어난 인물이나 큰 산처럼 여기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주님은 십계명에서도 처음에 ‘나는 ~이다’라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요한계시록의 교회들마다 편지하는 이에 대한 설명이 다릅니다. 그러나 각 교회에 한정되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교회에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촛대 사이를 다시는 분으로 주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서머나교회에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1:17-18에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누가 말씀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 주,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신랑,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성도가 한 몸 된 교회이며, 성도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갑니다. 이는 머리로부터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것입니다. 머리로부터 양분을 받아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만난 그 주님의 모습을 우리가 계속 그리고 만나야 합니다. 1:12-18의 내용입니다.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는 교회입니다. 촛대 사이는 거니신다는 것은 교회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인자 같은 이는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발에 끌리는 옷은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지 말고 믿음으로 알아야 합니다. 금띠는 권위를 의미합니다. 1:14-15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이것은 권능을 의미합니다. 1:15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많은 물소리는 깊고 넓은 섭리와 정결케 하심을 의미합니다. 1: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처음이며 마지막이요”와 같은 말씀이 요한계시록 22:13에서도 나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알파와 오메가는 알파벳입니다. 우리나라 글자로 하면 ㄱ부터 ㅎ까지를 뜻합니다. 처음과 마지막을 그 안에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처음과 마지막 그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시간적 개념이고, 시작과 마침은 일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 지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영원은 이성으로 헤아리가 어렵습니다. 만물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생각과 행위의 뜻의 시작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시작이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끝도 주님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마지막까지 만물을 보존하시고 운행하시고 통치하시는 섭리자이십니다. “처음이며 마지막이요”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는 구원주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가 죽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이기시고, 자기 죽음으로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이 권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음은 생명만이 이길 수 있고, 어둠은 빛만이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 생활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 교회의 외적 궁핍과 내적 부요


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서머나교회는 환난과 궁핍을 당했는데, 주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주를 위한 고난을 당하고 진리를 위한 고난을 당하고 신앙을 위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환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당하는 핍박입니다. 서머나교회에 핍박이 심했습니다. 로마인과 유대인에게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폴리캅과 같은 순교자도 있었습니다. 서머나교회에는 궁핍도 있었습니다. 즉 가난입니다.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이 환난과 궁핍은 외적이고 환경적이고 육체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즉 영적으로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겉보기에는 환난과 궁핍이 많으나, 외적 환경은 그렇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서머나교회는 부자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환난은 수치와 함께 옵니다.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가난해 보여도 그리스도의 부요하심이 우리에게 충만히 주시는 은혜, 기쁨, 성령의 능력, 은사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부자입니다. 이것이 서머나교회다운 모습니다. 



4. 신앙의 박해와 하나님의 섭리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입에 담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단시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조상을 자랑하며 할례를 자랑하는 자는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십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것이면 아브라함의 것입니다(갈 3:29).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자입니다. 형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후손이 진정한 유대인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은 하박국 2:4, 창세기 15:6에서 말하는 믿어서 의롭다 함을 받는 은혜를 누리는 자입니다. 육신의 할례를 자랑하는 자는 겉보기에 부요해 보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주의, 형식주의가 있습니다. 이교도들은 현란합니다. 개신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말씀만 있습니다. 심비에 새긴 말씀만 있고, 오색찬란한 것이 없습니다. 이교도는 금색 모자를 쓰고 손에 뭔가를 들고 있습니다. 무엇이 부요한 것입니까? 믿음이 부요하고, 은혜가 부요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미혹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을 다녀 봐도 유대인들이 율법 두루마리를 전시한 것을 보면 뭔가 마음이 쏠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다 필요 없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분만 가지면 우리는 부요한 자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화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언약궤, 시은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날마다 베푸시는 그 은혜가 부요합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가난해도 하나님께는 칭찬받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더하시라고 하셨습니다.

10절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주님이 주시는 시험은 말씀으로 당기시는 것이고, 마귀는 말씀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마귀가 주는 시험은 물리쳐야 합니다. 말씀을 끌고가는지, 멀어지게 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환난 가운데 일견 낙심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 더 나아가야 합니다. 마귀가 옥에 던져 넣는 시험은 진리의 시험입니다. 진리와 비진리의 시험입니다.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이 숫자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 10을 네로 이후의 기독교를 핍박한 로마 황제 10명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볼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환난이 있다고 여기시면 됩니다. 욥을 시험한 것도, 사탄이 쳤음에도 하나님이 허락해서 그러했습니다. “십 일 동안”이라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견딜 만한, 이길 만한 시험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5. 끝까지 예수를 의지하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여기서 ‘충성하다’는 원어에서 ‘신실하다’와 의미가 같습니다. 충성하라는 믿음을 지키고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주인의 말에 충실하라는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 참으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마지막 때에 인내가 있는데, 그 인내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미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우리에게는 미쁨이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 충성이 불가능합니다. 미쁨이 있으려면, 변함이 없어야 하고 전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하기도 하고 전능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미쁘십니다. 고린도후서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하나님은 미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미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예수님이 미쁘십니다. 예수님이 신실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예”는 순종입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겉보기에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부요한 자입니다. 우리는 미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예가 되고 아니오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께는 예만 됩니다. 우리는 이것에 아멘 합니다. 그러므로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것은 성도가 완전해야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세에는 율법의 시대가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은 주님을 믿으면 주님의 예를 우리가 아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우리가 받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면류관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내 공로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믿음에 상급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부요하셔서 우리가 부요합니다. 예수님만이 신실이시요 충성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아멘 함으로써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모습니다.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모든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의 말씀을 모든 교회가 들어야 합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둘째 사망은 심판, 불못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요함을 누리고, 우리 일상의 고난, 환난, 궁핍이 있더라도, 영적 부요함이 있습니다. 그 부요하신 분이 우리에게 충성을 주십니다. 그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