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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의 진보 | 계 2:18-29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7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403


두아디라 교회의 진보 | 계 2:18-29 | 문병호 목사 | 교회의 본질과 당위 27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403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녹취록>



1. 두아디라교회의 그리스도


지난번 살펴본 세 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교회는 해변가에 있었습니다. 두아디라교회가 있는 곳은 크지는 않으나 공업이 발달한 특히 염색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염색이 굉장히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염색이라는 것이 옷감의 내구성을 높이고 미적 가치를 높인다는 측면에서 당시에는 매우 가치가 큰 일이었을 것입니다. 두아디라는 또한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에서 마게도니아 첫 성에서 자주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난 일에서도 그 지명을 볼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는 작은 도시였으나 여러 사람들의 모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로 노동조합이나 이런 결사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고대의 세계가 그렇듯 모이니 우상숭배가 있었고 음란과 탐욕이 있었던 도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첫 서두에 항상 주님이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이 중요한데 이번 성경 역시 눈이 불꽃 같고 이에는 날선 검, 다리는 주석과 같고 가슴에는 금 띠가 있고 옷자락을 끌고 간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다른 교회에 보낸 성경과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정확히 못박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두아디라교회에 대한 주님의 뜻은 하나님의 진리를 각성시키고 각인시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이 불꽃 같다는 말은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한 것인데, 바로 인간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며 우리가 보는 너머를 보시며, 신령하고 거룩한 것을 찾으시는 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악한 것, 더러운 것은 태우고 깨끗하고 거룩하고 선한 것은 찾아내서 보살피시고 상급주시는 그 눈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올바른 것을 찾아내서 우리에게 자상하게 세워주시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꽃, 불은 거듭난 자에게는 귀한 것이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태우는 것이요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듭난 자에게 불꽃 같은 눈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녀를 찾으시고 그들에게서 완전한 것을 요구하다기보다 격려하고 보듬어주시고 거룩하게 해주시는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또한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하는 것은 권세 있는 통치를 의미합니다. 특히 빛난다는 것은, 모난 것이 없고 치우치지 않고 사사로운 것이 덕지덕지 붙어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신앙이 그렇습니다. 많은 것을 그리고 입히고 세우고 그런 것을 하지 않습니다. 매끈하고 단순합니다. 또한 변함 없는 것, 순수한 다스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특히 발이라고 할 때 발은 움직이는 것, 즉 살아서 역사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만이 살아계시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것은 그가 전부 도말시키십니다. 이렇게 보면 두아디라교회의 하나님은 진리--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바로 서 있는가를 부지런하게 다니시며 보는 하나님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2. 칭찬과 책망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두아디라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모두 받았습니다. 우선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으니 어디서 떨어졌는지 확인하라고 책망을 받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교회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열매의 법칙입니다. 열매로 압니다. 한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그대로 있으되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겨자씨는 눈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겨자씨를 심으면 큰 나무를 이루고 새가 깃듭니다. 그리고 30배, 60배, 100배의 비유가 있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나라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냥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이후가 낫고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다는 욥기의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에 있어서 성도들은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자라감이 있습니다. 누구에게까지냐 하면 바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자라갑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이렇게 자라기 위해서는 계속 나눈 것처럼 잘 누려야 합니다. 어린아이 때만 누리고 커서는 스스로 하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뭔가 해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들의 꽃도 풀도 열매도 우리는 조금 할 뿐입니다. 믿음과 말씀과 기도와 고백과 헌신에서 자라가는 것은 잘 누릴 때 이루어집니다. 물론 우리가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직 은혜의 신앙은, 우리가 자라감이 하나님 앞에서 상급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의 복락이 바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믿음과 성령과 은혜로 시작했다가 육체와 공로와 자질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두아디라교회가 칭찬 받은 것은 잘 붙들었기 때문인데 그 이면에 바로 책망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모든 교회가 다 그렇습니다. 같은 것인데 잘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두아디라교회가 처음 사랑을 잘 지켜서 칭찬받았으나 또 그것을 잘 지키지 못해서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이 부분에 실족이 일어납니다. 내가 잘하는 것이 못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절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잘할 때 하나님의 은혜요, 못할 때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책망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 회개의 기회를 받은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은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쓴물이 흐르지만 쑥과 함께 꿀을 섞어 먹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와 저 교회를 칭찬과 책망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요, 모두 우리에게 향한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두아디라교회의 처음보다 나중 행위가 더 커졌다고 하는 것은 성화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화는 내가 더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더 잘 누리는 것, 은혜에 더 잘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힘과 기쁨이 있습니다. 



3. 두아디라교회를 향한 칭찬


1)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이 교회가 칭찬을 받은 것은 다섯 가지입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9). 우선 사업은 '일'이라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 일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선포한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 선포, 말씀 가르침을 잘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으로 칭찬 받았습니다. 우리에게서 아가페 사랑은 나오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형제애, 이성애가 있을 뿐 하나님의 사랑은 없습니다. 이것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우리가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빛이 나에게 임하기 전에는 빛을 비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전에는 사랑을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사랑으로도 칭찬받았다는 것은 잘 비추었다는 말입니다. 공로로 이것을 읽으면 실족합니다. 잘 사는 것은 누릴 때입니다. 가장 잘 누린 사람이 순교를 합니다. 자질 있는 사람은 순교하지 못합니다. 누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삽니다. 그것이 사지가 찢기는 일이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 또 믿음으로 변함이 없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위한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위한 말씀이라고 해야 믿는 것이고, 성도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칭찬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야곱의 이삭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요, 요셉을 구렁텅이에서 건져낸 하나님이 나를 건져내시고, 창 끝에서 다윗을 지키신 하나님이 나도 위경에서 지켜 주심을 아는 것, 의지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또한 섬김이 있습니다. 눈이 발을, 발이 눈을 섬기듯 성도가 서로 섬깁니다. 


2) 인내


그리고 인내로 처음보다 나중이 낫다고 합니다. 오늘 새벽에 본 디도서 2장 2절에 본 것처럼 인내는 바람 가운데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인내라고 한 것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3). 본문에 나오는 인내도 그런 의미입니다. 성도의 열매의 법칙은, 심지어 가라지가 있어도, 양분을 뽑아 먹어도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을 때 자연히 구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정이는 태우고 알곡은 들이는 것, 이것이 인내의 영역입니다. 부족한 저도 신앙생활 하면서 그런 간증이 계속 있습니다. 뭔가 일이 아니되는 것 같은 때 감사해야 합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저도 얼마 전에 시를 실으려고 했는데 신문사의 지면이 안 된다는 이유로 못 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국민일보에서 사순절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해서 썼고, 그것을 본 기독신문에서 전면에 자유롭게 이번 절기에 대한 글을 써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을 쓰다 보니 그 시가 생각이 나서 실었습니다. 우리에게 뭔가 일이 안되고 어려운 것 같을 때 참아야 합니다. 못 참아서 탈이지 많이 참아서 탈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참아도 많이 못참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씩 참으라고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내가 주어에서 빠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어로 서야 합니다. 내가 주어가 되면 절대 몇번 못 참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핍박과 어려움이 많았던 그 시기 잘 참고 처음 행위보다 나중 행위보다 칭찬 받은 것은 의미가 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 바로 책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섰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숫돌로 갈듯 우리의 심령이 이 때 갈리는 것입니다. 모난 것은 빚어주시고 징 쳐주시고 익혀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잘하는데 저것은 못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잘하는 것이 못하는 것이고 못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날마다 죽노라 하는 말입니다. 잘한다고 교만하지 말고 못한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다 같이 있습니다. 앞면과 뒷면에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것을 느낀 것입니다. 칭찬 받는 그곳에 책망이 있는 것입니다.



4. 지속적 회개와 회복


본문에 나오는 이세벨은 아합왕의 왕비입니다. 고향이 시돈으로 본래 우상을 많이 섬긴 곳 출신입니다. 엘리야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기도해서 불도 비도 내린 그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세벨 때 아합과 같이 자신을 팔아 악행을 했다고 합니다. 아합은 어찌 보면 성정이 약한 사람이라면 이세벨은 더 강고하여 악한 자입니다. 나봇의 포도원도 아합왕이 고민할 때 이세벨이 단숨에 뺏고 죽입니다. 나봇의 피를 개가 핥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세벨도 죽임을 당해 그 피를 개가 핥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 20절에서 23절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뜻과 생각을 살피는 분이신데, 그들이 우상숭배하고 행음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회개하지 않을 때, 회개 후 더 크게 사용된 다윗과 달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침상에 던진다는 것은 음행한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인다는 것이요, 예고 없이 심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우리 주님은 이 교회에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바로 너희가 가진 것을 나중까지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칭찬 받았던 것이 저녁에 책망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두렵고 무서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특히 처음 것을 잡는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성령과 말씀의 검입니다. 검을 한번 뽑으면 끝까지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는 길을 마치기 전에 검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 검은 말씀입니다. 성령의 검입니다. 말씀을 끝까지 붙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26절,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 다스리는 것은 머리가 되는 것이요, 다스린다는 것은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잘 전해서 많은 사람을 주에게 돌아오게 하는 일을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내 손에 말씀과 성령의 검이 들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잘 사용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