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한층 강조합니다. 이것은 ‘날마다 죽노라’고 하는 바울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세상의 것과 달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입니다. 그러니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윤리적 본받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이런 윤리적 본받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을 믿고 아멘하는 것’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빚이 없습니다. 전적 은혜, 오직 은혜, 우리에게는 감사밖에 없습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 80장이 이 말씀과 상통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짐을 짐은 생명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수고하고 짐진 자들은 다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와서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멍에라고 하는데 주께 와서 배우면 쉼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짐은 우리 안에 생명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를 져야, 주님의 멍에를 메야 향기와 빛이 납니다. 옛날 찬송을 보면 다 십자가의 소망을 말합니다.
칼빈은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기독교 강요>>에서 말합니다. 이 책을 번역 할 때 장까지는 칼빈이 제목을 붙였으나 절에 대한 제목은 제가 붙였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내용을 보며 십자가의 훈련, 연단, 순종, 치료, 징계, 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즐거움으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십자가에서 배워야 합니다. 모든 교육이 십자가에 다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연단이 있습니다. 그냥 고난 당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 걸쳐 놓고 고난을 당해야 연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주님의 고난이 보이며 내 고난이 사라집니다. 그때 주를 외침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십자가에 들어간 모든 것은 소망으로 나옵니다. 십자가는 절망이 아닌, 죽음을 죽이는 생명의 터입니다.
네 번째는 십자가의 순종입니다. 내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순종을 배웁니다.
다섯 번째로 십자가의 약, 치료라고 붙였습니다. 십자가는 상처가 아닙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나음입니다. 내 수치를 낫게 하는 약이고 내 마음의 아픔을 육체의 아픔을 낫게 하시는 약입니다.
다음으로 십자가의 징계는 징벌이 아닙니다. 징계는 훈계, 아비와 어미의 매입니다. 징벌은 적을 향해 쏟아내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개구장이로 놀다 혼나면 그날 밤이야말로 가장 잘 잡니다. 징계는 달콤합니다. 징계가 없으면 표가 납니다. 뭔가 애가 집에 들어갔다 나올 때 다음날 달라짐이 있으면 징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위로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쉼입니다. 이사야서 40장의 시작이 위로로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즐거움입니다. 십자가가 즐겁습니다. 어제도 제가 설교 준비를 하고 산책을 했습니다. 하늘을 보니 밤이지만 아름답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문해 봤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 외에 알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십자가에 지금 내가 달려 있으면 온갖 상념들이 내게 있을까요?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다 부질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 달렸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오직 생명만 있습니다. 나에게 어머니, 아버지 같은 잔잔한, 달콤한 징계가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본문 말씀에서 십자가의 도를 알려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라고 엄히 말씀하신 하신 후 십자가 외에 생명이 없음을 말씀을 주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한층 강조합니다. 이것은 ‘날마다 죽노라’고 하는 바울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세상의 것과 달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입니다. 그러니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윤리적 본받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이런 윤리적 본받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을 믿고 아멘하는 것’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빚이 없습니다. 전적 은혜, 오직 은혜, 우리에게는 감사밖에 없습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 80장이 이 말씀과 상통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짐을 짐은 생명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수고하고 짐진 자들은 다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와서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멍에라고 하는데 주께 와서 배우면 쉼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짐은 우리 안에 생명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를 져야, 주님의 멍에를 메야 향기와 빛이 납니다. 옛날 찬송을 보면 다 십자가의 소망을 말합니다.
칼빈은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기독교 강요>>에서 말합니다. 이 책을 번역 할 때 장까지는 칼빈이 제목을 붙였으나 절에 대한 제목은 제가 붙였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내용을 보며 십자가의 훈련, 연단, 순종, 치료, 징계, 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즐거움으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십자가에서 배워야 합니다. 모든 교육이 십자가에 다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연단이 있습니다. 그냥 고난 당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 걸쳐 놓고 고난을 당해야 연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주님의 고난이 보이며 내 고난이 사라집니다. 그때 주를 외침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십자가에 들어간 모든 것은 소망으로 나옵니다. 십자가는 절망이 아닌, 죽음을 죽이는 생명의 터입니다.
네 번째는 십자가의 순종입니다. 내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순종을 배웁니다.
다섯 번째로 십자가의 약, 치료라고 붙였습니다. 십자가는 상처가 아닙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나음입니다. 내 수치를 낫게 하는 약이고 내 마음의 아픔을 육체의 아픔을 낫게 하시는 약입니다.
다음으로 십자가의 징계는 징벌이 아닙니다. 징계는 훈계, 아비와 어미의 매입니다. 징벌은 적을 향해 쏟아내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개구장이로 놀다 혼나면 그날 밤이야말로 가장 잘 잡니다. 징계는 달콤합니다. 징계가 없으면 표가 납니다. 뭔가 애가 집에 들어갔다 나올 때 다음날 달라짐이 있으면 징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위로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쉼입니다. 이사야서 40장의 시작이 위로로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즐거움입니다. 십자가가 즐겁습니다. 어제도 제가 설교 준비를 하고 산책을 했습니다. 하늘을 보니 밤이지만 아름답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문해 봤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 외에 알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십자가에 지금 내가 달려 있으면 온갖 상념들이 내게 있을까요?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다 부질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 달렸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오직 생명만 있습니다. 나에게 어머니, 아버지 같은 잔잔한, 달콤한 징계가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본문 말씀에서 십자가의 도를 알려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라고 엄히 말씀하신 하신 후 십자가 외에 생명이 없음을 말씀을 주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