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 수요일 묵상 | 3. 자기 부인: 하나님을 인정함

조회수 20
     본문 마태복음 24절은 "누구든지"라고 말씀합니다. 이 누구든지는 제자들에게만 준 말씀이 아니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죽는다고 하실 때 십자가의 죽음임을 알고 더 절망하고 좌절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극히 큰 고통이 있고 서서히 죽이는 인간이 발명해 낸 가장 흉악한 사형 방식입니다. 동양에도 여러 방식이 있으나 십자가형이야말로 가장 수치스럽고 괴로운 형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호자와 자식들 부모들조차도 그 옆에 가기를 꺼려하는 형틀이요 이방인들의 형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이 죽음을 제자들의 죽음으로까지 연결시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걱정에 대해 달래거나 안심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를 살리기 위한 죽음이라는 등의 표현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십자가를 입에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이 처음 나오지 않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당시에는 직분에 관한 내용이 요지였다면 본문은 약간 다릅니다. 이방의 형벌을 왜 받으셨는가,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을 보며 우리들도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면 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내 대신 진 것 아닙니까. 이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내 자질과 공로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것 앞에 말씀을 잘 붙들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며"입니다. 십자가를 지라고 할 때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하거나 할 수 없다고 하거나 모두 '자기 인정'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할 수 있는 것도 부인해야 하고 없는 것도 부인해야 합니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부인하고 가진 것 없는 것도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십자가를 진다면 자기 부인이 십자가에 더 얹혀서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미쁨은 신실함입니다. 변함 없는 가운데 전능함입니다. 아무리 변하지 않아도 능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사람은 아무리 변함이 없어도 능력이 없으면 신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니 신실하십니다. 변함 없으심과 전능하심이 신실하심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습니다. 변함이 없더라도 능력이 없으면 약속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실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부인하든 나를 부인하든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를 지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들이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와 어둠을 몰아내듯 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있어야 십자가를 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나를 부인하는 것이 능력이자 권능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자기애에 도취되어 있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십자가를 진다고 할 때 그 앞에는 반드시 여호와를 인정하는 아멘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먼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교만한 것을 버리고 자기 과시도 버립니다. 교만은 항상 거짓과 통합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교만은 반드시 거짓입니다. 마귀가 거짓과 교만의 영인 이유가 이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내가 뭔가 되는지 알고 행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하는 일이 전부 죄악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크리스천의 자존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내가 뭔가 있고 괜찮고 쓸 만한 사람이라고 여길 때 기독교인의 자존감이 없어집니다. 말석에 앉아야 상석에 청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지혜로운 것입니다. '죄인의 괴수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부인은 그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빛이 되신 예수님이 임하시고 그로 인해 죽음과 어둠이 물러나는 것입니다. 죄는 아무리 해도 안 됩니다. 예수로 나를 가득 채울 때만 죄가 지워집니다. 예수님 없이 이것을 하려고 하는 것이 마음의 병, 정신의 병입니다. 그리스도가 만유의 만유이시다는 고백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여호와를 인정하고 그것이 나의 복됨이 되는 것이며 나의 자존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함과 가치는 나를 부인할 때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부인하며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십자가를 집니다. 자기 부인이 복되고 즐겁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스스로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안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