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3). 야고보서가 말하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말씀은 반드시 언약의 말씀, 은혜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외형만 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동시에 우리의 무능을 깨닫게 하며, 결국 은혜를 구하게 만듭니다. 칼빈이 말한 대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몰아가며, 복음과 함께 나란히 달려갑니다. 율법과 복음은 대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하시는 길입니다.
둘째,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웁니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 23:4). 사람의 규례와 장로들의 유전은 결국 짐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은혜의 멍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사람은 대체로 자기 죄에는 관대하고, 남의 허물에는 엄격합니다. 그래서 정죄와 비난, 뒷말과 험담으로 다른 이의 삶을 무겁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는”(마 23:24) 외식을 꾸짖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남에게 관대해야 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남을 정죄하는 입술은 결국 내 영혼을 먼저 병들게 합니다.
셋째, 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다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마 23:5). 그래서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하였습니다. 말씀은 장식이 아니라, 여호와의 현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이스라엘 백성은 종종 표징 자체를 의지하여 실패했습니다. 블레셋과 전쟁할 때 법궤를 앞세워 승리하려 했으나 오히려 법궤를 빼앗겼던 사건이 그 예입니다(삼상 4:1–11). 법궤 자체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말씀은 장식이 아니라, 여호와의 현존입니다. 그러므로 외형에 매이지 말고, 말씀 앞에 잠잠히 서서 “아멘”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넷째, 그들은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높은 자리, 장터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마 23:6–7).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마 23:8–10).
주님은 인간을 과도하게 높이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 곧 샬롬의 시작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말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은혜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맺으시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이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핵심 원리입니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은 반드시 낮아지고, 스스로 낮아지는 자는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우리가 밤새 기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란 내가 높아지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낮추는 자리입니다. 예레미야처럼 “내가 종일 치욕거리가 되며 사람마다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8)라고 고백하며, 벌레 같은 나를 인정하고 낮추는 것입니다(시 22:6). 그럴 때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3). 야고보서가 말하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말씀은 반드시 언약의 말씀, 은혜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외형만 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동시에 우리의 무능을 깨닫게 하며, 결국 은혜를 구하게 만듭니다. 칼빈이 말한 대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몰아가며, 복음과 함께 나란히 달려갑니다. 율법과 복음은 대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하시는 길입니다.
둘째,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웁니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 23:4). 사람의 규례와 장로들의 유전은 결국 짐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은혜의 멍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사람은 대체로 자기 죄에는 관대하고, 남의 허물에는 엄격합니다. 그래서 정죄와 비난, 뒷말과 험담으로 다른 이의 삶을 무겁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는”(마 23:24) 외식을 꾸짖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남에게 관대해야 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남을 정죄하는 입술은 결국 내 영혼을 먼저 병들게 합니다.
셋째, 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다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마 23:5). 그래서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하였습니다. 말씀은 장식이 아니라, 여호와의 현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이스라엘 백성은 종종 표징 자체를 의지하여 실패했습니다. 블레셋과 전쟁할 때 법궤를 앞세워 승리하려 했으나 오히려 법궤를 빼앗겼던 사건이 그 예입니다(삼상 4:1–11). 법궤 자체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말씀은 장식이 아니라, 여호와의 현존입니다. 그러므로 외형에 매이지 말고, 말씀 앞에 잠잠히 서서 “아멘”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넷째, 그들은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높은 자리, 장터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마 23:6–7).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마 23:8–10).
주님은 인간을 과도하게 높이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 곧 샬롬의 시작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말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은혜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맺으시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이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핵심 원리입니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은 반드시 낮아지고, 스스로 낮아지는 자는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우리가 밤새 기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란 내가 높아지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낮추는 자리입니다. 예레미야처럼 “내가 종일 치욕거리가 되며 사람마다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8)라고 고백하며, 벌레 같은 나를 인정하고 낮추는 것입니다(시 22:6). 그럴 때 하나님이 높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