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30. 목요일 묵상 | 4. 어린아이와 같이 말씀을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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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성도의 삶을 살 때 오늘 말씀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저야 만나는 사람들이 학생이나 목사님들입니다. 목사님 동료들을 보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쨌든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목회를 잘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울면 같이 울어 주고 관심가져 주고 좋은 일 있으면 재잘거리며 기뻐합니다. 어른이 되면 무감각해집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밤에 춥습니다. 외양간도 춥습니다. 소도 춥습니다. 그러면 새벽에 의로운 해가 떠오를 때 송아지가 좋아서 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의로운 해처럼 신약시대에 떠오르실 때 그 치료하는 광선으로 송아지 같이 우리가 기뻐 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응입니다. 해가 뜨고 나면 블라인드를 올립니다. 송아지같이 영적인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 힘들다고 모르는 게 좋다고 하지 맙시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3-25).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꿀송이입니다. 그 말씀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우리 성도의 삶이 기름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저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내가 자유롭습니다. 말씀이 나를 옭아매는 것이 아닙니다. 청소할 때 순간 먼지가 이는 것처럼, 암세포를 도려낼 때 아픈 것처럼 그런 순간이 있으나 우리가 곧 자유롭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반응하자, 시늉이라도 하자, 흉내라도 내자고 한 번 써 보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할지 몰라도 이것이 ‘중심이 합하다’는 말과 통하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안 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일 초라도 기도하면 그것이 중심입니다.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배우는 것입니다. 대통령 놀이 하는 아이는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비스마르크나 링컨의 말처럼 어릴 때 무슨 놀이를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좌우됩니다. 의로운 광선이 떠오르자 뛰어 노는 외양간의 송아지처럼 우리도 반응해야 합니다. 꽃도 반응하는데 우리도 반응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자기 울타리를 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포도주도 떡도 하지 않으니 귀신들렸다고 합니다. 귀신들렸다는 말은 마술사라는 말이고 그것은 곧 쳐 죽여야 하는 대상입니다. 세례 요한이 안 먹고 안 마시니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더불어 먹고 마시니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에 취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왜곡되게, 거짓되게 반응한 것입니다. 중심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자기 뜻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가 오신 것은 먹고 마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공생에 전에는 금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불어 마시고 먹으면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금식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것인데 이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는 이사야서 말씀은 아멘 하면서 왜 예수님이 오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말씀을 전하면 아니라고 합니까.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사람들의 말이 아닌 열매로 결론이 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지혜는 모든 자녀로 의롭다 함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매입니다. 내가 의로움의 증인입니다. 세상이 나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니 말입니다. 성경을 놓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서 감사하고 감사하면서 기도합니다. 더 연약하니 하나님이 성경을 붙들지 않고는 살 수 없게 하시는 것이 주의 종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지혜는 우리가 행한 일, 곧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순종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약에 흑암의 납달리요 스불론으로 일컬어진 지역에서 예수님이 권능과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그런데 “화 있을진저”라고 한 것은 그 고장이 무반응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불 심판에 두로와 시돈이 그들보다 나을 것이라고 합니다. 두로와 시돈은 바알과 앗세라 이세벨의 동네입니다. 우상으로 가득하고 음란한 그곳이 더 나으리라고 한 것이 그 말입니다. 또한 가버나움이 교만하여 하늘에 오르려 하나 음부와 같이 낮아지리라 하셨습니다. 세속주의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