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9. 수요일 묵상 | 3. 복음에 대한 거부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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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서 피리를 불어도 반응이 없다는 것에서 피리를 부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쁜 일을 의미합니다. 기쁜 일에도 즐거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기쁜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의 것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진정한 기쁨,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이 아닌 자기 말만 하고 자기 기쁜 것만 보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경쟁하고 이러다 보니 반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예 모르면 괜찮은데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만 뭘 할줄 알면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을 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화답하지 않는 것은 맹목적인 자기애 때문입니다. 이 말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많이 나옵니다. 맹목적인 자기애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은 전염병과 같다고 했습니다. 나를 부인하고 참고 용납하는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끝없이 내가 튀어나오면 뭘 하나 떨어져도 용납을 못합니다. 슬픈 일보다 기쁜 일을 더 용납하지 못하고 즐거운 일에도 불안한 것입니다. 같이 누리면 되는데 말입니다.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박수쳐주면 되는데 말입니다. 세례 요한을, 예수님을 핍박한 자들이 이런 마음입니다. 참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듣고도 말입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듣지 않으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고 배척합니다. 다음으로 슬피 울어도 울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슬피 운다는 것은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그건 네 말이고 스스로에게 듣기 좋은 말만 듣는 것입니다. 이러면 분파가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 쓴소리를 들으려고 하면 회개가 생기지 파가 나뉘지 않습니다. 그러나 듣기 싫어하면 파가 생깁니다. 이것을 가만히 보면 듣기 싫은 말 안들으려고 하면 내가 옳다고 해야 되고 내가 옳다고 하려면 파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을 듣다 보면 마음이 쓰리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설교하는 자의 소리가 피리일 수도, 곡하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말입니다. 그런데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병자이고 주님은 의원입니다. 먼저 병이 나으려면 순간 나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병원에서 기다려 보면 기분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일 없다고 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병이 있다고 하면 기분이 언짢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는 것은 병을 발견하려 가는 것입니다. 순간 기분이 언짢은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상 치료를 위해서는 병의 소식을 듣고 붙들고 의원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사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의 영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죄를 위하여 오시는 분이 어디있습니까. 주님 외에요. 우리는 의와 선을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의로우신 분이니 더이상 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자를 위하여 대신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