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8.7. 금요일 묵상 | 5. “나는 있다”라고 증언하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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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에서 대제사장이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묻자 주님께서는 “내가 그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 곧 “나는 있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경우에 잠잠하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잠잠하셨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신지를 묻는 질문에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극악한 죄인 가야바의 입을 통해 계속 진리를 말하게 하셨습니다. 앞에서는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백성을 살리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하게 하셔서 대속의 원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이제는 “네가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묻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말씀과 초대교회의 찬송을 알고 있던 대제사장이 정작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식 자체가 참된 지식이 아님을 봅니다. 하나님께로 나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셨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보혜사 성령을 받은 우리의 복이 그만큼 큽니다.
누가복음에서 사람들이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자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에도 “에고 에이미”, 곧 “나는 있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지난주에 주님께서 잡히실 때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계시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은 메시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메시아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이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난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에고 에이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께서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장 급박한 순간, 곧 붙잡히시고 재판받으시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여러 말을 붙여 고백하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주님은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한 대제사장이십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은 주님께서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신약 시대에는 다른 제사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곧 큰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으로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것도 그들의 입을 통하여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인성에 따라서는 보좌 우편에 계시고, 신성에 따라서는 지금 이곳을 비롯한 모든 곳에 계십니다. 때가 되면 다시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재판의 자리에서 이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무릎을 꿇어 “아멘, 주 예수여”라고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야바와 그 무리는 오히려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이는 극한 부인과 저주의 표시였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외쳤으며,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사탄이 주는 광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온갖 수욕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 22:6-8). 또한 주님께서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시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시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셔도 얼굴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보다 더 복된 신약 시대의 자리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고백해야 합니다. 나보다 뒤에 오신 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주님께서 영원하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막연히 세상 죄만 지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모든 것이 나 때문이며, 나를 위하여, 나 대신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내가 그분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분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신약 시대에 진리의 영을 받아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애매한 고난을 당하며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전혀 없으신 주님께서 그 악한 자들 앞에 서서 우리 대신 징계받으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샬롬과 에이레네, 곧 화평을 누립니다. 성령 안에서 하늘을 보고 꽃을 바라보면서도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징계당하셨기에 내가 이 질서와 아름다움을 누리는구나”라고 고백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