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는 가족 사이에서도 무서운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결국 죽이려 했습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자 사울은 다윗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잘되는 것이 자기의 자리를 빼앗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시기는 상대방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남을 계속 바라보다가 자기 자신을 놓치게 합니다. 자기의 거울은 보지 않고 남의 모습만 바라보게 합니다. 끝내 자기 영혼과 자기 삶을 갉아먹습니다.
우리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촌이 잘되면 같이 기뻐하고 도와주어야 할 텐데, 나보다 더 가진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기입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시기는 영적인 시기입니다. 내가 더 잘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남의 마음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신 믿음을 감사히 누리기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려 합니다.
로마서 14장 22절은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감사히 누리라는 것입니다.
시기가 있으면 그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이 받은 것만 보게 됩니다. 그러면 내게 주신 은혜가 작아 보입니다.
교회 안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발의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손의 은사가 있습니다. 발이 가주어야 손도 일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찾으려면 눈도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눈이 발을 업신여길 수 없고, 서로 없어도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필요한 자리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시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것을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만들어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씨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씨는 이미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심을 수는 있지만 나무의 생명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물을 줄 수는 있지만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심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내가 물을 주었다고 더 큰일을 했다고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이것이 참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공로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내 능력으로 생명을 만들지 못했고, 내 힘으로 자라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맡은 일을 감당한 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상을 주십니다.
밥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쌀을 씻고 밥을 하고 상을 차리는 수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것은 결국 쌀 자체입니다. 사람이 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수고를 받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했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오히려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주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렇게 말할 때 겸손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내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겸손하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담대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내가 크고 네가 작다고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시기와 질투가 사라집니다. 서로의 공로를 비교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감사히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기를 가지면 누릴 수 없습니다. 시기를 가지면 겸손도 없어집니다. 시기를 가지면 담대함도 없어집니다. 시기를 가지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기를 버려야 합니다. 시기는 그릇된 판단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자기 자리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것을 낮추시고 낮은 것을 높이시며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은혜로 받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는 말씀처럼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 때 서로 판단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며,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잠언 17장 15절은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잠 17:15)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을 그릇되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의인이신 예수님을 악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시며 선지자이시며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이 참된 왕으로 오시니 왕과 통치자들이 시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선지자로 오시니 율법사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시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대제사장으로 오시니 대제사장들이 시기했습니다.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리에 진정한 왕, 진정한 선지자, 진정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오시자 그분을 영접하지 않고 시기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모습이 참 귀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주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려고 예수님을 시기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요나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단은 왕자였고 지혜롭고 용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20장 13절에서 그는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자기 아버지와 함께하신 것처럼 다윗과 함께하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본인이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했습니다. 자기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주었습니다. 왕자의 것을 다윗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시기를 넘어선 사랑입니다.
그래서 시기의 반대말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영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시기하지 않는다고 뒤처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야고보서 4장 5절은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5)라고 말씀합니다. 육체적으로 시기하면서 내 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우리보다 더 정확하게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야고보서 4장 2절도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약 4:2)라고 말씀합니다.
시기한다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기는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기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히 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내게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자유이며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시기는 가족 사이에서도 무서운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결국 죽이려 했습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자 사울은 다윗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잘되는 것이 자기의 자리를 빼앗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시기는 상대방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남을 계속 바라보다가 자기 자신을 놓치게 합니다. 자기의 거울은 보지 않고 남의 모습만 바라보게 합니다. 끝내 자기 영혼과 자기 삶을 갉아먹습니다.
우리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촌이 잘되면 같이 기뻐하고 도와주어야 할 텐데, 나보다 더 가진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기입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시기는 영적인 시기입니다. 내가 더 잘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남의 마음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신 믿음을 감사히 누리기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려 합니다.
로마서 14장 22절은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감사히 누리라는 것입니다.
시기가 있으면 그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이 받은 것만 보게 됩니다. 그러면 내게 주신 은혜가 작아 보입니다.
교회 안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발의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손의 은사가 있습니다. 발이 가주어야 손도 일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찾으려면 눈도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눈이 발을 업신여길 수 없고, 서로 없어도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필요한 자리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시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것을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만들어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씨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씨는 이미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심을 수는 있지만 나무의 생명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물을 줄 수는 있지만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심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내가 물을 주었다고 더 큰일을 했다고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이것이 참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공로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내 능력으로 생명을 만들지 못했고, 내 힘으로 자라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맡은 일을 감당한 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상을 주십니다.
밥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쌀을 씻고 밥을 하고 상을 차리는 수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것은 결국 쌀 자체입니다. 사람이 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수고를 받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했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오히려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주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렇게 말할 때 겸손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내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겸손하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담대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내가 크고 네가 작다고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시기와 질투가 사라집니다. 서로의 공로를 비교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감사히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기를 가지면 누릴 수 없습니다. 시기를 가지면 겸손도 없어집니다. 시기를 가지면 담대함도 없어집니다. 시기를 가지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기를 버려야 합니다. 시기는 그릇된 판단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자기 자리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것을 낮추시고 낮은 것을 높이시며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은혜로 받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는 말씀처럼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 때 서로 판단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며,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잠언 17장 15절은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잠 17:15)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을 그릇되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의인이신 예수님을 악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시며 선지자이시며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이 참된 왕으로 오시니 왕과 통치자들이 시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선지자로 오시니 율법사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시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대제사장으로 오시니 대제사장들이 시기했습니다.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리에 진정한 왕, 진정한 선지자, 진정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오시자 그분을 영접하지 않고 시기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모습이 참 귀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주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려고 예수님을 시기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요나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단은 왕자였고 지혜롭고 용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20장 13절에서 그는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자기 아버지와 함께하신 것처럼 다윗과 함께하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본인이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했습니다. 자기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주었습니다. 왕자의 것을 다윗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시기를 넘어선 사랑입니다.
그래서 시기의 반대말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영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시기하지 않는다고 뒤처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야고보서 4장 5절은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5)라고 말씀합니다. 육체적으로 시기하면서 내 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우리보다 더 정확하게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야고보서 4장 2절도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약 4:2)라고 말씀합니다.
시기한다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기는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기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히 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내게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자유이며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