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8.31. 월요일 묵상 | 1. 우리를 대표하신 분이 아니라 대신하신 주님

조회수 46
주님은 우리를 대표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시는 분입니다. 어디에나 대표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대신할 사람은 찾기 어렵습니다. 대표는 함께 누리는 자리일 수 있지만, 대신한다는 것은 자기 것을 내어놓고 희생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대표하여 죄인의 한 사람으로 서신 분이 아니라, 죄 없는 분으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서신 분입니다.
디도서 2장 14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주님께는 죄행도 없고, 죄성도 없고, 죄의 성향도 없습니다. 실제로 죄를 지으신 적도 없으시고, 죄를 짓고자 마음을 품으신 적도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지만 우리와 달리 죄가 없으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주님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죄를 모르신다는 것은 죄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의 본성이 죄를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에 반응하고, 죄의 유혹을 느끼고, 죄에 대한 충동을 느끼며 불법을 행합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죄의 유혹에 끌리는 마음도 없고, 죄의 달콤함을 바라는 마음도 없으며, 죄 때문에 일어나는 내적인 갈등도 없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죄인의 자리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 자신이 죄인이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하여 그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죄인의 대표가 아니라 죄인을 대신하시는 분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9절은 그리스도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
이렇게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존경받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백성을 다스렸고,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암송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며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했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죄를 씌웠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로마의 권력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일 수 없으니 새로운 죄목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님이 반란을 일으켰고, 가이사에게 세금 내는 것을 금했으며,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대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선동했다고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을 백성을 미혹하고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들의 고발을 듣고도 예수님에게서 그 죄에 해당하는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빌라도가 반복하여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그냥 풀어주기가 어려우니 가볍게 매를 때려 놓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매질은 뒤에 예수님이 당하신 잔혹한 채찍질과는 다릅니다. 죄는 없지만 백성들이 이렇게 소란을 일으키니 어느 정도 징계하고 풀어주겠다는 뜻입니다.
헤롯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롯에게 보내졌지만 헤롯 역시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관여한 사람들이 오히려 계속해서 예수님의 무죄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여기에 빌라도의 아내까지 등장합니다.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말했습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마 27:19)
여기에서 ‘옳은 사람’은 의인이라는 뜻입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과 상관하지 말고 이 재판에서 손을 떼라고 남편에게 말합니다. 그 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게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도, 헤롯도, 빌라도의 아내도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증언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이 죄가 없으심을 계속 보여줍니다. 비진리가 진리를 이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덮어 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눌리고,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은 편안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 편에 서고 빛 가운데 거할 때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죄 가운데로 들어가면 사람은 자꾸 어두운 곳으로 향합니다. 먼지가 많은 곳, 동굴처럼 막힌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죄에서 떠나면 창문을 열고 더 밝은 곳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빌라도가 지금 어둠이 역사하는 가운데 들어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를 통하여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라고 경고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불의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죄인의 자리에서 신문을 받으셨고, 죄인으로 판결받으셨으며, 죄인이 받을 죽음과 저주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것도 당시 로마의 가장 극악한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으신 주님 자신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21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죄인의 마음에서 죄를 경험하여 죄를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인은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면서도 자기 안에 비슷한 욕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죄를 비난하면서도 그가 죄를 통하여 얻은 것을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판단에는 이런 문제가 섞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아무 관계가 없으시면서 죄를 판단하십니다. 예수님 역시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 가까워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많이 경험해야 죄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다면 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죄의 소욕으로부터 멀어지고, 죄를 접하는 것으로부터도 멀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이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아지셨습니다.
대표는 많습니다. 그러나 나를 대신해 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떤 소유를 조금 대신 내어줄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명을 대신할 사람, 내 존재를 대신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주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죄성도 없고 죄의 성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자리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자리에 서셨고,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가룟 유다조차 예수님을 팔고 난 뒤 예수님의 피를 무죄한 피라고 인정했습니다. 베드로도 우리가 대속함을 받은 것이 은이나 금 같은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죄가 없는 예수님을 사람들은 왜 그토록 죽이려 했습니까?
가야바는 정치적인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백성이 사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두면 로마가 와서 자신들의 자리와 민족을 빼앗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치적인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더욱 근본적인 이유를 한 단어로 보여줍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마 27:18)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넘겨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기는 단순히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금 불편한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시기는 상대방을 끌어내리고 없애서 자기를 높이려는 시기입니다. 오늘 백성들이 결국 “예수를 없이 하소서”라고 외치는 데까지 갑니다. 상대가 없어져야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기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그릇되게 상대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시기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상대를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상대는 실제보다 낮추고 자기는 실제보다 높여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기는 남을 해치는 것만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시기에 빠진 사람은 남을 바라보다가 자기 자신을 놓칩니다.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시기는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진리에 거해야 합니다. 진리에 거하면 하늘도 더 맑아 보이고 공기도 더 상쾌하게 느껴집니다. 진리는 사람을 밝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거짓과 시기는 사람을 계속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갑니다.
시기는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상대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없애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반대말을 미움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시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귀하게 여기지만 시기는 상대를 업신여기고 배척하며 끝내 없애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시기가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일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더 잘 믿는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의 믿음과 마음을 판단하고,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주신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영적인 시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믿음과 은혜를 감사하게 누려야 합니다. 로마서 14장 22절의 말씀처럼 내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시기가 있으면 하나님이 이미 내게 주신 것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리와 은사를 감사히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손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발의 역할을 합니다. 손이 어떤 일을 하려면 발이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무언가를 찾으려면 눈도 필요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비교하고 시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누릴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의 것을 시기하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감사함으로 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