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8. 목요일 묵상 | 4. 예수님의 비유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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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유는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안 보이고 안 들립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익숙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부류, 길 가에 씨를 뿌렸는데, 새가 와서 먹어 씨가 없어집니다. 둘째 부류, 씨가 돌밭 또는 바위에 떨어졌는데, 흙이 얕습니다. 싹이 나는데, 해가 돋은 후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립니다. 즉 뿌리는 못 내리고 싹만 난 것입니다. 그래서 씨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에 방불합니다. 셋째 부류, 씨가 가시떨기에 떨어집니다. 가시떨기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습니다. 기운을 막는다는 것은 질식한다는 의미입니다. 큰 나무 밑에 작은 나무는 잘 못 자랍니다. 햇빛과 양분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잎사귀만 무성하고 결실하지 못합니다. 넷째 부류, 좋은 땅에 씨가 뿌려져서, 뿌리가 내리고 양분을 받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을 주님이 말씀하시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그 의미가 뭐라고 묻었고, 주님이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고 누가복음에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씨’는 ‘후손’이라는 단어와 동의어입니다.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은 여자의 씨라는 말과 같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삭의 씨는 이삭의 후손입니다. ‘씨’는 그리스도의 씨를 가리킵니다. 씨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9을 보면 “하나님의 씨”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씨가 우리에게 떨어지면 발아하고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말씀이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궁극적으로 씨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여럿을 가리켜 씨라고 하지 않고 하나를 가리켜 씨라고 했다고 말씀하는데, 그 씨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씨가 있어야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씨는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씨입니다. 결국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리스도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씨는 수확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구원을 얻고 은혜를 누리고 부요함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첫째 부류는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악한 자, 사탄, 마귀, 즉 대적자가 가 말씀을 빼앗아 간다고 합니다. 타락한 인류는 이 부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씨앗이 떨어져도 착상이 되지 않으니 생명의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둘째 부류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잠시 견디다가 뿌리가 없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말라 죽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과 박해가 왔는데, 곧 넘어지는 자입니다. 바위, 돌밭 위, 즉 흙이 얇은 데 떨어졌는데 뿌리가 없어서 해가 뜨니, 즉 환난과 박해가 오니 곧 넘어가는 것입니다. 뿌리가 있으면 요동치 않을 텐데 말입니다. 이는 살아 있다고 하나 실상 죽은 것입니다. 말씀이 자기 안에 부대낄 때 견디지 못하는 자입니다. 
     셋째 부류는 둘째와 비교가 되는데요,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는데,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질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외부의 박해라면, 셋째는 섞여 버리는 것입니다. 즉 둘 다 같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가시와 씨가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과 같이 누리려 하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 같은 것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나도 살고 재물도 섬기는 것입니다. 모자이크식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 하셨는데, 다른 신들도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면, 말씀이 막혀서 결실하지 못합니다. 가을이 되어 보면 셋째 부류를 알게 됩니다. 즉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쭉정이입니다. 표는 안 나고 잘 자란 잎사귀는 있으나 결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섞이는 신앙, 혼합 신앙, 다원주의 신앙입니다. 즐거운 생활, 즐거운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고난 받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넷째 부류는 열매 맺는 신앙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이고(마태복음), 말씀을 듣고 받는 자이며(마가복음),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며 인내로 결실하는 자(누가복음)입니다. 말세에 인내로 영혼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듣고 지키고 인내로 결신하는 것이 넷째 부류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고 지키고 행하여 복된 것을 구약으로 보면, ‘쉐마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에 대하여 야고보서 1:21을 보면,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을 때 온유해야 합니다. 우리는 짜고 매운 것보다 심심한 것 먹듯이, 심심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신학책도 심심한 책이 정통적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