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연못은 그런데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든 낫게 된다고 성경이 괄호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받습니다. 천사들이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비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해 물을 움직이고 병자를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천사들의 머리가 예수님이십니다. 그 천사들을 주관하는 분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언제 물이 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굳이 생각을 해 본다면 엘리야 때 주님의 말씀처럼 많은 병자가 있었으나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냄을 받았고 엘리야 때 많은 병자가 있었으나 아람 장군 나아만이 병 나음을 받습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베데스다와 가장 가까운 사건이 나아만 장군이 요단 강에 들어가 나은 것입니다.
물에 권능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물은 기껏해야 먼지를 닦아내는 일을 합니다. 그 자체에 권능이 있지 않습니다. 이단들은 물을 신성화하여 팔기도 합니다. 그러나 물에는 권능이 없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도구로 기록됩니다. 노아의 홍수, 요나의 풍랑 등에서 보이듯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물이 있으면 생수가 됩니다. 예수님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도 누구든 나에게 오라, 와서 먹으라고 말씀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사실 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왔을 때 생수가 됩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예수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물은 권능을 드러내는 표이지 그 자체가 권능이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하나님이 베데스다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교훈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베데스다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베데스다의 물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빠르지 않으면 밥 먹기도 힘듭니다. 항상 빠른 사람이 가져갑니다. 병자는 가져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과연 이 38년 된 병자가, 혈기 마른 자가 베데스다 연못물이 동할 때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또 맹인도 나옵니다. 맹인이 그 꽤 깊은 곳으로 내려갈 수 없습니다. 베데스다는 아직 공로의 자리입니다. 은혜의 자리가 아닙니다. 내가 움직일 힘이 있어야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왜 병자들이 누워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들어갈 수도, 그래서 낫게 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안식일에 말입니다. 안식일에 죽어가는 사람을 고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옮기지는 못합니다. 안식일에는 무화과 열매 하나 정도의 무게만 옮길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자세히 보면 베데스다 못의 물이 동해도 사실상 병자들이 들어갈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을 옮겨 주는 것은 베데스다를 거기에 두신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엊그제 양재천에서 키가 큰 부부가 지나가는데 여자분이 “와 풀을 던지노?”라고 사투리로 말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자주 지나가는 곳에 오리들이 자는데 ‘왜 풀을 던져서 깨우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오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저는 지나갈 때 오리를 보면서 자나 안 자나 물어 보곤 했는데 그게 오리를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데스다 병자들도 그들을 위해 거기에 놓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베데스다의 연못 조차도 그 물을 의지하기 위함이 아닌, 우리 중심을 아시고 필요를 아시는 갈하지 않는 생수인 주님을 보이기 위해 놓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그런데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든 낫게 된다고 성경이 괄호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받습니다. 천사들이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비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해 물을 움직이고 병자를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천사들의 머리가 예수님이십니다. 그 천사들을 주관하는 분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언제 물이 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굳이 생각을 해 본다면 엘리야 때 주님의 말씀처럼 많은 병자가 있었으나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냄을 받았고 엘리야 때 많은 병자가 있었으나 아람 장군 나아만이 병 나음을 받습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베데스다와 가장 가까운 사건이 나아만 장군이 요단 강에 들어가 나은 것입니다.
물에 권능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물은 기껏해야 먼지를 닦아내는 일을 합니다. 그 자체에 권능이 있지 않습니다. 이단들은 물을 신성화하여 팔기도 합니다. 그러나 물에는 권능이 없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도구로 기록됩니다. 노아의 홍수, 요나의 풍랑 등에서 보이듯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물이 있으면 생수가 됩니다. 예수님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도 누구든 나에게 오라, 와서 먹으라고 말씀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사실 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왔을 때 생수가 됩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예수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물은 권능을 드러내는 표이지 그 자체가 권능이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하나님이 베데스다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교훈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베데스다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베데스다의 물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빠르지 않으면 밥 먹기도 힘듭니다. 항상 빠른 사람이 가져갑니다. 병자는 가져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과연 이 38년 된 병자가, 혈기 마른 자가 베데스다 연못물이 동할 때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또 맹인도 나옵니다. 맹인이 그 꽤 깊은 곳으로 내려갈 수 없습니다. 베데스다는 아직 공로의 자리입니다. 은혜의 자리가 아닙니다. 내가 움직일 힘이 있어야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왜 병자들이 누워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들어갈 수도, 그래서 낫게 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안식일에 말입니다. 안식일에 죽어가는 사람을 고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옮기지는 못합니다. 안식일에는 무화과 열매 하나 정도의 무게만 옮길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자세히 보면 베데스다 못의 물이 동해도 사실상 병자들이 들어갈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을 옮겨 주는 것은 베데스다를 거기에 두신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엊그제 양재천에서 키가 큰 부부가 지나가는데 여자분이 “와 풀을 던지노?”라고 사투리로 말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자주 지나가는 곳에 오리들이 자는데 ‘왜 풀을 던져서 깨우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오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저는 지나갈 때 오리를 보면서 자나 안 자나 물어 보곤 했는데 그게 오리를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데스다 병자들도 그들을 위해 거기에 놓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베데스다의 연못 조차도 그 물을 의지하기 위함이 아닌, 우리 중심을 아시고 필요를 아시는 갈하지 않는 생수인 주님을 보이기 위해 놓인 것이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