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게 손을 뗀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능력이 나가신 줄 알고 옷자락에 손을 덴 줄 아십니다. 그럼에도 왜 이 질문을 할까요? 치유하는 능력이 있음과 그 치유하는 능력이 나갔음을 아시는 우리 주님이 그것을 만진 사람을 모를까요? 왜 그것은 찾을까요? 분명히 그녀가 불법행위를 한 거예요. 이거 찾으면 분명히 추방돼야 돼요. 격리돼야 돼요. 형벌을 당할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왜 찾으실까요?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막 5:33). 이것이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병이 낫기 전에는 간절함이 있어요. 병이 나았어요. 이제 즉시 멈췄어요. 12년 만에 피가 흐르지 않게 되었어요. 내가 피가 흐를 때는 수치를 무릅쓰고 낫고자 나아갔지만 이제 피가 멈췄는데 빨리 옛날을 없었는 것으로 하고 정상인으로 살면 될 거 아니에요. 돌아가서 정결례를 한다든지 그렇게 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녀가 다시 예수님께 나아갈 일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 주님은 고백시키는 거예요. 믿음의 고백을 시키는 거예요. 지금 주님은 관계를 형성하시는 거예요. 한마디로 중요한 것은 병이 나왔다는 것이 아니에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물론 보편적으로 '소자야', '딸아', '소녀야' 이렇게 부를 수 있어요. 그러나 "딸아"라고 부를 필요까지는 없거든요. '너는'이라고 해도 되거든요. 우리 주님이 '딸아'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환자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이제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딸아 내 믿음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우리 예수님이 가르쳐 주는 거예요. '네가 나은 것은 믿음으로 나은 것이다.' 이 열두 해 혈류병 환자가 '내가 믿음 있습니다' 하고 나온 게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우리는 믿음 있는지도 모르고 믿는 거예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믿음은 있는지도 모르고 구하는데 그게 믿음의 기도인 거예요.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주시고 믿음 있음을 알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믿음으로 사는 도를 말씀해 주신 거예요. '네가 나를 믿는도다. 잘하였도다. 나를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나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네가 살아난 것이 믿음으로 살아난 것이다. 네가 나를 믿었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다.' 믿음의 도를 알려준 거예요, 생명의 도를 알려준 거예요.
그리고 "너를 구원하였으니." 구원이라는 말이 계속 나온다고 했죠. 지금 구원이라는 말이 그렇죠. '바로 거라사의 더러운 영에게서 벗어나는 것도 구원이다. 또 물에 빠져가는 것도 구원이다. 그리고 지난주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병이 나은 것, 살아난 것도 구원이다.' 이 구원이란 말이 단지 영적인 구원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이라고 했죠. 영육 간의 구원이라고 했죠. 우리 영혼의 구원도 이루시고 우리 육체도 낫게 해주십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물에서 건졌다는 모세, 호세야 이게 다 구원의 개념이거든요. 건져서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건져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주고 이웃 사랑하는 법을 주고 홍해를 건넌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리고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되시고, 내가 떡이요 내가 음료요 내게 오는 자는 갈하지 않고 주리지 않는다고 하십니다(요 6:35). 그게 믿음이잖아요. 예수께 나아가는 것,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갈 수 없을 때라도 나아간다는 것이 바로 믿음이거든요. 여러분,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시대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만해요. 우리가 교만해요. 다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게 미국이고 지금 그게 우리 한국이고 그게 러시아고 보면 전부 다 교만해요. 전부 다 교만해요. 우리가 간절함을 가져야 돼요. 하나님 앞에 간절함을 가져야 됩니다.
"평안이 가라." 평안이 가라고 했어요. 이 평안은 뭐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안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근원이 되지 못합니다. 기뻐하심을 입어야 됩니다. 그때 우리에게 샬롬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평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의 시대 때 만나, 메추라기를 매일 거두고 날마다 일용할 여호와께 감사하면서 또 거두고 먹고 그 다음날 또 거두고 하듯이, '평안이 가라'라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고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히 가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게 손을 뗀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능력이 나가신 줄 알고 옷자락에 손을 덴 줄 아십니다. 그럼에도 왜 이 질문을 할까요? 치유하는 능력이 있음과 그 치유하는 능력이 나갔음을 아시는 우리 주님이 그것을 만진 사람을 모를까요? 왜 그것은 찾을까요? 분명히 그녀가 불법행위를 한 거예요. 이거 찾으면 분명히 추방돼야 돼요. 격리돼야 돼요. 형벌을 당할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왜 찾으실까요?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막 5:33). 이것이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병이 낫기 전에는 간절함이 있어요. 병이 나았어요. 이제 즉시 멈췄어요. 12년 만에 피가 흐르지 않게 되었어요. 내가 피가 흐를 때는 수치를 무릅쓰고 낫고자 나아갔지만 이제 피가 멈췄는데 빨리 옛날을 없었는 것으로 하고 정상인으로 살면 될 거 아니에요. 돌아가서 정결례를 한다든지 그렇게 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녀가 다시 예수님께 나아갈 일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 주님은 고백시키는 거예요. 믿음의 고백을 시키는 거예요. 지금 주님은 관계를 형성하시는 거예요. 한마디로 중요한 것은 병이 나왔다는 것이 아니에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물론 보편적으로 '소자야', '딸아', '소녀야' 이렇게 부를 수 있어요. 그러나 "딸아"라고 부를 필요까지는 없거든요. '너는'이라고 해도 되거든요. 우리 주님이 '딸아'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환자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이제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딸아 내 믿음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우리 예수님이 가르쳐 주는 거예요. '네가 나은 것은 믿음으로 나은 것이다.' 이 열두 해 혈류병 환자가 '내가 믿음 있습니다' 하고 나온 게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우리는 믿음 있는지도 모르고 믿는 거예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믿음은 있는지도 모르고 구하는데 그게 믿음의 기도인 거예요.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주시고 믿음 있음을 알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믿음으로 사는 도를 말씀해 주신 거예요. '네가 나를 믿는도다. 잘하였도다. 나를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나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네가 살아난 것이 믿음으로 살아난 것이다. 네가 나를 믿었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다.' 믿음의 도를 알려준 거예요, 생명의 도를 알려준 거예요.
그리고 "너를 구원하였으니." 구원이라는 말이 계속 나온다고 했죠. 지금 구원이라는 말이 그렇죠. '바로 거라사의 더러운 영에게서 벗어나는 것도 구원이다. 또 물에 빠져가는 것도 구원이다. 그리고 지난주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병이 나은 것, 살아난 것도 구원이다.' 이 구원이란 말이 단지 영적인 구원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이라고 했죠. 영육 간의 구원이라고 했죠. 우리 영혼의 구원도 이루시고 우리 육체도 낫게 해주십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물에서 건졌다는 모세, 호세야 이게 다 구원의 개념이거든요. 건져서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건져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주고 이웃 사랑하는 법을 주고 홍해를 건넌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리고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되시고, 내가 떡이요 내가 음료요 내게 오는 자는 갈하지 않고 주리지 않는다고 하십니다(요 6:35). 그게 믿음이잖아요. 예수께 나아가는 것,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갈 수 없을 때라도 나아간다는 것이 바로 믿음이거든요. 여러분,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시대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만해요. 우리가 교만해요. 다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게 미국이고 지금 그게 우리 한국이고 그게 러시아고 보면 전부 다 교만해요. 전부 다 교만해요. 우리가 간절함을 가져야 돼요. 하나님 앞에 간절함을 가져야 됩니다.
"평안이 가라." 평안이 가라고 했어요. 이 평안은 뭐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안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근원이 되지 못합니다. 기뻐하심을 입어야 됩니다. 그때 우리에게 샬롬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평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의 시대 때 만나, 메추라기를 매일 거두고 날마다 일용할 여호와께 감사하면서 또 거두고 먹고 그 다음날 또 거두고 하듯이, '평안이 가라'라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고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히 가라'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