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절을 보면,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의는 올바름입니다. 하나님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산들과 같다는 것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도 되고, 그것이 요지부동하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산은 신령한 것을 가리킵니다. 성잔이 산에 있지 않습니까. 시편 121:1-2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산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안 계신 곳이 없는데, 왜 자꾸 산을 말합니까? 이는 하나님이 높낮이를 정하시고, 하나님이 평평하게도 하시고, 하나님이 불변하는 집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야 합니다. 주의 의는 성전에서,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께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 의가 우리를 올바르게 합니다. 내가 스스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절대 의로우십니다. 예레미야 23:5-6을 보면,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운 가지이십니다.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판단도 하고 판단도 받습니다. 주의 심판이 큰 바다 같다는 것은 그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이요, 세상이 요동치는 것 같아도 조금 바닷속을 몇 미터 들어가면 잠잠합니다. 아모스 5:24을 보면,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판단을 많이 받습니다. 잘한다, 못한다는 판단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이 변함없이 요동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흘러들어가고 흘러나오는 바다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옳다하고, 또는 다른 이의 판단에 너무 나를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큰 일을 못합니다. 사람의 판단은 많은 경우 그릇된 판단이 대세를 이룹니다. 사람에 치이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성정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뒤에서 수군수군하는 것은 자기 영혼을 해치는 것입니다. 심판자의 자리에 서지 말고 심판당하는 자리에 서면 예수님 생각하며 기뻐하면 좋겠습니다. 누굴 판단하기보다 돌을 맞는 게 낫습니다. 그러나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창조주와 구원주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5-6절의 결론이 7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시편 136:1-26을 보면, 매 절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말합니다. 구약백성에게 인자하심은 신약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베푸심은 인자한 베푸심입니다. 우리에게 구원해 주시는 인자가 있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인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물을 가꾸시는 것을 보면, 넘치도록 가꾸십니다. 인자는 오래 참고 우리의 자리에서 체휼하여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자리까지 내려와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혼동되거든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체휼하셔서, 내 고통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헤아리십니다. 나는 너무 치여서 고통조차도 못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음하십니다. 하나님이 우십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나도 내 고통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너무 고통이 심하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십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공의 가운데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은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병아리가 모이를 얻어 먹으려면 어미를 분별해야 합니다. 호세아 6:6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어두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의 소망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4:6을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 6:3을 보면,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인자를 베푸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나그네나 외인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은 말씀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 읽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애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헤세드를 누리기 위해서,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애, 자비를 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실하게 행하십니다. 아는 것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 앎과 사랑이 따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은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7절에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 날게 하시고 신령한 것을 먹게 하십니다. 로마서 6:15로 생각해 보면, 은혜 아래 사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의는 올바름입니다. 하나님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산들과 같다는 것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도 되고, 그것이 요지부동하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산은 신령한 것을 가리킵니다. 성잔이 산에 있지 않습니까. 시편 121:1-2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산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안 계신 곳이 없는데, 왜 자꾸 산을 말합니까? 이는 하나님이 높낮이를 정하시고, 하나님이 평평하게도 하시고, 하나님이 불변하는 집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야 합니다. 주의 의는 성전에서,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께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 의가 우리를 올바르게 합니다. 내가 스스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절대 의로우십니다. 예레미야 23:5-6을 보면,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운 가지이십니다.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판단도 하고 판단도 받습니다. 주의 심판이 큰 바다 같다는 것은 그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이요, 세상이 요동치는 것 같아도 조금 바닷속을 몇 미터 들어가면 잠잠합니다. 아모스 5:24을 보면,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판단을 많이 받습니다. 잘한다, 못한다는 판단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이 변함없이 요동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흘러들어가고 흘러나오는 바다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옳다하고, 또는 다른 이의 판단에 너무 나를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큰 일을 못합니다. 사람의 판단은 많은 경우 그릇된 판단이 대세를 이룹니다. 사람에 치이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성정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뒤에서 수군수군하는 것은 자기 영혼을 해치는 것입니다. 심판자의 자리에 서지 말고 심판당하는 자리에 서면 예수님 생각하며 기뻐하면 좋겠습니다. 누굴 판단하기보다 돌을 맞는 게 낫습니다. 그러나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창조주와 구원주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5-6절의 결론이 7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시편 136:1-26을 보면, 매 절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말합니다. 구약백성에게 인자하심은 신약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베푸심은 인자한 베푸심입니다. 우리에게 구원해 주시는 인자가 있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인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물을 가꾸시는 것을 보면, 넘치도록 가꾸십니다. 인자는 오래 참고 우리의 자리에서 체휼하여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자리까지 내려와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혼동되거든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체휼하셔서, 내 고통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헤아리십니다. 나는 너무 치여서 고통조차도 못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음하십니다. 하나님이 우십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나도 내 고통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너무 고통이 심하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십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공의 가운데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은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병아리가 모이를 얻어 먹으려면 어미를 분별해야 합니다. 호세아 6:6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어두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의 소망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4:6을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 6:3을 보면,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인자를 베푸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나그네나 외인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은 말씀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 읽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애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헤세드를 누리기 위해서,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애, 자비를 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실하게 행하십니다. 아는 것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 앎과 사랑이 따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은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7절에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 날게 하시고 신령한 것을 먹게 하십니다. 로마서 6:15로 생각해 보면, 은혜 아래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