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인을 통한 회개와 통곡으로 베드로를 돌이키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아들이시지만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고, 눈물과 통곡과 간구로 소원을 올려 드리셨습니다(히 5:7–8). 그러므로 우리를 통곡하게 하시는 것도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은 아주 작고 미미해 보이는 것들을 사용하여 베드로를 돌이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여종과 모닥불과 닭이 등장합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질문했고, 모닥불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으며, 닭의 울음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작은 것들을 통하여 베드로의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지금도 어떤 교회의 지붕 위에 닭 모양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과 회개를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하여 흑암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바라보시면서도 이미 그의 돌이킴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를 세세하게 주장하시며 끝까지 이끌어 가셨습니다.
회개와 통곡 없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베드로만 심히 통곡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자신의 죄를 보고 가슴을 치며 울고 뒹굴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우리의 죄는 주홍보다 붉습니다. 흰 눈 위에 붉은 피가 떨어지면 그 붉음이 얼마나 선명합니까? 그러나 그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집니다.
통곡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를 뱉어 내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은혜입니다. 죄 덩어리를 뱉어 내야 다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님은 항상 미쁘십니다. ‘미쁘다’는 것은 언제나 동일하시고 신실하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려면 예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자기를 부인하는 길은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를 피하여 앞문 쪽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여종이나 사람이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복음서마다 질문한 사람이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차이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질문에는 첫 번째 질문보다 한 가지 내용이 더해집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가리켜 예수와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도당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성경의 ‘도당’이라는 표현은 예수께 속한 자, 예수와 같은 무리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반역의 무리라는 식으로 강하게 이해하기보다 ‘예수께 속한 사람’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라고 할 때의 ‘그리스도의 사람’도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께 속한 사람이며 예수님의 제자라고 지적했습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에고 에이미’, 곧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사람들을 이끌고 주님을 잡으러 왔을 때도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고, 물 위를 걸어오실 때도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에고 우크 에이미’, 곧 “나는 아니라.”라고 부인했습니다.
“나는 예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분의 제자인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인을 통한 회개와 통곡으로 베드로를 돌이키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아들이시지만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고, 눈물과 통곡과 간구로 소원을 올려 드리셨습니다(히 5:7–8). 그러므로 우리를 통곡하게 하시는 것도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은 아주 작고 미미해 보이는 것들을 사용하여 베드로를 돌이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여종과 모닥불과 닭이 등장합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질문했고, 모닥불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으며, 닭의 울음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작은 것들을 통하여 베드로의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지금도 어떤 교회의 지붕 위에 닭 모양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과 회개를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하여 흑암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바라보시면서도 이미 그의 돌이킴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를 세세하게 주장하시며 끝까지 이끌어 가셨습니다.
회개와 통곡 없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베드로만 심히 통곡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자신의 죄를 보고 가슴을 치며 울고 뒹굴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우리의 죄는 주홍보다 붉습니다. 흰 눈 위에 붉은 피가 떨어지면 그 붉음이 얼마나 선명합니까? 그러나 그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집니다.
통곡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를 뱉어 내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은혜입니다. 죄 덩어리를 뱉어 내야 다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님은 항상 미쁘십니다. ‘미쁘다’는 것은 언제나 동일하시고 신실하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려면 예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자기를 부인하는 길은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를 피하여 앞문 쪽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여종이나 사람이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복음서마다 질문한 사람이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차이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질문에는 첫 번째 질문보다 한 가지 내용이 더해집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가리켜 예수와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도당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성경의 ‘도당’이라는 표현은 예수께 속한 자, 예수와 같은 무리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반역의 무리라는 식으로 강하게 이해하기보다 ‘예수께 속한 사람’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라고 할 때의 ‘그리스도의 사람’도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께 속한 사람이며 예수님의 제자라고 지적했습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에고 에이미’, 곧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사람들을 이끌고 주님을 잡으러 왔을 때도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고, 물 위를 걸어오실 때도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에고 우크 에이미’, 곧 “나는 아니라.”라고 부인했습니다.
“나는 예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분의 제자인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