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절은 유다가 예수님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뉘우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회개하다’라고 번역되는 말과 다릅니다. 회개한다는 말은 ‘메타노에오’이고, 유다가 뉘우쳤다고 할 때 사용된 말은 ‘메타멜로마이’입니다. 가룟 유다의 뉘우침은 참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뉘우침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죄를 짓기 전으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원상 복구하려는 마음입니다. 유다가 은 삼십을 돌려주려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돈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으니 그 돈을 되돌려 주면 모든 일이 없었던 것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한다고 해서 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리창을 깨뜨리고 그 값을 물어 주었다고 해서 유리창을 깨뜨린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배상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죄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죄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 고백하는 것으로 죄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유다는 제사장들을 찾아가 자기 죄를 고백했지만,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제나 대제사장을 찾아가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죄를 말하여 잠시 마음이 시원해질 수는 있지만, 사람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를 수 없습니다.
유다는 은 삼십을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값은 사망인데, 사람이 어떻게 그 사망의 값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값을 스스로 갚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일어난 모든 일을 완전히 원상 복구할 수도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거의 다 했습니다. 자기 죄를 인정했고,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으며, 받은 돈을 돌려주어 원상 복구하려 했습니다. 일종의 자수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뉘우침일 뿐이었습니다. 자수했다고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인정하고 돈을 돌려준다고 죄 값이 치러지는 것도 아닙니다.
뉘우침만으로는 죄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뉘우친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고, 죄 값이 치러지지도 않으며,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뉘우침의 자리에서 어디로 향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 향합니까? 사람에게 향합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합니까?
가룟 유다는 먼저 사람에게 향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은 삼십을 돌려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해결을 얻지 못하자 자기 자신에게로 향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스스로 감당하려 했고, 결국 절망하여 자기 생명을 끊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사람은 남을 정죄하거나 자기 자신을 파괴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잘못을 인정했는데 왜 나를 용서하지 않느냐”고 하며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아니면 자기 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스스로 자포자기합니다. 주님께로 향하지 않는 뉘우침은 결국 이 두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아히도벨도 이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계략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압살롬에게 가서 다윗을 죽이려는 계략을 세웠습니다. 다윗은 후새를 압살롬에게 보냈고,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이 아니라 후새의 계략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자기의 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안 아히도벨은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어떤 주석은 아히도벨과 가룟 유다를 구속사적으로 연결합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을 죽이려 했고 결국 자살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팔고 끝내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뜻과 자기 판단 안에 머물다가 절망에 이르렀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짓기 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돌이켜 어디로 향합니까? 주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과거의 나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화살을 잘못 쏘아 엉뚱한 과녁을 맞혔다고 생각해 봅시다. 다시 이전 자리로 돌아간다고 해서 이번에는 과녁을 정확히 맞힐 수 있겠습니까? 실력이 없어서 화살을 잘못 쏘았다면 같은 자리에서 다시 쏘아도 또 빗나갈 수 있습니다. 뉘우침은 이전 자리로 돌아가 다시 해 보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화살을 쏘는 사람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뉘우침은 회개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죄를 깨닫고 가슴을 치는 것도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뉘우침의 순간에 자기 내면으로만 깊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왜 이럴까”라고 끊임없이 자신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때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자기 자신을 챙기려고 합니다. 건강도 챙기고 마음도 챙기고 삶도 챙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맡은 일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챙기기 전에 먼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맡기는 가운데 챙겨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챙기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챙기기 전에 맡기십시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다가 가룟 유다와 같은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유다는 자기가 받은 돈을 돌려주고,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자기가 모든 것을 원상 복구하려 했습니다. 끝내 자기 죄의 값을 자기 생명으로 치르려 했습니다.
사람에게 내어놓는다고 죄가 해결되거나 마음이 완전히 시원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찾아간 사람들보다 훨씬 가까이 계십니다. 뉘우침의 자리에서 자신만 바라보지 말고, 사람에게 해결을 구하지 말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절은 유다가 예수님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뉘우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회개하다’라고 번역되는 말과 다릅니다. 회개한다는 말은 ‘메타노에오’이고, 유다가 뉘우쳤다고 할 때 사용된 말은 ‘메타멜로마이’입니다. 가룟 유다의 뉘우침은 참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뉘우침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죄를 짓기 전으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원상 복구하려는 마음입니다. 유다가 은 삼십을 돌려주려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돈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으니 그 돈을 되돌려 주면 모든 일이 없었던 것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한다고 해서 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리창을 깨뜨리고 그 값을 물어 주었다고 해서 유리창을 깨뜨린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배상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죄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죄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 고백하는 것으로 죄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유다는 제사장들을 찾아가 자기 죄를 고백했지만,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제나 대제사장을 찾아가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죄를 말하여 잠시 마음이 시원해질 수는 있지만, 사람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를 수 없습니다.
유다는 은 삼십을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값은 사망인데, 사람이 어떻게 그 사망의 값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값을 스스로 갚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일어난 모든 일을 완전히 원상 복구할 수도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거의 다 했습니다. 자기 죄를 인정했고,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으며, 받은 돈을 돌려주어 원상 복구하려 했습니다. 일종의 자수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뉘우침일 뿐이었습니다. 자수했다고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인정하고 돈을 돌려준다고 죄 값이 치러지는 것도 아닙니다.
뉘우침만으로는 죄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뉘우친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고, 죄 값이 치러지지도 않으며,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뉘우침의 자리에서 어디로 향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 향합니까? 사람에게 향합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합니까?
가룟 유다는 먼저 사람에게 향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은 삼십을 돌려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해결을 얻지 못하자 자기 자신에게로 향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스스로 감당하려 했고, 결국 절망하여 자기 생명을 끊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사람은 남을 정죄하거나 자기 자신을 파괴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잘못을 인정했는데 왜 나를 용서하지 않느냐”고 하며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아니면 자기 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스스로 자포자기합니다. 주님께로 향하지 않는 뉘우침은 결국 이 두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아히도벨도 이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계략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압살롬에게 가서 다윗을 죽이려는 계략을 세웠습니다. 다윗은 후새를 압살롬에게 보냈고,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이 아니라 후새의 계략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자기의 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안 아히도벨은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어떤 주석은 아히도벨과 가룟 유다를 구속사적으로 연결합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을 죽이려 했고 결국 자살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팔고 끝내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뜻과 자기 판단 안에 머물다가 절망에 이르렀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짓기 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돌이켜 어디로 향합니까? 주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과거의 나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화살을 잘못 쏘아 엉뚱한 과녁을 맞혔다고 생각해 봅시다. 다시 이전 자리로 돌아간다고 해서 이번에는 과녁을 정확히 맞힐 수 있겠습니까? 실력이 없어서 화살을 잘못 쏘았다면 같은 자리에서 다시 쏘아도 또 빗나갈 수 있습니다. 뉘우침은 이전 자리로 돌아가 다시 해 보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화살을 쏘는 사람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뉘우침은 회개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죄를 깨닫고 가슴을 치는 것도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뉘우침의 순간에 자기 내면으로만 깊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왜 이럴까”라고 끊임없이 자신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때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자기 자신을 챙기려고 합니다. 건강도 챙기고 마음도 챙기고 삶도 챙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맡은 일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챙기기 전에 먼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맡기는 가운데 챙겨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챙기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챙기기 전에 맡기십시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다가 가룟 유다와 같은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유다는 자기가 받은 돈을 돌려주고,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자기가 모든 것을 원상 복구하려 했습니다. 끝내 자기 죄의 값을 자기 생명으로 치르려 했습니다.
사람에게 내어놓는다고 죄가 해결되거나 마음이 완전히 시원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찾아간 사람들보다 훨씬 가까이 계십니다. 뉘우침의 자리에서 자신만 바라보지 말고, 사람에게 해결을 구하지 말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