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8.17. 월요일 묵상 | 1. 예수님의 정죄를 보고 스스로 뉘우친 유다

조회수 82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부활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창세전에 작정된 구속사의 큰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람들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고발했고, 누군가는 팔았으며, 누군가는 심문하고 때리고 침을 뱉었습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누군가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갔으며, 누군가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창으로 찔러 그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고난에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직업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재물을 얻는 수단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그는 주님을 판 자이며, 배신하고 배반한 자이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 주님은 자신을 파는 자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유다가 뉘우치고 은 삼십을 성전에 던진 뒤 스스로 목매어 죽은 사건은 마태복음에만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절은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그를 단순히 유다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판 유다”라고 부릅니다. 유다가 당시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 베드로처럼 예수님께서 심문받으시는 광경을 직접 보았는지는 성경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팔아넘긴 예수님께서 정죄되셨다는 사실을 보거나 들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고발한 사람이 정죄되었다면, 그 사람이 죄인이라고 확신하는 자는 마땅한 결과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도리어 뉘우쳤습니다. 정죄된다는 것은 재판받고 징계받는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유다는 주님께서 결박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으시는 모습을 통하여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안나스와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받으시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온 공회가 모여 거짓 증인과 거짓 증거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증거를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직접 죽일 사형권이 없었습니다. 사형권은 로마에 있었지만, 공회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신성 모독죄를 범했으므로 죽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씌운 죄목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야바가 주님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인정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 진실을 피하여 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심문하는 자들의 질문을 통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지난주에는 주님께서 “내가 그니라”, 곧 “I am”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 곧 “I am not”이라고 말한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과 함께 동일한 말을 해야 합니다. ‘호몰로게오’, 곧 주님과 함께 같은 말을 하는 것이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도 “주님, 그러하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주님과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셋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했다며 고발했습니다.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죽음에 해당하는 중대한 죄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한 무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된 자신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죽임을 당하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무고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말한 성전은 내 몸을 두고 한 말이다”라고 한 말씀만 하셔도 될 것 같았지만, 주님께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잠잠하셨습니다. 죽음의 길을 피하지 않고 걸어가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러한 정죄의 과정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심문받으시는 모습을 직접 보았거나, 적어도 그 소식을 자세히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팔았으니 이후의 상황에 관심을 두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본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행하심을 보며 3년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심문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들었던 말씀이 다시 떠올랐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고백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하신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올 것이라는 말씀도 이미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가르치신 말씀이었습니다.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말씀도 성전 된 주님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곧 요나의 표적을 뜻했습니다.
유다는 심문받으시는 예수님께서 위기의 순간에도 한 말씀도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평안할 때와 고난받을 때의 말씀이 다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마음속에 ‘저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시구나.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참으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분이며 죽고 부활하실 분이시구나’라는 깨달음이 밀려왔을 수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귀로만 들었던 말씀이 이제 그의 심령을 파고든 것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두려운 말씀도 떠올랐을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는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은 누가 그릇에 손을 넣었는지 쉽게 알 수 없었지만, 유다는 그 말씀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되시는 모습을 보면서 죄의 값에 대한 두려움과 마주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피 값으로 팔았지만, 그 피 값이 이제 자기의 죄 값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정죄됨을 보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정죄를 통하여 유다 자신이 정죄되었다는 뜻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돌을 던질 때 그 돌이 도리어 나를 정죄하는 돌이 될 수 있습니다. 죄를 분별하는 사람은 자신도 죄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심문과 재판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받으신 심문과 재판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룟 유다와 같은 죄인입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곧 자신의 정죄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무죄한 피”는 죄 없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바로 그 피를 자신이 팔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신명기 27장 25절에는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무고하여 죽이려고 돈을 받은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침내 이 말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 삼십이 단순한 돈이 아니라 무죄한 피를 흘리기 위하여 받은 뇌물이며, 자신을 저주 아래 두는 죄의 값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뉘우침을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정죄를 보며 자신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직 주님께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은 삼십을 들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갔습니다.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찾아간 것입니다.
유다는 죄 없는 예수님을 팔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기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과 두려움이 곧 회개는 아니었습니다. 뉘우침이 회개로 이어지려면 자기 자신이나 사람에게로 향하지 않고 주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죄의 무게를 깨달았을 때 어디로 향하는지가 생명과 사망을 나누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