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길을 가다가 매미가 우는 모습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매미가 울 때 엉덩이가 들썩들썩했습니다. 그런데 숨을 내쉴 때가 아니라 들이마실 때 몸이 올라가면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도 계속 숨을 불어넣지만 소리는 다른 쪽을 통해 나옵니다.
진리를 말할 때 거짓을 향해 계속 말을 내뱉으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들숨의 소리를 내야 합니다. 듣는 소리를 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아멘, 아멘” 하면 그것이 이미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쏟아낸다고 반드시 진리의 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소란을 일으켰다고 고발했습니다. 어떻게 진리를 소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들이 은혜를 소란이라고 불러도 주님께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하시면 그것이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이 복음의 소리입니다.
거짓은 서로 합작하여 큰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진리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보아도 보지 않는 것 같고 들어도 듣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울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다”라고 말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말씀을 받아들이고 섭취해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그것이 매미의 소리와 같은 진리의 소리가 됩니다. 꽃도 소리를 내고 열매도 소리를 냅니다. 윤택하게 자라고 참고 견디다가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도 소리입니다. 우리 안에서 인내의 소리와 결심의 소리가 나야 합니다.
시편 38편 13절부터 15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38:13-15)
다윗도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반박할 말을 쏟아내기보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입을 닫을 테니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벙어리와 같으니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한 번 발하면 천하의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우리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목소리가 울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내는 공명관이 되고 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두드리시면 소리를 내는 주님의 악기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39편 9절에서도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 39:9)
우리에게는 잠잠해야 할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소리가 납니다. 우리가 참고 견디는 영역이 있어야 우리의 지경도 넓어집니다. 인내로 기업을 얻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서 속이 시원하다면 그 가운데 어디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겠습니까? 내가 참고 기다릴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결론으로 한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불확실한 것과 관련하여 우리 교회 청년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요즘을 전환기적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배우고 확신한 것으로 감사하고, 불확실한 것으로 두려워하거나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 김문수 성도님과 함께 주일학교에 가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이런 내용으로 설교할 것이라고 말하며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타이어에 펑크가 났습니다. 옛날 같으면 하루 종일 걸릴 일이지만 지금은 전화하면 20분 만에 와서 처리해 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불평합니다.
집으로 돌아가 저녁 뉴스를 보니 그곳에서 약 6킬로미터 앞에 있는 다리가 끊어졌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타이어에 펑크가 난 것이 기쁜 일입니까, 슬픈 일입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기도해 보아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좋은지도 사실은 모릅니다. 분명히 내가 되고 싶은 것이 있지만, 그것이 정말 내게 좋은 결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도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학위를 받을 때 그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학위를 받는 것이 좋은지, 받지 않는 것이 좋은지 기도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배우고 확신한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확실합니다. 십자가에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재판을 받으셨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저도 목사이지만 쓸데없는 것으로 지나치게 고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옳은지 좋은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괜히 힘들어하고, 어떤 때에는 괜히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야 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타이어에 펑크가 난 것으로는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 앞에 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앞에 있는 다리가 끊어진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노래를 부르며 계속 달려갑니다. 하나님께서 차의 방향을 강제로 돌리실 수도 있지만, 타이어에 펑크가 나게 하여 우리를 멈추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러한 은혜 가운데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붙드시므로 살고, 우리의 손을 붙드시므로 큰 사고 없이 살아갑니다. 모든 일을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민하는 많은 일에는 절대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좋겠는데, 이것이 이루어지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좋은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일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바에 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신문을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재판받으심으로 내가 진리 가운데 서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밝히고 있는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재판받으셨습니다. 날 위하여, 내 대신에, 나 때문에 재판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불확실한 일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일로 두려워하거나 교만할 것이 아니라, 분명히 배우고 확신한 십자가의 진리로 감사해야 합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배우고 확신한 것으로 감사하고, 알 수 없는 일로 두려워하거나 교만하지 말자.
이번 주에 길을 가다가 매미가 우는 모습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매미가 울 때 엉덩이가 들썩들썩했습니다. 그런데 숨을 내쉴 때가 아니라 들이마실 때 몸이 올라가면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도 계속 숨을 불어넣지만 소리는 다른 쪽을 통해 나옵니다.
진리를 말할 때 거짓을 향해 계속 말을 내뱉으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들숨의 소리를 내야 합니다. 듣는 소리를 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아멘, 아멘” 하면 그것이 이미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쏟아낸다고 반드시 진리의 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소란을 일으켰다고 고발했습니다. 어떻게 진리를 소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들이 은혜를 소란이라고 불러도 주님께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하시면 그것이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이 복음의 소리입니다.
거짓은 서로 합작하여 큰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진리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보아도 보지 않는 것 같고 들어도 듣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울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다”라고 말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말씀을 받아들이고 섭취해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그것이 매미의 소리와 같은 진리의 소리가 됩니다. 꽃도 소리를 내고 열매도 소리를 냅니다. 윤택하게 자라고 참고 견디다가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도 소리입니다. 우리 안에서 인내의 소리와 결심의 소리가 나야 합니다.
시편 38편 13절부터 15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38:13-15)
다윗도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반박할 말을 쏟아내기보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입을 닫을 테니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벙어리와 같으니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한 번 발하면 천하의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우리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목소리가 울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내는 공명관이 되고 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두드리시면 소리를 내는 주님의 악기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39편 9절에서도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 39:9)
우리에게는 잠잠해야 할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소리가 납니다. 우리가 참고 견디는 영역이 있어야 우리의 지경도 넓어집니다. 인내로 기업을 얻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서 속이 시원하다면 그 가운데 어디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겠습니까? 내가 참고 기다릴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결론으로 한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불확실한 것과 관련하여 우리 교회 청년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요즘을 전환기적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배우고 확신한 것으로 감사하고, 불확실한 것으로 두려워하거나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 김문수 성도님과 함께 주일학교에 가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이런 내용으로 설교할 것이라고 말하며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타이어에 펑크가 났습니다. 옛날 같으면 하루 종일 걸릴 일이지만 지금은 전화하면 20분 만에 와서 처리해 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불평합니다.
집으로 돌아가 저녁 뉴스를 보니 그곳에서 약 6킬로미터 앞에 있는 다리가 끊어졌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타이어에 펑크가 난 것이 기쁜 일입니까, 슬픈 일입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기도해 보아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좋은지도 사실은 모릅니다. 분명히 내가 되고 싶은 것이 있지만, 그것이 정말 내게 좋은 결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도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학위를 받을 때 그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학위를 받는 것이 좋은지, 받지 않는 것이 좋은지 기도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배우고 확신한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확실합니다. 십자가에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재판을 받으셨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저도 목사이지만 쓸데없는 것으로 지나치게 고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옳은지 좋은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괜히 힘들어하고, 어떤 때에는 괜히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야 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타이어에 펑크가 난 것으로는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 앞에 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앞에 있는 다리가 끊어진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노래를 부르며 계속 달려갑니다. 하나님께서 차의 방향을 강제로 돌리실 수도 있지만, 타이어에 펑크가 나게 하여 우리를 멈추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러한 은혜 가운데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붙드시므로 살고, 우리의 손을 붙드시므로 큰 사고 없이 살아갑니다. 모든 일을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민하는 많은 일에는 절대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좋겠는데, 이것이 이루어지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좋은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일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바에 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신문을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재판받으심으로 내가 진리 가운데 서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밝히고 있는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재판받으셨습니다. 날 위하여, 내 대신에, 나 때문에 재판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불확실한 일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일로 두려워하거나 교만할 것이 아니라, 분명히 배우고 확신한 십자가의 진리로 감사해야 합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배우고 확신한 것으로 감사하고, 알 수 없는 일로 두려워하거나 교만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