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가 던진 세 번째 질문은 “진리가 무엇이냐?”였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신림동의 한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섬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성탄 전야에 학생들과 성극을 했는데, 제가 희곡을 써서 공연했습니다. 그 희곡의 제목도 “진리가 무엇인가?”였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본문을 가지고 빌라도와 빌라도의 아내가 등장하는 성극을 만들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진리가 무엇이냐?”입니다. 헬라어로는 “티 에스틴 알레테이아?”, 라틴어로는 “퀴드 에스트 베리타스?”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신문하면서 던진 마지막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진리이시고 길이십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이신 분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은 뒤 주님의 사형 집행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신문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코그니티오’라고 합니다. 죄인을 신문한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지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첫 부분에는 우리의 모든 지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나옵니다. 그때의 지식도 ‘코그니티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신문을 당하셨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진리의 역사를 일으키시려고 참과 거짓이 대립하는 자리에서 거짓으로 인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거짓의 심판을 받으시면서 참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주님께서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를 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말씀에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옛 성경에는 화평을 누린다고 번역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샬롬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신다는 것은 진리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제가 이번 주 내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부분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역사하면 최종적으로 ‘예’와 ‘아니요’를 분별하게 됩니다. ‘예’는 영생의 길이고 ‘아니요’는 영벌의 길입니다. ‘예’는 하나님 편이고 ‘아니요’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진리의 편에 세워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매일 비진리의 책과 사람을 현혹하는 글을 읽고 그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운동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방송이나 학습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전달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부터 진리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신문을 당하시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 안에 진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진리로 말미암아 모든 사물이 아름답게 보이고, 흐트러져 있던 모든 것이 새롭게 질서를 잡아 제자리를 찾습니다.
주님께서 신문을 당하시고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립니다. 화평은 샬롬이고, 샬롬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주에 갈라디아서 4장까지 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는 우리가 하갈의 후손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여자의 후손, 곧 사라의 후손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 안에서 진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난주에는 가룟 유다가 뉘우쳤지만 그의 뉘우침은 회개가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진리가 역사하면 단순히 뉘우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개는 돌이켜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돌이키고 온전하게 합니다.
거짓이 우리를 많이 대적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께서는 계속 침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을 때도 침묵하셨고, 헤롯에게 가셨을 때도 침묵하셨습니다. 거짓은 거품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그대로 두면 사라집니다. 괜히 손을 대어 손에 거품을 묻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잠잠하셨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생명이 죽음의 심판을 받고, 빛이 어둠의 심판을 받으며, 진리가 거짓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잠잠하셨습니다.
거짓은 하늘로 올라가는 풍선과도 같습니다. 대단하게 부풀어 오르고 높이 올라가는 것 같지만 얼마 가지 못해 터지고 맙니다. 그러나 진리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 모든 사람에게 비춘다고 하셨습니다.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짓 앞에서 너무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거짓은 사탄의 궤계이고 흑암의 권세이지만 거짓 자체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을 폭로하시기 위하여 그것을 잠시 사용하실 뿐입니다. 거짓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함께 의논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를 중심으로 모두 머리를 모아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신문을 계속해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자, 나중에는 한 사람이 죽어 모든 백성이 평안한 것이 좋다는 논리까지 내세웠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습니다.
진리는 사람들이 의논하고 타협하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화살과 같습니다. 화살처럼 곧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리저리 굽어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진리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열쇠 구멍은 작고 막혀 있지만, 그 구멍에 맞는 열쇠가 들어가면 문이 열립니다. 그것이 좁은 문이며 좁은 길입니다. 진리가 들어가면 닫힌 문이 열립니다.
주님께서 “내가 그니라”고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아멘, 아멘” 하면 됩니다. 주님과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진리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은 가장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리가 가장 풍성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 진정한 답을 주셨다면 그 말씀을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답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거짓에는 침묵하십시오. 주님과 같이 침묵하십시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 주님과 한목소리를 내게 됩니다.
빌라도가 던진 세 번째 질문은 “진리가 무엇이냐?”였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신림동의 한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섬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성탄 전야에 학생들과 성극을 했는데, 제가 희곡을 써서 공연했습니다. 그 희곡의 제목도 “진리가 무엇인가?”였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본문을 가지고 빌라도와 빌라도의 아내가 등장하는 성극을 만들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진리가 무엇이냐?”입니다. 헬라어로는 “티 에스틴 알레테이아?”, 라틴어로는 “퀴드 에스트 베리타스?”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신문하면서 던진 마지막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진리이시고 길이십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이신 분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은 뒤 주님의 사형 집행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신문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코그니티오’라고 합니다. 죄인을 신문한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지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첫 부분에는 우리의 모든 지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나옵니다. 그때의 지식도 ‘코그니티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신문을 당하셨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진리의 역사를 일으키시려고 참과 거짓이 대립하는 자리에서 거짓으로 인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거짓의 심판을 받으시면서 참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주님께서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를 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말씀에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옛 성경에는 화평을 누린다고 번역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샬롬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신다는 것은 진리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제가 이번 주 내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부분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역사하면 최종적으로 ‘예’와 ‘아니요’를 분별하게 됩니다. ‘예’는 영생의 길이고 ‘아니요’는 영벌의 길입니다. ‘예’는 하나님 편이고 ‘아니요’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진리의 편에 세워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매일 비진리의 책과 사람을 현혹하는 글을 읽고 그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운동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방송이나 학습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전달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부터 진리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신문을 당하시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 안에 진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진리로 말미암아 모든 사물이 아름답게 보이고, 흐트러져 있던 모든 것이 새롭게 질서를 잡아 제자리를 찾습니다.
주님께서 신문을 당하시고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립니다. 화평은 샬롬이고, 샬롬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주에 갈라디아서 4장까지 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는 우리가 하갈의 후손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여자의 후손, 곧 사라의 후손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 안에서 진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난주에는 가룟 유다가 뉘우쳤지만 그의 뉘우침은 회개가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진리가 역사하면 단순히 뉘우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개는 돌이켜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돌이키고 온전하게 합니다.
거짓이 우리를 많이 대적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께서는 계속 침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을 때도 침묵하셨고, 헤롯에게 가셨을 때도 침묵하셨습니다. 거짓은 거품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그대로 두면 사라집니다. 괜히 손을 대어 손에 거품을 묻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잠잠하셨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생명이 죽음의 심판을 받고, 빛이 어둠의 심판을 받으며, 진리가 거짓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잠잠하셨습니다.
거짓은 하늘로 올라가는 풍선과도 같습니다. 대단하게 부풀어 오르고 높이 올라가는 것 같지만 얼마 가지 못해 터지고 맙니다. 그러나 진리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 모든 사람에게 비춘다고 하셨습니다.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짓 앞에서 너무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거짓은 사탄의 궤계이고 흑암의 권세이지만 거짓 자체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을 폭로하시기 위하여 그것을 잠시 사용하실 뿐입니다. 거짓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함께 의논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를 중심으로 모두 머리를 모아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신문을 계속해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자, 나중에는 한 사람이 죽어 모든 백성이 평안한 것이 좋다는 논리까지 내세웠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습니다.
진리는 사람들이 의논하고 타협하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화살과 같습니다. 화살처럼 곧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리저리 굽어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진리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열쇠 구멍은 작고 막혀 있지만, 그 구멍에 맞는 열쇠가 들어가면 문이 열립니다. 그것이 좁은 문이며 좁은 길입니다. 진리가 들어가면 닫힌 문이 열립니다.
주님께서 “내가 그니라”고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아멘, 아멘” 하면 됩니다. 주님과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진리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은 가장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리가 가장 풍성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 진정한 답을 주셨다면 그 말씀을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답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거짓에는 침묵하십시오. 주님과 같이 침묵하십시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 주님과 한목소리를 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