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죽음으로 넘겨지고 바라바는 풀려났습니다.
이 장면은 아주 선명합니다. 죄가 없는 분은 죽고, 실제로 죄가 있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바라바는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에 가담한 사람이었습니다. 강도라고도 불립니다. 죽음의 형벌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빌라도도 죄를 찾지 못했고, 헤롯도 죄를 찾지 못했고, 빌라도의 아내도 의인이라고 증언한 분입니다.
그런데 죄 없는 예수님은 죽고 죄인 바라바는 풀려났습니다.
구약의 레위기 16장에는 속죄일에 두 염소를 세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마리는 죽여 제물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안수한 뒤 광야로 내보냅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입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을 보면서 그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풀려납니다.
죄 없는 예수님은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죽으시며, 죄 있는 바라바는 놓임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바라바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죄 없는 주님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말씀한 “대표”가 아니라 “대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바라바를 대표하여 죽은 것이 아닙니다.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은 죄인의 한 사람으로 우리와 같이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죄 없는 분으로서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 절기가 유월절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죽음이 넘어간 날입니다.
그 유월절에 참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피를 내어주십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주님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가 대속을 받습니다.
물론 바라바가 실제로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풀어주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가 구원받았는지를 말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라바가 놓이고 예수님이 죽으신 이 장면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한 교훈을 줍니다.
죄인은 놓이고 의인은 죽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살고 죽을 이유가 없는 분이 죽습니다.
그것이 대속의 그림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죄가 없으십니다.
설교에서 계속 죄행도 없고 죄성도 없고 죄의 성향도 없다고 반복해서 말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나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죄를 지으면서 조금 더 의로운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입니다.
죄의 성향 자체가 없습니다. 죄를 짓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죄에 끌리는 마음도 없습니다.
완전히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 죄 없음 하나만 생각해도 우리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얼마나 많은 죄와 더러움이 있는지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정결함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바라며, 내 더러움을 하나라도 더 씻어주시기를 바라며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에게 외쳤습니다.
“예수는 없이 하소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리고 바라바에 대해서는 말합니다.
“바라바는 놓아주소서.”
이 장면이 얼마나 뒤집혀 있습니까?
의인을 악인이라 하고 악인을 놓아줍니다. 잠언 17장 15절의 말씀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로 이 뒤집힌 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시기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의 소리에 굴복했습니다. 재판은 불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가운데 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십니다.
우리가 바라바처럼 놓임을 받는 것은 우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대신 누군가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죄 없는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인 나를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죄 없음과 그분의 대신하심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죄 없는 분이 대신하셨기에 그 피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대신 죽으셨기에 죄인이 놓임을 받습니다.
바라바가 풀려나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자기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죽으셨구나.”
이 사실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넘겨지고 바라바는 풀려났습니다.
이 장면은 아주 선명합니다. 죄가 없는 분은 죽고, 실제로 죄가 있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바라바는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에 가담한 사람이었습니다. 강도라고도 불립니다. 죽음의 형벌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빌라도도 죄를 찾지 못했고, 헤롯도 죄를 찾지 못했고, 빌라도의 아내도 의인이라고 증언한 분입니다.
그런데 죄 없는 예수님은 죽고 죄인 바라바는 풀려났습니다.
구약의 레위기 16장에는 속죄일에 두 염소를 세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마리는 죽여 제물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안수한 뒤 광야로 내보냅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입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을 보면서 그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풀려납니다.
죄 없는 예수님은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죽으시며, 죄 있는 바라바는 놓임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바라바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죄 없는 주님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말씀한 “대표”가 아니라 “대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바라바를 대표하여 죽은 것이 아닙니다.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은 죄인의 한 사람으로 우리와 같이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죄 없는 분으로서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 절기가 유월절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죽음이 넘어간 날입니다.
그 유월절에 참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피를 내어주십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주님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가 대속을 받습니다.
물론 바라바가 실제로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풀어주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가 구원받았는지를 말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라바가 놓이고 예수님이 죽으신 이 장면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한 교훈을 줍니다.
죄인은 놓이고 의인은 죽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살고 죽을 이유가 없는 분이 죽습니다.
그것이 대속의 그림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죄가 없으십니다.
설교에서 계속 죄행도 없고 죄성도 없고 죄의 성향도 없다고 반복해서 말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나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죄를 지으면서 조금 더 의로운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입니다.
죄의 성향 자체가 없습니다. 죄를 짓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죄에 끌리는 마음도 없습니다.
완전히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 죄 없음 하나만 생각해도 우리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얼마나 많은 죄와 더러움이 있는지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정결함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바라며, 내 더러움을 하나라도 더 씻어주시기를 바라며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에게 외쳤습니다.
“예수는 없이 하소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리고 바라바에 대해서는 말합니다.
“바라바는 놓아주소서.”
이 장면이 얼마나 뒤집혀 있습니까?
의인을 악인이라 하고 악인을 놓아줍니다. 잠언 17장 15절의 말씀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로 이 뒤집힌 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시기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의 소리에 굴복했습니다. 재판은 불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가운데 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십니다.
우리가 바라바처럼 놓임을 받는 것은 우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대신 누군가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죄 없는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인 나를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죄 없음과 그분의 대신하심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죄 없는 분이 대신하셨기에 그 피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대신 죽으셨기에 죄인이 놓임을 받습니다.
바라바가 풀려나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자기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죽으셨구나.”
이 사실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