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로 사람의 계명과 하나님의 계명을 성경에는 같이 계명이라고 하지만 원어에는 ‘엔탈마’와 ‘엔톨레’로 구분됩니다. 번역 자체는 계명으로 해도 되나 조금 다릅니다. 사람의 계명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죄 없는 자가 치라는 것입니다. 곧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골 2:23). 사람의 계명도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만이 그 이후로 나아갑니다.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에는 사람의 계명이 조금도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을 내세우는 사람은 계속 윤리만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착하다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부자 청년도 착했습니다. 주님의 법은 은혜의 법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용서받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 가운데 다른 사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빚진 자요, 나 같은 죄인이 없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이왕이면 사람의 계명을 더합니다. 이것을 네 복음서는 각각 다른 네 단어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고’ ‘버리고’ ‘저버리고’ ‘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그저 직선적 신앙, 소박한 신앙이면 됩니다. 딱딱해 보여도 그 자리에 있어야 생명이고 열매고 뿌리입니다.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 화려하나 열매가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이러한 행태를 꼬집은 예가 ‘고르반’입니다. 고르반은 드려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예물이라는 뜻입니다. 양을 한 마리 빌려줘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양을 갚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양을 갚는 대신 잡아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받을 사람이 ‘고르반’ 하고 외칩니다. 저 양은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을 채무자가 잡아먹으면 하나님의 것을 잡아먹는 것이므로 사형에 처해집니다. 도무지 말을 안 들을 때 하나님을 개입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부모 공양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옷도 입히고 맛있는 것도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께 다 드렸다고 하고서는 자기가 돈을 써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를 죽음을 당하리라,’ 이 말씀에서 공경은 그저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전통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인 5계명부터 어기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무엇일까요. 법은 그대로 두고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지킬 수 없으니 법을 고칩니다. 말씀을 볼 때 내가 할 수 없음을 깨닫더라도 못한다거나 법을 바꾸지 않고 나를 쳐서 엎드리면, 법에 손대지 않고 나를 쳐서 복종시키면 하나님이 주시는 비밀하고 은밀한 은혜가 있습니다. 법을 바꾸면 이것이 다 사라집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형식주의, 예식주의에 빠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안에서 나오는 것을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먹고 마시는 내용물이 아닌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 9:3);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6-27). 겉을 깨끗케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안을 닦아야 합니다. 죄로부터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사람의 것을 더하는 것입니다. 둘 다 물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거기에 급하다고 인간의 말을 더하면 둘 다 물에 빠집니다. 여리고로 지나가는 예수님을 손을 잡아야 합니다. 겉옷을 던져놓고 보이지 않으나 뛰쳐나가서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물 위로 걸어가셔서 지나가십니다. 가까이 하십니다. 급하고 힘들 때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친구 손, 상사 손 대신 예수님 손을 잡으십시오. 이것에 본문 말씀의 본질이 있습니다. 세상 것을 더하지 말고 있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듣는 귀, 고백하는 입술을 갖고 납작 엎드려 기도하면서 받으십시오. 주님이 지나가십니다. 주님이 내 손을 잡으십니다. 소경과 같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도무지 감이 안 잡힐 때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의 손을 잡으면 다 같이 멸망합니다.
두 번째로 사람의 계명과 하나님의 계명을 성경에는 같이 계명이라고 하지만 원어에는 ‘엔탈마’와 ‘엔톨레’로 구분됩니다. 번역 자체는 계명으로 해도 되나 조금 다릅니다. 사람의 계명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죄 없는 자가 치라는 것입니다. 곧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골 2:23). 사람의 계명도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만이 그 이후로 나아갑니다.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에는 사람의 계명이 조금도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을 내세우는 사람은 계속 윤리만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착하다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부자 청년도 착했습니다. 주님의 법은 은혜의 법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용서받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 가운데 다른 사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빚진 자요, 나 같은 죄인이 없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이왕이면 사람의 계명을 더합니다. 이것을 네 복음서는 각각 다른 네 단어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고’ ‘버리고’ ‘저버리고’ ‘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그저 직선적 신앙, 소박한 신앙이면 됩니다. 딱딱해 보여도 그 자리에 있어야 생명이고 열매고 뿌리입니다.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 화려하나 열매가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이러한 행태를 꼬집은 예가 ‘고르반’입니다. 고르반은 드려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예물이라는 뜻입니다. 양을 한 마리 빌려줘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양을 갚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양을 갚는 대신 잡아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받을 사람이 ‘고르반’ 하고 외칩니다. 저 양은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을 채무자가 잡아먹으면 하나님의 것을 잡아먹는 것이므로 사형에 처해집니다. 도무지 말을 안 들을 때 하나님을 개입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부모 공양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옷도 입히고 맛있는 것도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께 다 드렸다고 하고서는 자기가 돈을 써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를 죽음을 당하리라,’ 이 말씀에서 공경은 그저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전통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인 5계명부터 어기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무엇일까요. 법은 그대로 두고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지킬 수 없으니 법을 고칩니다. 말씀을 볼 때 내가 할 수 없음을 깨닫더라도 못한다거나 법을 바꾸지 않고 나를 쳐서 엎드리면, 법에 손대지 않고 나를 쳐서 복종시키면 하나님이 주시는 비밀하고 은밀한 은혜가 있습니다. 법을 바꾸면 이것이 다 사라집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형식주의, 예식주의에 빠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안에서 나오는 것을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먹고 마시는 내용물이 아닌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 9:3);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6-27). 겉을 깨끗케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안을 닦아야 합니다. 죄로부터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사람의 것을 더하는 것입니다. 둘 다 물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거기에 급하다고 인간의 말을 더하면 둘 다 물에 빠집니다. 여리고로 지나가는 예수님을 손을 잡아야 합니다. 겉옷을 던져놓고 보이지 않으나 뛰쳐나가서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물 위로 걸어가셔서 지나가십니다. 가까이 하십니다. 급하고 힘들 때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친구 손, 상사 손 대신 예수님 손을 잡으십시오. 이것에 본문 말씀의 본질이 있습니다. 세상 것을 더하지 말고 있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듣는 귀, 고백하는 입술을 갖고 납작 엎드려 기도하면서 받으십시오. 주님이 지나가십니다. 주님이 내 손을 잡으십니다. 소경과 같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도무지 감이 안 잡힐 때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의 손을 잡으면 다 같이 멸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