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하신, “너희들은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시는 그 말씀이 바로 이것에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해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율법 해석, 하나님의 본래 뜻을 밝히신 것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법 해석, 행태는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말씀하신 법은 기록된 법, 성경인데 반해 그들의 법은 장로들의 유전, 한마디로 넘겨 받은, 사람들의 전통입니다. 이들은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서기관들은 이 전통이 법적 효력이 있다고 적용한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구전되어 온, 출처도 알 수 없는 이 말을 모세부터 전해져 내려온다고 하면서 기록한 것 못지 않게 구전된 전통에게 동일한 권위를 부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전통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이것이 거짓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북이스라엘과 남유가가 망한 후 하스모니아 왕조, 마카비 왕조 등이 나오는데 그때부터 형성된 유대주의가 그 출처입니다. 유대주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옛 성경에는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법을 얼마나 많이 만드냐면, 하라는 것을 248개, 하지 말라는 것을 365개 만들어서 총 613개의 사실상의 통치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본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법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영생의 생명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데 이런 지엽적이고 작위적인 법을 근거로 문제를 삼는 것입니다. 대적하는 자들의 특성이 이렇습니다. 큰 복음의 줄기, 생명의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왜 손을 안 씻고 음식을 먹느냐는 등의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손을 씻으라는 규례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서 성물을 먹기 전에는 씻으라고 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에는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은 이상 손을 씻으라는 계명은 없습니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의미에서 정하신 것입니다. 사망의 자리에 갔다 온 후 새롭게 하는 측면에서 씻고 닦고 하라고 하신 것은 맞으나 언제나 매번 먹기 전에 씻으라는 규례는 없습니다. 어디까지 씻어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임의적인 규례를 만듭니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키지 않는다고 꼬투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장 열렬하게 연구한 두 학파로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가 있습니다. 전자의 가말리엘 문하가 사울이 속했던 곳입니다. 최고 학파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투는 것은 일례로 방을 청소할 때 손을 먼저 청소를 할지, 청소를 하고 손을 씻을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송논쟁 등으로 사소한 예법을 가지고 일년 내내 싸운 것을 아는데 그것보다 더 심합니다. 저도 밥먹을 때 제 딸이 손 씻고 오지 않냐고 다그치는데, 이런 일을 본질로 삼은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과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잔을 씻기 전에 손을 씻느냐, 잔을 씻고 난 후에 손을 씻느냐. 이러한 예들처럼 다툰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이러한 우매함에 빠질까요. 이것은 사람에게 법, 말씀, 성경을 준 분이 누구인지 잊기 때문입니다. 누가 율법을 주셨느냐를 안다면 율법을 주신 그 목적을 생각할 것이고 주신 분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법을 만들고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법 자체보다는 그것을 자의로 해석하여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나중에는 그들의 해석과 전통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전통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전통에는 권위가 없는 것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오직 기록된 말씀으로’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 외에 전통에도 권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이러한 전통은 권위가 없다고 정확히 규정합니다. 이런 것들은 형식주의, 예식주의, 인본주의에 기인합니다. 그리고 인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공로주의, 자질주의로 이어집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빼고 내가 잘하는 것만 더 강조하여 드러나게 하고 특권화, 계급화 시킵니다. 그래서 칼빈은 로마카톨릭을 새로운 유대주의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하신, “너희들은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시는 그 말씀이 바로 이것에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해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율법 해석, 하나님의 본래 뜻을 밝히신 것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법 해석, 행태는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말씀하신 법은 기록된 법, 성경인데 반해 그들의 법은 장로들의 유전, 한마디로 넘겨 받은, 사람들의 전통입니다. 이들은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서기관들은 이 전통이 법적 효력이 있다고 적용한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구전되어 온, 출처도 알 수 없는 이 말을 모세부터 전해져 내려온다고 하면서 기록한 것 못지 않게 구전된 전통에게 동일한 권위를 부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전통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이것이 거짓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북이스라엘과 남유가가 망한 후 하스모니아 왕조, 마카비 왕조 등이 나오는데 그때부터 형성된 유대주의가 그 출처입니다. 유대주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옛 성경에는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법을 얼마나 많이 만드냐면, 하라는 것을 248개, 하지 말라는 것을 365개 만들어서 총 613개의 사실상의 통치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본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법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영생의 생명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데 이런 지엽적이고 작위적인 법을 근거로 문제를 삼는 것입니다. 대적하는 자들의 특성이 이렇습니다. 큰 복음의 줄기, 생명의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왜 손을 안 씻고 음식을 먹느냐는 등의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손을 씻으라는 규례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서 성물을 먹기 전에는 씻으라고 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에는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은 이상 손을 씻으라는 계명은 없습니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의미에서 정하신 것입니다. 사망의 자리에 갔다 온 후 새롭게 하는 측면에서 씻고 닦고 하라고 하신 것은 맞으나 언제나 매번 먹기 전에 씻으라는 규례는 없습니다. 어디까지 씻어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임의적인 규례를 만듭니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키지 않는다고 꼬투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장 열렬하게 연구한 두 학파로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가 있습니다. 전자의 가말리엘 문하가 사울이 속했던 곳입니다. 최고 학파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투는 것은 일례로 방을 청소할 때 손을 먼저 청소를 할지, 청소를 하고 손을 씻을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송논쟁 등으로 사소한 예법을 가지고 일년 내내 싸운 것을 아는데 그것보다 더 심합니다. 저도 밥먹을 때 제 딸이 손 씻고 오지 않냐고 다그치는데, 이런 일을 본질로 삼은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과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잔을 씻기 전에 손을 씻느냐, 잔을 씻고 난 후에 손을 씻느냐. 이러한 예들처럼 다툰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이러한 우매함에 빠질까요. 이것은 사람에게 법, 말씀, 성경을 준 분이 누구인지 잊기 때문입니다. 누가 율법을 주셨느냐를 안다면 율법을 주신 그 목적을 생각할 것이고 주신 분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법을 만들고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법 자체보다는 그것을 자의로 해석하여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나중에는 그들의 해석과 전통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전통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전통에는 권위가 없는 것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오직 기록된 말씀으로’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 외에 전통에도 권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이러한 전통은 권위가 없다고 정확히 규정합니다. 이런 것들은 형식주의, 예식주의, 인본주의에 기인합니다. 그리고 인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공로주의, 자질주의로 이어집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빼고 내가 잘하는 것만 더 강조하여 드러나게 하고 특권화, 계급화 시킵니다. 그래서 칼빈은 로마카톨릭을 새로운 유대주의로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