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예수께 왔습니다. 성경마다 조금 표현이 다른데 예수의 발 아래 절하고 엎드렸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일단 절은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받은 자에게 하는 것입니다. 회당장쯤 되는 자가 절하는 것은 아마도 로마 황제 정도에게 하는 것이나, 물론 다른 의미로 있을 만한 일입니다. 본문은 이미 예수님의 사역이 널리 알려진 상황일 것입니다. 야이로도 아마 이 일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지하는 마음으로 엎드린 것입니다. 간절함이 겸손을 낳는다고 한번 써 보았습니다. 간절함이 있으면 겸손해집니다. 새도 자식을 지킬 때 보면 겸손해집니다. 막 날지 않고 조금씩 납니다. 자연의 새도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울 때는 마구 날지 않고 조심합니다. 회당장이 회당장의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딸의 아버지로서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예수님께 무릎을 꿇어 절을 한 것입니다.
딸이 이미 죽은 것처럼 마태와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누가복음은 조금 더 설명하여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라고 하기도 합니다. 설명은 마가복음이 더 자세하고 누가복음은 뭔가 부연 설명이 더 들어 있습니다. 아마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가시기 시작할 때는 살았으나 가는 중 딸이 이미 죽은 상황을 말할 수 있습니다. 야이로는 마태복음에서는 다 끝났다고 체념하는 것처럼, 마가복음에서는 존재가 멸절하는 것으로 절망감을, 누가복음에는 죽어 가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다만 완전히 죽음이 끝나지는 않은 것처럼 써 있습니다. 죽는 병이 맞습니다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절박함이 보이는 것입니다. 유일한 혈육인 딸이 죽어 가고 사실상 죽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방법을 다 써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법이 없다라고 볼 수도 있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급성의 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병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장 교통사고가 난 것과 같은 일은 아닙니다. 하루 이틀이라도 앓다가 의식이 없어진 상태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세 복음서를 묶어서 보면 야이로가 예수께 '오시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의 신앙은 백부장의 신앙보다는 못하다고 기록했습니다. 백부장은 오지 않으셔도 낫겠다고 했는데 야이로는 오시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손을 얹어 달라고 했는데 이 안수는 권능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반드시 주님이 손을 얹어서 낫게 한다기보다 이 당시에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할 때 손을 얹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그저 예수님께 그의 큰 권능을 기대하는 큰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나타났습니다. 니고데모가 관리 중 처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자인데 이 사람들이 나중에 로마 황제까지 예수를 믿게 되는 디딤돌일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어쨌거나 밤에 왔습니다. 절박함이 적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낮의 눈을 피해 밤에 왔으니 말입니다. 어쨌거나 야이로는 믿음이 약하다고 우리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예수께 왔습니다. 성경마다 조금 표현이 다른데 예수의 발 아래 절하고 엎드렸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일단 절은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받은 자에게 하는 것입니다. 회당장쯤 되는 자가 절하는 것은 아마도 로마 황제 정도에게 하는 것이나, 물론 다른 의미로 있을 만한 일입니다. 본문은 이미 예수님의 사역이 널리 알려진 상황일 것입니다. 야이로도 아마 이 일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지하는 마음으로 엎드린 것입니다. 간절함이 겸손을 낳는다고 한번 써 보았습니다. 간절함이 있으면 겸손해집니다. 새도 자식을 지킬 때 보면 겸손해집니다. 막 날지 않고 조금씩 납니다. 자연의 새도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울 때는 마구 날지 않고 조심합니다. 회당장이 회당장의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딸의 아버지로서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예수님께 무릎을 꿇어 절을 한 것입니다.
딸이 이미 죽은 것처럼 마태와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누가복음은 조금 더 설명하여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라고 하기도 합니다. 설명은 마가복음이 더 자세하고 누가복음은 뭔가 부연 설명이 더 들어 있습니다. 아마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가시기 시작할 때는 살았으나 가는 중 딸이 이미 죽은 상황을 말할 수 있습니다. 야이로는 마태복음에서는 다 끝났다고 체념하는 것처럼, 마가복음에서는 존재가 멸절하는 것으로 절망감을, 누가복음에는 죽어 가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다만 완전히 죽음이 끝나지는 않은 것처럼 써 있습니다. 죽는 병이 맞습니다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절박함이 보이는 것입니다. 유일한 혈육인 딸이 죽어 가고 사실상 죽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방법을 다 써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법이 없다라고 볼 수도 있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급성의 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병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장 교통사고가 난 것과 같은 일은 아닙니다. 하루 이틀이라도 앓다가 의식이 없어진 상태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세 복음서를 묶어서 보면 야이로가 예수께 '오시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의 신앙은 백부장의 신앙보다는 못하다고 기록했습니다. 백부장은 오지 않으셔도 낫겠다고 했는데 야이로는 오시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손을 얹어 달라고 했는데 이 안수는 권능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반드시 주님이 손을 얹어서 낫게 한다기보다 이 당시에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할 때 손을 얹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그저 예수님께 그의 큰 권능을 기대하는 큰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나타났습니다. 니고데모가 관리 중 처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자인데 이 사람들이 나중에 로마 황제까지 예수를 믿게 되는 디딤돌일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어쨌거나 밤에 왔습니다. 절박함이 적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낮의 눈을 피해 밤에 왔으니 말입니다. 어쨌거나 야이로는 믿음이 약하다고 우리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