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누가복음에만 특별히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 22:61)
주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는 이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주님께서 돌이키셔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자를 보시고 돌이키셔서, 사함을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사랑함도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함이 많아야 사랑함도 많습니다.
‘돌이키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트레포’(στρέφω)입니다. 주님께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주님은 몸을 돌이켜 그를 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은 한 여종과 모닥불과 닭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들을 사용하여 베드로에게 자신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통곡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작고 사소한 신앙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모닥불일 수도 있고 닭의 울음일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던 때에 어디에선가 종소리가 들리고, 그 자리에서 가슴을 치며 울고 주님을 붙들고 뒹굴었던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기억과 작은 일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돌이키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주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부인에 사용된 헬라어는 ‘아르네오마이’(ἀρνέομαι)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부인에는 그보다 더 강한 ‘아파르네오마이’(ἀπαρνέομαι)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하여 더욱 강하게 부인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몸을 돌이켜 보시는데,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부인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은 먼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고, 그다음에는 주님의 긍휼의 시선을 바라보게 합니다.
‘부인한다’는 말의 반대는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여기에서 ‘시인한다’는 말은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έω)인데, 같은 말을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인한다는 것은 주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I am.”이라고 하시면 우리도 “I am.”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은 환난 가운데서도, 붙잡혀 가시는 가운데서도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숨기지 않으시고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일인칭의 존재가 되시며, 우리가 어떤 목적어를 붙여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만유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목적어를 붙여 기도를 제한하지 말고, 그저 “주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그렇게 부르면 성령의 역사로 그 뒤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힘들수록 더욱 “주여”라고 부르면 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주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έω), 곧 시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에만 특별히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 22:61)
주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는 이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주님께서 돌이키셔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자를 보시고 돌이키셔서, 사함을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사랑함도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함이 많아야 사랑함도 많습니다.
‘돌이키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트레포’(στρέφω)입니다. 주님께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주님은 몸을 돌이켜 그를 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은 한 여종과 모닥불과 닭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들을 사용하여 베드로에게 자신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통곡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작고 사소한 신앙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모닥불일 수도 있고 닭의 울음일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던 때에 어디에선가 종소리가 들리고, 그 자리에서 가슴을 치며 울고 주님을 붙들고 뒹굴었던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기억과 작은 일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돌이키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주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부인에 사용된 헬라어는 ‘아르네오마이’(ἀρνέομαι)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부인에는 그보다 더 강한 ‘아파르네오마이’(ἀπαρνέομαι)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하여 더욱 강하게 부인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몸을 돌이켜 보시는데,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부인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은 먼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고, 그다음에는 주님의 긍휼의 시선을 바라보게 합니다.
‘부인한다’는 말의 반대는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여기에서 ‘시인한다’는 말은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έω)인데, 같은 말을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인한다는 것은 주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I am.”이라고 하시면 우리도 “I am.”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은 환난 가운데서도, 붙잡혀 가시는 가운데서도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숨기지 않으시고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일인칭의 존재가 되시며, 우리가 어떤 목적어를 붙여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만유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목적어를 붙여 기도를 제한하지 말고, 그저 “주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그렇게 부르면 성령의 역사로 그 뒤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힘들수록 더욱 “주여”라고 부르면 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주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έω), 곧 시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