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
1) 첫 번째 불순종
본문 말씀의 주인공은 사무엘도 사울도 아닙니다. 사실상 하나님이십니다. 연초에 긍정적인 본문을 잡고 싶었지만 그래도 본문은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보고자 합니다. 사울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키도 크고 준수하게 생겼습니다. 자기 생업에도 철저했고 효도도 했고 겸손하기도 했습니다. 베냐민 지파, 자신의 지파에 대해 별 볼일 없다고 표현했으며 기름을 부으러 가니 짐꾸러미 뒤에 숨기도 했습니다. 특히 10장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했고 새 사람이 되었고 새 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장 7절에는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하는 질문입니다. 사울이 구원을 받았을까요. 불과 이런 표현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몇 장 뒤에 사울에 대한 정반대의 표현이 나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질 때부터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왕에 대한 요구 등으로 볼 때 불안한 요소가 있기는 했습니다. 사울에 대해 하나님은 크게 두 가지 일을 책잡으십니다. 하나는 블레셋과의 전투, 나머지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의 일입니다. 블레셋은 해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고 아말렉은 더 밑에서 내려온 자들인데 강대하고 잔인한 민족들입니다. 두 전쟁에서 다 이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 다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긴 전쟁에서 정작 사울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첫 번째 밋마스 전투에서 블레셋이 올라옵니다. 이에 대해 사울이 먼저 전쟁을 하기 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로 합니다. 제사는 모두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제사를 사무엘이 드리게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칠 일 동안 기다려도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먼저 흩어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블레셋 사람들은 점점 밋마스라는 도시로 근접해 옵니다. 그러나 성경의 표현으로 부득이하게 번제와 화목제 중 번제를 먼저 사울이 직접 드리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거 아닙니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해서는 철저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썩은 물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흠 없고 점 없는 말씀 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전쟁을 이기게 하시는데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열한 시 오십구 분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사람들도 떠나고 적들도 몰려옵니다. 십자가에 흑암이 몰려들었을 때 주님이 '다 이루었다' 하면서 죽으시듯 항상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다려도 안 되니 뭐 어떻겠습니까' 하면서 이를 어기는 것입니다. '부득이하게' 입니다. '부득이하게'라는 것이 진정 그렇습니다.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망령되이 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씀이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맞는 자를 찾는다고 하십니다. 전쟁은 이깁니다. 그러나 사울은 망령되이 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2) 두 번째 불순종
이어서 나오는 아말렉과의 전투입니다. 이 전투도 분명히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데 그들의 소유를 남기지 말고 모든 짐승과 아이들까지 다 죽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적 상황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잔인하신 하나님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아말렉을 완전히 없애라고 하나님이 명령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이 전투에서 사울과 백성이 먼저 그 아말렉 왕을 살려 놓습니다. 그리고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기름진 것, 어린양의 좋은 것을 남겨 둡니다. 나중에 그 이유로 사울이 말하길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여 아말렉을 진멸하였으나 제사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겼다고 말입니다.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 다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제사 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겼다고 변명을 하니 본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두 번이나 후회하셨다는 말을 쓰십니다. 15장 11절과 31절입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이 나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그리고 이어지는 23절은 거역한 것이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우상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 하나님을 내가 조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예배드리고 내 기분대로 헌신하는 것이 바로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마음, 육체에 속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사울의 변덕
'사울의 정신분석'이라는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 사울이 한마디로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라는 책입니다. 사울에 대해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전쟁할 때 금식을 선포하고 어기면 죽일 것이라고 하는 등 열심을 보입니다. 법궤도 가져옵니다. 그런데 금식을 선포할 때 아들 요나단이 꿀을 찍어 먹으니 죽이지 않습니다. 법궤도 그렇습니다. 전쟁 중에 제단도 쌓습니다. 이런 사울의 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모습으로는 자기 마음대로 살려 놓고 나중에 예배드리겠다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열심이 있는데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사무엘이 없어지니 미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접한 무당을 찾아 사무엘을 찾아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그 약속은, 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 16:14). 여기서 말할 바는 아니지만 사울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교훈하시고자 하나님이 이 일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기록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중심이 합한 자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대할 때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사랑했다 하면서도 창으로 죽이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지켜야 할 군대를 풀어 사위를 잡으러 쫓아다닙니다. 사위 뽑을 때도 얼마나 시험을 거쳐 좋은 자로 뽑았습니까? 왜 사울이 이렇게 다윗을 죽이려 했을까요? 성경은 사울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즉 자기를 떠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적 시기심입니다(삼상 18:28-29). 사울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심을 알아서 더욱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더욱 무릎을 꿇고 함께 '아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위와 함께 하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4.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다윗
다윗은 쫓겨 갔습니다. 해변가에 있는 가드의 왕, 블레셋 쪽으로 도망칩니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 그 땅으로 쫓겨서 도망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노래가 퍼집니다. 그러니 다윗을 죽이려 하는데 다윗이 이를 면하기 위해 미친 척을 합니다. 그래서 압둘라 굴로 도망칩니다. 그때 지은 시편이 56편입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유리함을 계수하셨다는 것은 도망 다닌 거리를 아신다는 말입니다. 내 눈물을 업신여기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내 눈물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시적인 표현입니다. 다윗은 구약에서 가장 많이 도망다닌 사람입니다. 신약에서는 바울입니다. 성경에서 길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이 말을 한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같은 장 4절에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시 56:4; 10). 즉,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눈물 흘리며 유리하며 애쓴 것을 주의 책에 기록하라고 한 것이 8절의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말씀을 찬송하고 여호와를 의지한 것은 바로 말씀을 지킨 것을 의미합니다. 압둘람의 굴에서 다윗이 잡은 것은 말씀입니다. 내가 죽고 싶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찬송할지어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시편이 바로 56편이 바로 그때 쓴 글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
1) 첫 번째 불순종
본문 말씀의 주인공은 사무엘도 사울도 아닙니다. 사실상 하나님이십니다. 연초에 긍정적인 본문을 잡고 싶었지만 그래도 본문은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보고자 합니다. 사울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키도 크고 준수하게 생겼습니다. 자기 생업에도 철저했고 효도도 했고 겸손하기도 했습니다. 베냐민 지파, 자신의 지파에 대해 별 볼일 없다고 표현했으며 기름을 부으러 가니 짐꾸러미 뒤에 숨기도 했습니다. 특히 10장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했고 새 사람이 되었고 새 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장 7절에는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하는 질문입니다. 사울이 구원을 받았을까요. 불과 이런 표현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몇 장 뒤에 사울에 대한 정반대의 표현이 나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질 때부터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왕에 대한 요구 등으로 볼 때 불안한 요소가 있기는 했습니다. 사울에 대해 하나님은 크게 두 가지 일을 책잡으십니다. 하나는 블레셋과의 전투, 나머지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의 일입니다. 블레셋은 해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고 아말렉은 더 밑에서 내려온 자들인데 강대하고 잔인한 민족들입니다. 두 전쟁에서 다 이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 다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긴 전쟁에서 정작 사울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첫 번째 밋마스 전투에서 블레셋이 올라옵니다. 이에 대해 사울이 먼저 전쟁을 하기 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로 합니다. 제사는 모두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제사를 사무엘이 드리게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칠 일 동안 기다려도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먼저 흩어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블레셋 사람들은 점점 밋마스라는 도시로 근접해 옵니다. 그러나 성경의 표현으로 부득이하게 번제와 화목제 중 번제를 먼저 사울이 직접 드리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거 아닙니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해서는 철저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썩은 물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흠 없고 점 없는 말씀 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전쟁을 이기게 하시는데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열한 시 오십구 분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사람들도 떠나고 적들도 몰려옵니다. 십자가에 흑암이 몰려들었을 때 주님이 '다 이루었다' 하면서 죽으시듯 항상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다려도 안 되니 뭐 어떻겠습니까' 하면서 이를 어기는 것입니다. '부득이하게' 입니다. '부득이하게'라는 것이 진정 그렇습니다.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망령되이 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씀이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맞는 자를 찾는다고 하십니다. 전쟁은 이깁니다. 그러나 사울은 망령되이 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2) 두 번째 불순종
이어서 나오는 아말렉과의 전투입니다. 이 전투도 분명히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데 그들의 소유를 남기지 말고 모든 짐승과 아이들까지 다 죽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적 상황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잔인하신 하나님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아말렉을 완전히 없애라고 하나님이 명령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이 전투에서 사울과 백성이 먼저 그 아말렉 왕을 살려 놓습니다. 그리고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기름진 것, 어린양의 좋은 것을 남겨 둡니다. 나중에 그 이유로 사울이 말하길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여 아말렉을 진멸하였으나 제사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겼다고 말입니다.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 다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제사 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겼다고 변명을 하니 본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두 번이나 후회하셨다는 말을 쓰십니다. 15장 11절과 31절입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이 나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그리고 이어지는 23절은 거역한 것이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우상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 하나님을 내가 조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예배드리고 내 기분대로 헌신하는 것이 바로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마음, 육체에 속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사울의 변덕
'사울의 정신분석'이라는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 사울이 한마디로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라는 책입니다. 사울에 대해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전쟁할 때 금식을 선포하고 어기면 죽일 것이라고 하는 등 열심을 보입니다. 법궤도 가져옵니다. 그런데 금식을 선포할 때 아들 요나단이 꿀을 찍어 먹으니 죽이지 않습니다. 법궤도 그렇습니다. 전쟁 중에 제단도 쌓습니다. 이런 사울의 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모습으로는 자기 마음대로 살려 놓고 나중에 예배드리겠다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열심이 있는데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사무엘이 없어지니 미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접한 무당을 찾아 사무엘을 찾아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그 약속은, 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 16:14). 여기서 말할 바는 아니지만 사울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교훈하시고자 하나님이 이 일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기록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중심이 합한 자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대할 때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사랑했다 하면서도 창으로 죽이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지켜야 할 군대를 풀어 사위를 잡으러 쫓아다닙니다. 사위 뽑을 때도 얼마나 시험을 거쳐 좋은 자로 뽑았습니까? 왜 사울이 이렇게 다윗을 죽이려 했을까요? 성경은 사울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즉 자기를 떠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적 시기심입니다(삼상 18:28-29). 사울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심을 알아서 더욱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더욱 무릎을 꿇고 함께 '아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위와 함께 하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4.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다윗
다윗은 쫓겨 갔습니다. 해변가에 있는 가드의 왕, 블레셋 쪽으로 도망칩니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 그 땅으로 쫓겨서 도망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노래가 퍼집니다. 그러니 다윗을 죽이려 하는데 다윗이 이를 면하기 위해 미친 척을 합니다. 그래서 압둘라 굴로 도망칩니다. 그때 지은 시편이 56편입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유리함을 계수하셨다는 것은 도망 다닌 거리를 아신다는 말입니다. 내 눈물을 업신여기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내 눈물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시적인 표현입니다. 다윗은 구약에서 가장 많이 도망다닌 사람입니다. 신약에서는 바울입니다. 성경에서 길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이 말을 한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같은 장 4절에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시 56:4; 10). 즉,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눈물 흘리며 유리하며 애쓴 것을 주의 책에 기록하라고 한 것이 8절의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말씀을 찬송하고 여호와를 의지한 것은 바로 말씀을 지킨 것을 의미합니다. 압둘람의 굴에서 다윗이 잡은 것은 말씀입니다. 내가 죽고 싶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찬송할지어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시편이 바로 56편이 바로 그때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