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18. 목요일 묵상 | 4.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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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명한 것보다 더 잘 복종하는 생각입니다. 시각이 나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기보다 사람을 보면 절대주의에서 상대주의로 흐릅니다. 신학교 들어가기 전 혹은 1학년 때 하나님만 바라는 절대주의이다가 2, 3학년 때 기숙사 살다 보면 이 사람 저 사람 서로 보며 자기들끼리 비교하며 상대주의로 흐릅니다. 남보다 조금 더 많이 기도하면 그것으로 자기 의를 삼습니다. 이사야서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얘기하지만 마음은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많이 하는 것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라는 것만 하길 기뻐하십니다. 더 많이 할 것이 사실 없습니다. ‘기본은 됐으니 그 다음 것을 해 봅시다’ 하는 바로 그 마음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마음이 온전하지 않으면 입술이 움직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입술을 다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마음을 다한다고 하면 상한 심령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다 했는데 입술로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입술로 자랑하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한다면 울며 씨를 뿌리고 눈물로 씨를 뿌리고, 정말 주를 위해 애쓴다면 그렇게 합니다. 넘치게 많이 했다고 자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에 무익한 종이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없습니다. 
     쫓길 것이 없습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아멘 하면 됩니다. 스스로 옳다 하는 바로 실족하면 안 됩니다. 그것으로 실족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것밖에 안된다는 마음으로도 실족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두 누더기입니다. 목사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애통한 눈물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금식을 얼마나 더 하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마음의 애통함이 본질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계명은 위선입니다. 중심이 하나님께 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 마음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해 자원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상한 마음을 주님이 받으십니다. 우리의 이런 기도는 애통의 신음일 뿐 자랑의 도구가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