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 말씀을 읽으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직 십자가는 남아 있습니다. 아직 붙잡히지도 않으셨고, 죽으시지도 않으셨으며, 부활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내가 이루었다”고 기도하십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바로 서원의 기도이며, 미래를 과거형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요한복음 17장에서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십자가의 사역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선포하실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는 기도로 “이루었다”고 하시고,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실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십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주님의 완료형 기도’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배워야 할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미래를 놓고 하나님과 흥정하듯 기도하기 쉽습니다. “이것을 해 주시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먼저 감사하십니다.
설교자는 우리도 이런 기도를 배워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이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용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자녀를 붙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눈앞에 이루어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는 기도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왜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완전한 영광 가운데 계신 분입니다. 창세 전부터 성부와 함께 영광을 가지셨고,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족한 영광을 더 얻기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속의 사역을 끝까지 완성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대속물로 드리고, 십자가를 지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 곧 아들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는 기도는 곧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이루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와 같은 의미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높아지고 인정받게 해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끝까지 감당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영광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참된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우리에게 가장 복된 삶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기도의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설명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그 사역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기에서 설교자는 예수님의 통치가 세상의 통치와 전혀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세상의 왕은 명령하고 지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베푸시는 왕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제사장으로서는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시고, 왕으로서는 자기 자신을 백성에게 주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신 후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자기 생명을 교회 가운데 나누어 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통치입니다.
그러므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란 사람을 억압하거나 명령하는 권세가 아니라 영생을 베푸시는 권세입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은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통치이며, 성령을 통하여 백성을 살리시는 통치입니다.
설교자는 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주님의 권세는 베푸심의 권세입니다.
태양의 권세가 따뜻한 빛을 비추는 데 있듯이, 그리스도의 권세는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베푸시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 통치를 받는 백성입니다.
그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억압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무엇인가를 더 얻기 위하여 애쓰는 삶이 아니라 이미 주신 그리스도를 더욱 풍성히 누려 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왕의 통치가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신약 교회가 세워졌고,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바라보셨던 그 역사가 사도행전에서 시작되었고,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 말씀을 읽으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직 십자가는 남아 있습니다. 아직 붙잡히지도 않으셨고, 죽으시지도 않으셨으며, 부활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내가 이루었다”고 기도하십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바로 서원의 기도이며, 미래를 과거형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요한복음 17장에서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십자가의 사역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선포하실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는 기도로 “이루었다”고 하시고,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실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십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주님의 완료형 기도’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배워야 할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미래를 놓고 하나님과 흥정하듯 기도하기 쉽습니다. “이것을 해 주시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먼저 감사하십니다.
설교자는 우리도 이런 기도를 배워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이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용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자녀를 붙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눈앞에 이루어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는 기도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왜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완전한 영광 가운데 계신 분입니다. 창세 전부터 성부와 함께 영광을 가지셨고,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족한 영광을 더 얻기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속의 사역을 끝까지 완성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대속물로 드리고, 십자가를 지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 곧 아들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는 기도는 곧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이루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와 같은 의미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높아지고 인정받게 해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끝까지 감당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영광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참된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우리에게 가장 복된 삶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기도의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설명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그 사역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기에서 설교자는 예수님의 통치가 세상의 통치와 전혀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세상의 왕은 명령하고 지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베푸시는 왕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제사장으로서는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시고, 왕으로서는 자기 자신을 백성에게 주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신 후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자기 생명을 교회 가운데 나누어 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통치입니다.
그러므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란 사람을 억압하거나 명령하는 권세가 아니라 영생을 베푸시는 권세입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은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통치이며, 성령을 통하여 백성을 살리시는 통치입니다.
설교자는 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주님의 권세는 베푸심의 권세입니다.
태양의 권세가 따뜻한 빛을 비추는 데 있듯이, 그리스도의 권세는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베푸시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 통치를 받는 백성입니다.
그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억압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무엇인가를 더 얻기 위하여 애쓰는 삶이 아니라 이미 주신 그리스도를 더욱 풍성히 누려 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왕의 통치가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신약 교회가 세워졌고,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바라보셨던 그 역사가 사도행전에서 시작되었고,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