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11. 목요일 묵상 | 4. 믿음을 찾으시는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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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호수의 폭이 약 6마일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25리쯤 되는데 그중 절반 정도를 간 상황입니다. 그리고 밤 사경입니다. 오병이어 때도 말씀드린 것처럼 한계상황입니다. 날은 저물고 배는 고프고 사람은 많고 먹을 것은 매우 적습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계상황, 악조건입니다. 큰 바람이 불고 그들이 중앙에 이미 가닿았습니다. 그러니까 뭍에 닿으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사경은 새벽 3시에서 6시입니다. 새벽의 잔잔함이 있기 전에 마지막 물결이 많이 칠 때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8장의 기록처럼 주님이 계실 때에도 한 번 배에 풍랑이 몰아친 적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때는 주님이 계셨습니다. 그때조차도 제자들은 놀라 당황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일어나 책망하시고 잠잠히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뉘시길래 바다와 바람도 순종하냐'고 물으며 놀랍니다. 그때 있던 그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본문에서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상 주님을 찾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고, 바로 전날 그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 풍랑을 잠잠케 하신 것을 보고 그에 대해 고백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찾지 않은 것입니다.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나서는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신약 성도가 되었으나 아직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으실 때라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힘들게 노를 젖는 것을 보시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은 주님이 보였을 때입니다. 믿음이 약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성령을 주시고 비로소 그때서야 사방으로 주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라고 파송하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니 사실 더 찾아야 합니다. 마치 주님과 떨어져 있다고 주님을 찾지 않은 제자들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욥 28:25). 주님은 바람의 무게를 정하십니다. 그리고 물의 분량을 정하십니다. 바닷물의 분량도 호수의 분량도 주님이 정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호산나 외치며 주님을 맞이한 그들이 며칠 만에 주님을 잡아 십자가에 매답니다. 이런 일은 성경에 계속 반복됩니다. 인간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구약 백성보다 더 나은 것은 은혜뿐입니다. 자질로는 모두 동일합니다.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은 사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 위라는 것은 하나님이심을, 걸어오신 것은 사람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제자들은 보고 유령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생각을 해 봤습니다. 어쩌면 저도 주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유령이라고 하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소에 주님을 바라고 기다리면 주님이 오실 때 영접하고 모시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밥이 나오면 환호하다 밥이 그치면 주님을 바라지도 찾지도 않고 유령으로 여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본문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어부의 경력도 경험도 노련함도 아닌, 믿음입니다. 마가복음에는 바다를 건너 오신 후 그들을 지나가려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소 난해할 수 있는데, 마치 관심이 없이 지나가는 것처럼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부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환란 날에 여호와를 찾고 부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귀와 감사 가운데 그들에게 그들이 살아가는 은혜의 법을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내 주님을 먼저 부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