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두 번째 비유는 누룩의 비유입니다. 이것도 큰 맥락에서는 겨자씨 비유와 같습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부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풀게만 할 뿐 아니라 부드럽게도, 맛있게도 합니다. 그리고 중화시키는 역할도 있습니다. 누룩이라는 것이 그러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알아야 할 것은 누룩은 그것만으로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촉매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어디에 가서 매질이 있어 작용을 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누룩도 그렇습니다. 누룩을 먹지 않습니다. 누룩으로 부풀려서 구운 빵을 먹는 것입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그러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누룩과 같이 되지 말라고 하여 누룩을 나쁜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누룩과 같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처럼 위선하고 외식하는 것으로 사용하십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누룩을 부정적인 것이 번져갈 때 비유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누룩을 긍정적인 것으로 비유합니다. 누룩이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유월절을 지키게 하십니다. 애굽의 장자와 첫 번째 난 것을 모두 죽이실 때 누룩으로 발효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룩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질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이것이 누룩 비유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절기에서 유월절은 생명, 본질입니다. 그러면 생명이 있는 사람은 누룩이 필요합니다. 누룩이 본질이 되면 안 되지만, 생명, 본질이 있는 사람은 누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다음에 지키는 절기가 오순절입니다. 레위기의 말씀을 보면 이때는 누룩을 넣어서 떡을 구우라고 합니다. 유월절이 없이 오순절이 없습니다. 유월절에는 누룩을 사용하지 않는데 오순절에는 누룩을 넣어 구운 빵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을 무시하고 오순절을 지키면, 복음, 생명이 없는데 문화와 윤리를 이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과 생명이 없는데 윤리와 문화를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윤리와 문화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본질이 없이 그것을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질이 먼저 있어야 누룩이 유용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성경 원어에는 누룩을 ‘감추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겨자씨 비유와 더욱 비슷합니다. 한편 가루 서 말은 150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곧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누룩처럼 감추인 것처럼 존재하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처럼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은밀히 기도하고 경건의 비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하고 애통합니다. 일 년 내내 저도 저를 부족하다고 여기며 싸웁니다. 제가 신자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은밀함이 있습니다. 하늘의 별과 달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찌 그것이 신자입니까. 흐르는 물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찌 우리가 신자입니까. 시편의 만물 창조의 찬미와 예수님의 복음이 따로 있습니까. 까마귀와 까치를 봐도 감추어진 누룩과 같은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흥왕케 하고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 은혜입니다. 매번 애통한 우리가 감사한 것은 내 안에 감추어진 비밀이 있음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자람이 있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믿음에서 기도에서 고백에서 헌신에서 찬송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누룩의 비유입니다. 저는 누룩의 비유가 좋습니다. 어떻게 보면 천대받는 누룩인데 본문을 보면 천대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룩 자체를 금한 것이 아니라 본질을 놓치고 누룩만 찾는 것이 아닐 뿐 본질이 있다면 누룩은 150명을 먹이는 떡을 만들어 냅니다. 누룩과 같은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감추인 것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감추인 역사가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본문의 두 번째 비유는 누룩의 비유입니다. 이것도 큰 맥락에서는 겨자씨 비유와 같습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부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풀게만 할 뿐 아니라 부드럽게도, 맛있게도 합니다. 그리고 중화시키는 역할도 있습니다. 누룩이라는 것이 그러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알아야 할 것은 누룩은 그것만으로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촉매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어디에 가서 매질이 있어 작용을 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누룩도 그렇습니다. 누룩을 먹지 않습니다. 누룩으로 부풀려서 구운 빵을 먹는 것입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그러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누룩과 같이 되지 말라고 하여 누룩을 나쁜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누룩과 같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처럼 위선하고 외식하는 것으로 사용하십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누룩을 부정적인 것이 번져갈 때 비유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누룩을 긍정적인 것으로 비유합니다. 누룩이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유월절을 지키게 하십니다. 애굽의 장자와 첫 번째 난 것을 모두 죽이실 때 누룩으로 발효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룩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질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이것이 누룩 비유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절기에서 유월절은 생명, 본질입니다. 그러면 생명이 있는 사람은 누룩이 필요합니다. 누룩이 본질이 되면 안 되지만, 생명, 본질이 있는 사람은 누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다음에 지키는 절기가 오순절입니다. 레위기의 말씀을 보면 이때는 누룩을 넣어서 떡을 구우라고 합니다. 유월절이 없이 오순절이 없습니다. 유월절에는 누룩을 사용하지 않는데 오순절에는 누룩을 넣어 구운 빵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을 무시하고 오순절을 지키면, 복음, 생명이 없는데 문화와 윤리를 이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과 생명이 없는데 윤리와 문화를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윤리와 문화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본질이 없이 그것을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질이 먼저 있어야 누룩이 유용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성경 원어에는 누룩을 ‘감추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겨자씨 비유와 더욱 비슷합니다. 한편 가루 서 말은 150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곧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누룩처럼 감추인 것처럼 존재하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처럼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은밀히 기도하고 경건의 비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하고 애통합니다. 일 년 내내 저도 저를 부족하다고 여기며 싸웁니다. 제가 신자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은밀함이 있습니다. 하늘의 별과 달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찌 그것이 신자입니까. 흐르는 물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찌 우리가 신자입니까. 시편의 만물 창조의 찬미와 예수님의 복음이 따로 있습니까. 까마귀와 까치를 봐도 감추어진 누룩과 같은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흥왕케 하고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 은혜입니다. 매번 애통한 우리가 감사한 것은 내 안에 감추어진 비밀이 있음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자람이 있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믿음에서 기도에서 고백에서 헌신에서 찬송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누룩의 비유입니다. 저는 누룩의 비유가 좋습니다. 어떻게 보면 천대받는 누룩인데 본문을 보면 천대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룩 자체를 금한 것이 아니라 본질을 놓치고 누룩만 찾는 것이 아닐 뿐 본질이 있다면 누룩은 150명을 먹이는 떡을 만들어 냅니다. 누룩과 같은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감추인 것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감추인 역사가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