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낫게 하시려구요? 그것은 동기입니다. 영생을 주시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래서 중풍병자에게 ‘네 병이 나았다’고 하지 않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느닷없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중풍병자의 병이 죄 때문에 생긴 것으로 말하시는 것인가요?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에게 사람들이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하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도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죄로 인해 병이 생긴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병이 있든 없든 죄 사함을 누구나 받아야 합니다. 병 나아서 온갖 더러운 짓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차라리 아픈 것이 낫습니다. 천국 가는 길이 환히 보이는데 온갖 죄를 지으라고 주님이 낫게 하셨을까요? 건강하면 뛰기도 걷기도 하며, 성전에서 찬송하기도 합니다.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올라갈 때 걷지 못하는 자에게 ’은금이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하니 그가 나아서 뛰면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고 한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포하니 서기관들이 신성모독이라고 합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께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 사함을 선포하면 신성모독이 맞습니다. 주기도문에서 내게 죄 지은 자를 사한다는 것은 죄를 사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 사하신 자의 죄에 대해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4).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신성모독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은 스스로가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창조주이며, 영원한 생명의 말씀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선포를 하는 데에 중풍병자의 침상이 예수님 앞에 뚝 떨어진 것이고, 그가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을 바리새인이 믿지 않고 비난하니 예수님이 둘 중 어느 말이 쉽냐고 물으십니다. 죄 사한다는 말은 표가 안 나므로 오히려 말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을 하신 후 일어나 걸으라고 하십니다. 죄 사함의 선포가 나으라는 선포이고 이제 일어나 걸으면 되는 것입니다. 굳이 병이 나았다고 말할 것이 없습니다. 내 건강이 명예가 예수 앞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앞에’는 공간적 의미와 대면하여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면전에 거하며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낫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할 일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저는 요새 이것을 많이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외에 귀한 가치가 없다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높낮이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이끄심으로 인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야로 생각할 것은 이것입니다. 조건이 어떠하든 그것을 뚫고 하나님께 매일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자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병을 낫게 하시려구요? 그것은 동기입니다. 영생을 주시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래서 중풍병자에게 ‘네 병이 나았다’고 하지 않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느닷없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중풍병자의 병이 죄 때문에 생긴 것으로 말하시는 것인가요?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에게 사람들이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하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도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죄로 인해 병이 생긴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병이 있든 없든 죄 사함을 누구나 받아야 합니다. 병 나아서 온갖 더러운 짓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차라리 아픈 것이 낫습니다. 천국 가는 길이 환히 보이는데 온갖 죄를 지으라고 주님이 낫게 하셨을까요? 건강하면 뛰기도 걷기도 하며, 성전에서 찬송하기도 합니다.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올라갈 때 걷지 못하는 자에게 ’은금이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하니 그가 나아서 뛰면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고 한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포하니 서기관들이 신성모독이라고 합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께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 사함을 선포하면 신성모독이 맞습니다. 주기도문에서 내게 죄 지은 자를 사한다는 것은 죄를 사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 사하신 자의 죄에 대해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4).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신성모독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은 스스로가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창조주이며, 영원한 생명의 말씀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선포를 하는 데에 중풍병자의 침상이 예수님 앞에 뚝 떨어진 것이고, 그가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을 바리새인이 믿지 않고 비난하니 예수님이 둘 중 어느 말이 쉽냐고 물으십니다. 죄 사한다는 말은 표가 안 나므로 오히려 말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을 하신 후 일어나 걸으라고 하십니다. 죄 사함의 선포가 나으라는 선포이고 이제 일어나 걸으면 되는 것입니다. 굳이 병이 나았다고 말할 것이 없습니다. 내 건강이 명예가 예수 앞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앞에’는 공간적 의미와 대면하여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면전에 거하며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낫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할 일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저는 요새 이것을 많이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외에 귀한 가치가 없다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높낮이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이끄심으로 인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야로 생각할 것은 이것입니다. 조건이 어떠하든 그것을 뚫고 하나님께 매일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자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