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인성을 취해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계보로 분명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요셉을 아버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하여 자라셨습니다.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한대 애굽에 피난하셨다가 베들레헴으로 오실까 하다가 나사렛으로 가셔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첫아들입니다. 정혼하고, 즉 약혼한 가운데 잉태했으므로 첫아들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초태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막 6:3).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과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같은 이름이 많았습니다. 이 이름들도 워낙 흔했습니다. 어쨌거나 예수님께도 동생들이 있었고 가정의 일원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이 순종은 십자가에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십자가 위 극한 고통 가운데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가운데에서도 사랑하는 제자, 즉 이 성경을 기록한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맡깁니다. 실제 사도 요한이 마리아를 돌본 것이 이후 성경의 기록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여러 표적을 행하고 죄 사함을 선포하시니 사람들이 미친 자라고 매도하고 폄하했습니다. 특히 그의 친족들도 그를 붙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친족은 친척이든 가까운 이웃이든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본문은 예수를 밴 태가, 즉 마리아가 복되다고 외치는 기록을 씁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눅 11:27).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를 믿는 게 귀하지 예수를 잉태하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복된 것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본래 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녀를 복되다고 부릅니다. 이 땅에 오신 성자 예수님을 잉태했으니 누구라도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경험을 한 것이 맞습니다.
마리아의 뛰어난 점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경건했습니다. 장점이란 마리아에게 배울 점을 가리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 1:37-38, 45). 마리아는 이와 같이 경건한 믿음이 있던 자입니다. 두 번째 장점은 그가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증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잉태했으니 맞는 말입니다.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증인인 것입니다. 마리아의 태에서 예수님이 태동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영양을 공급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에게 복된 것은 이 두 가지 외에는 말하면 안 됩니다. 은혜를 입은 것이고 순종한 것이지 능력이나 자질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이 두 가지 장점보다 더 큰 복은 마리아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칼빈 주석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거듭난 것, 곧 구원받은 것은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잉태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며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녀 안에서 영적으로 사시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뱃속에서 먹인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제1복은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신약시대 백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숭배하거나 경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비성경적인 일입니다. 바로 로마 카톨릭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구원을 누린 자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인성을 취해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계보로 분명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요셉을 아버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하여 자라셨습니다.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한대 애굽에 피난하셨다가 베들레헴으로 오실까 하다가 나사렛으로 가셔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첫아들입니다. 정혼하고, 즉 약혼한 가운데 잉태했으므로 첫아들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초태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막 6:3).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과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같은 이름이 많았습니다. 이 이름들도 워낙 흔했습니다. 어쨌거나 예수님께도 동생들이 있었고 가정의 일원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이 순종은 십자가에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십자가 위 극한 고통 가운데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가운데에서도 사랑하는 제자, 즉 이 성경을 기록한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맡깁니다. 실제 사도 요한이 마리아를 돌본 것이 이후 성경의 기록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여러 표적을 행하고 죄 사함을 선포하시니 사람들이 미친 자라고 매도하고 폄하했습니다. 특히 그의 친족들도 그를 붙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친족은 친척이든 가까운 이웃이든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본문은 예수를 밴 태가, 즉 마리아가 복되다고 외치는 기록을 씁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눅 11:27).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를 믿는 게 귀하지 예수를 잉태하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복된 것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본래 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녀를 복되다고 부릅니다. 이 땅에 오신 성자 예수님을 잉태했으니 누구라도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경험을 한 것이 맞습니다.
마리아의 뛰어난 점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경건했습니다. 장점이란 마리아에게 배울 점을 가리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 1:37-38, 45). 마리아는 이와 같이 경건한 믿음이 있던 자입니다. 두 번째 장점은 그가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증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잉태했으니 맞는 말입니다.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증인인 것입니다. 마리아의 태에서 예수님이 태동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영양을 공급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에게 복된 것은 이 두 가지 외에는 말하면 안 됩니다. 은혜를 입은 것이고 순종한 것이지 능력이나 자질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이 두 가지 장점보다 더 큰 복은 마리아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칼빈 주석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거듭난 것, 곧 구원받은 것은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잉태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며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녀 안에서 영적으로 사시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뱃속에서 먹인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제1복은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신약시대 백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숭배하거나 경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비성경적인 일입니다. 바로 로마 카톨릭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구원을 누린 자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