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1. 목요일 묵상 | 4.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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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관에 손을 대시니 관이 섰다고 기록합니다. 장례라는 것이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이 관에 손을 대니 그 관이 선 것은 주님의 은혜와 신령한 손길이 미친 것을 의미합니다. 혈루병 환자가 주님께 손을 댔을 때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관을 옮기던 자들에게 은혜의 역사와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곧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달리다쿰’,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쿰’은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아람 지방의 표현에 더 맞추어진 말입니다. 본문은 ’에게르떼띠‘라고 해서 과거형을 썼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대해서는 현재형을 썼습니다. 과거형을 썼다는 것은 더 큰 확신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청년이라는 것은 아이가 아닌 성장한, 그러나 아주 어른은 아닌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슬퍼하지 말고 더 이상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는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힘을 얻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명령이 떨어지니 뼈가 서로 상합하고 힘줄이 붙고 가죽이 덮히고 군대가 되듯 생기의 명령, 생명, 피, 빛의 명령을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명령입니다. 아무도 세상은 생명을 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도 철학도 생명과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문은 퇴보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양심과 도덕이 더 퇴보합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아닙니다. 세태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빛입니다. 생명이자 능력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명하시면 의롭게도 거룩하게도 되고 살아나기도 낫기도 하고 죽었던 아이가 낫기도 하고 먹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권능입니다. 생명이신 분만이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입술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눈과 입과 귀가 열립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 37: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듣는 자는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살아날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네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일어나 걸어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청년에게 말하신 것입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 “내”가 누굽니까? “내”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눅 7:13). 예수님을 ‘주’(퀴리오스)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많이 쓰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부르신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 3:15).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데 안식일의 주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주일이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이신 주님을 주일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풍랑도 잠잠해지고 마귀 사탄도 복종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반석이 깨져서 물이 나옵니다. 반석은 주님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주님이 그 반석을 열어 젖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죽기까지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나님이 아들에 대한 사랑, 본문의 과부와 독자를 향한 사랑을 통해 그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간구도 없습니다. 완전히 절망한 것입니다. 나사로 때도 ‘빨리 왔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한, 야이로 회당장의 딸 때도 ‘오지 마소서’라고 한, 그런 상황입니다. 이미 관에 들어간 시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이 상태입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에게 이미 일어났다고, 살아났다고 선포하십니다. 손에 뭔가 들고 주님께 나아가지 마십시오. 빈 손으로 손을 들고, 모세와 같이 신을 벗고, 전쟁을 앞두고 할례를 시키신 것처럼, 완전 무방비 상태로 주님 앞에 나가십시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원이 되십니다. 바로 그때가 하나님이 성취하시는 때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대 무의 상태를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어 다 이루셨다, 전부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 완전히 유기당하신 주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 성도들은 내 것으로 찾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저 같은 경우 뭐를 가르쳐야 하나, 매번 내 것을 찾습니다. 제가 요즘 책을 두 권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글 쓰는 가운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알게 하시고 감당케 하십니다. 내게 뭔가 있다고 하면 손이 안 돌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면 됩니다. 자식이 죽고 눈물을 흘리는 그것을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상실과 절망 입니다. 과부이지만 그나마 자식 보고 살았는데 그 자식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하나님이 살려주십니다. 누가는 의사여서 특별히 그런 표현들이 더 정교한 것 같습니다. 긍휼은 창자를 꺼내듯 슬퍼한다는 말인데 이것을 체휼, 몸으로 같이 슬퍼한다는 것으로 쓴 것이 그런 것입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눅 1:76-78). 사가랴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찬송을 합니다. “돋는 해”는 ‘아나톨레’, 동쪽에서 뜨는 해를 의미합니다. 바로 78절, 하나님의 긍휼은 바로 ‘창자’, ‘내장’을 의미합니다.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다른 곳에 많이 나오지만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으로 ‘저들의 죄를 저들이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것도 같은 체휼의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에 대해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대적들은 두려워하지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대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