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사람에 속한 겉사람 | 고후 4:16-18 | 문병호 목사 | 새 것 ・ 거듭난 것 ・ 값으로 사신 것 12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10718
조회수 2040
속사람에 속한 겉사람 | 고후 4:16-18 | 문병호 목사 | 새 것 ・ 거듭난 것 ・ 값으로 사신 것 12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107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녹취록>
1. 육신을 가진 인간
참으로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저도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이런 전염병이라는 것을 실감한 것은 처음입니다. 들어보기는 했고 어릴 때 동네에서 누가 많이 죽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바는 있습니다만 실제로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창궐한 것을 본 것은 처음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바이러스로 이렇게 오래까지 전 세계가 영향을 받는 일들이 있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요새 전염병이야 어느 정도 예측하고 백신도 있지만 이전에는 전염병이 걸리면 불태워 버리거나 하는 식으로 자연적인 소멸 방법을 사용했지 백신 같은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고 특히 유아들이 알지 못하는 질병으로 많이 죽어 갔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과연 유익한 것인지 말입니다. 육신이 평소에는 유익합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오감이 있어서 여러가지도 느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프게 되면 고통스럽습니다. 육신이 없으면 아픈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2. 육체에 관한 고대 철학: 벗고자 함
그러니 철학자들은 옛날부터 육신이 무엇이고 영혼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고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세부적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큰 관점에서는 육체가 저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죽고 나면 빨리 떨쳐 버리고 영혼으로만 살게 되니 그때는 고통이 없다는 식으로 영혼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영혼을 또 나누어서 혼에 속한 것과 영에 속한 것을 구분했습니다. 영에 속한 것은 신과 같은 것으로 해탈하여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혼에 속한 것은 짐승과 같은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신과 같이 된다는 개념이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해탈(니르바나), 즉 윤회를 끊고 신의 세계로 올라간다는 세계관을 가진 것입니다. 육체는 저급하므로 무시하고 함부로 사용해도 된다고 하는 것이 생기는데 바로 퇴폐철학입니다. 예술을 하고 철학을 하는 고상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중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깊이 빠진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어거스틴이었습니다. 그도 회심하기 전에는 이런 사상에 빠져 온갖 음란과 방탕에 빠졌었습니다. 당시 철학이 그랬습니다. 마니교라고 육체를 경시하고 영혼만 중요시하는 그런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퇴폐주의가 어떻게 보면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철학자들, 불교, 유교, 도교, 모든 이방신을 섬기는 족속들은 부활의 개념이 없습니다. 육체는 빨리 떨쳐 버려야 하는 것, 빨리 소멸시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혼의 세계로 넘어가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3. 육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입고자 함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땅에 있는 장막 집은 곧 육체라고 할 수 있고 이 몸이 무너지면 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장 4절이 말합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여기서 탄식은 일차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육체를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덧입고자 한다고 합니다. 세상 철학과 정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병이 들고 고난이 생길 때 육신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덧입고자 한다고 선언합니다.
4.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
그렇다면 어떻게 육체를 덧입느냐, 바로 후반부에 나오는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을 육체가 생명에 삼켜서 죽지 않은 육체로 입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앞절에 보면 '우리가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소위 어렵다는 구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육신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체, 생명에 삼키는 육신을 덧입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부활 전에 잠시 이 땅에서 없어질 수 있으나 끝내 육체의 부활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1) 육체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는 삶
고린도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많은 육체의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신의 부활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죄의 삯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의미할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11절에서도 같이 말합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이 말씀들은 우리 삶 전체, 죽음과 육신의 의미를 전망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10절과 11절에 연속으로 나오듯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이 육신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은 육신을 벗어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육신에 예수의 생명을 덧입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4절과 5절에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내 육체가 예수의 생명으로 덧입으려고 지금 육체 가운데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 육체가 예수의 생명을 덧입는 부활
우리 기독교에는 이 몸이 없어지면 좋겠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생명의 몸을 덧입기 위한 과정으로 육신의 과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몸에 덧입는 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예수를 살리신 것과 같이 우리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육신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육신 가운데 당하는 고난으로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누가 사나운 짐승의 광야를 지나 선교하러 가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는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책을 읽을 때에는 고상한 척 하다가 육신으로는 흥청망청 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이 있을지라도 쌓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화살이 나를 죽여도 나는 부활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영적 압박감, 불안함, 근심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또한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박해하고 내다버려도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받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5. 겉사람과 속사람
1)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짐
본문의 16절에서 18절은 4장과 5장을 같이 아우르는 우리 인생의 큰 주제입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겉사람과 속사람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새로워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낡아집니다.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좋고 비싼 것이라고 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녹슬고 헤집니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워낙 이런 말을 많이 쓰니 쉬운 것 같으나 세상에 날로 새로워지는 것은 사실상 없습니다. 그런데 속사람은 뭐길래 날로 새로워집니까. 이 겉사람은 환란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경은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함으로 규정합니다. 바울처럼 많은 고난을 당한 자가 성경에 없습니다. 태장, 돌, 강도, 시내, 광야, 바다 등 보통의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의 고난을 합친 것처럼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환란의 경함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앙인이 바로 이렇습니다. 겉사람에 속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고난을 지극히 크고 중한 영원한 것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이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처럼 겉사람을 내팽개치고 속사람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겉사람이 속사람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겉사람이 극심한 환란을 당할지라도 그것이 경한 것은 지극히 크고 영광스러운 것을 이루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속사람에 속한 겉사람으로 정한 것입니다. 거듭난 나는 내 실체인 속사람을 이루는 과정으로 겉사람의 고난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에게 육신이 짐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을 모두가 겪을 것입니다. 육체의 것이 영의 것에 방해가 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속사람에 속한 것으로서 영원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되 그것이 영과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으로 영원히 연결되는 것입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은 사실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속사람이 없습니다. 겉사람으로만 삽니다. 그러니 끝내는 낙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잘 나갈 때는 좋습니다. 사업을 하고 이윤을 남기자고 합니다. 그런데 육신이 후패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낙심합니다. 너무 불쌍합니다. 육신이 매고 있어 정신은 말짱한데 그것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속사람에 매입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거듭난 속사람 안에 겉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것, 주와 함께 고난당하는 것(롬 8:17),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갈 2:20)이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답답합니다. 그러나 영광을 받기 위한 고난으로 이것을 바라보게 되면 고난이 경함이 되는 것이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인해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뭔가 우리가 주를 위해 죽었다고 하면 성도가 낙심할까봐 바로 뒤이어 그리스도가 이를 위하여 다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로마서에도 고린도후서에도, 갈라디아서에도 나옵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겉사람과 속사람입니다.
겉사람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겉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속사람의 온전함을 이루는 키입니다. 제가 어디에선가 최근에 본 적이 있습니다. 내 몸을 썩게 두지 말고 닳아서 없어지게 하자고 말입니다. 자전거 튜브도 두 달만 안 쓰면 고무가 삭습니다. 내 몸을 썩게 두지 말고 닳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안 쓰면 썩습니다. 신발은 열심히 신으면 닳아서 반질반질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자전거 튜브도 삭아 버립니다. 심지어 칼도 그렇습니다. 썩게 만들지 말고 닳게 만드는 것입니다. 닳아서 없앨 때까지 사용해서 조금 덜 쓰면 더 살지 않겠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닳도록 살면 하나님 때까지 더 많이 살게 하실 것입니다. 닳게 사는 것이 오래 사는 것입니다. 쓰지도 않고 아껴 두고 내 몸을 가꾸면 썩습니다. 막 닳게 살아야 오래 삽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육신이 닳도록 기도에 더 애씁니다. 세상에서는 에너지를 쓰면 빨리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르겠습니다. 육신이 닳도록 살면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3) 겉사람이 속사람에 들어옴
겉사람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의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체가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 지금 우리는 이 생명의 부활, 복된 부활의 인침을 이미 우리 몸에 받았습니다. 부끄러운 부활이 아니라 말입니다. 지금 연약함이 있습니다. 죄도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 몸에 이 부활의 인침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난을 받은 것으로 비난도 받고 사도 됨에 대해 의심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겉사람을 그냥 두면 죄의 법을 섬깁니다. 그러나 속사람 안에 겉사람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7:22). 죄 지으려고 기도하는 사람 아무도 없지요? 그러면 됐습니다. 크게 하나님의 길에 서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러면 된 것입니다.
4) 육신의 약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능력을 누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금도 은도 돌도 나무도 아닌, 그저 흙으로 만든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몸에 보배를 가졌으니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보배가 그리스도의 빛,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 칼빈은 미래를 묵상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미래를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살 것, 그 생명의 의인의 복된 부활, 첫째 부활을 바라보며 우리가 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육신의 것으로 자랑할 것으로는 자기도 많다고 합니다. 그린도후서 11장 22절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인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사십 대를 맞으면 죽으니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맞은 것입니다. 태장을 세 번 맞습니다. 한 번만 맞아도 산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데반과 같이 돌에 맞았습니다. 세 번 파선했습니다. 제주도 가다가 세 번이나 배가 망가져서 빠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무조각을 안고 바다에 사흘간 떠 있었습니다. 강도를 당했습니다. 이 사도 바울을 보고 내가 주를 위해 고난 당한다고 누가 쉽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일이 그의 몸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그 몸으로 삼층천도 갑니다. 전부 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환란 당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요, 삼층천을 간 것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세 번이나 바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는 이런 것을 자랑하나, 그러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많이 하니 어쩔 수 없이 나도 말을 하지만,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 곧 은혜를 자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약한 것을 자랑해야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뭅니다. 내가 건강하면 왜 의사가 필요합니까.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사도 바울의 논법은 항상 이와 같습니다. 전부 그리스도의 것을 말합니다. 육신 가운데 십자가를 단단히 붙잡고 주 앞에 찬양할 때까지 이기며 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단단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 쓰고서 주 앞에 찬양할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셨네." 이번 주에는 이 찬송을 부르며 살길 바랍니다.
6. 결론
세 가지를 말씀드리며 마치고자 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고(롬 1:17), 은혜 위에 은혜요(요 1:16),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고후 3:18), 이 세 가지를 묵상하며 속사람으로 겉사람을 사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속사람에 속한 겉사람 | 고후 4:16-18 | 문병호 목사 | 새 것 ・ 거듭난 것 ・ 값으로 사신 것 12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107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녹취록>
1. 육신을 가진 인간
참으로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저도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이런 전염병이라는 것을 실감한 것은 처음입니다. 들어보기는 했고 어릴 때 동네에서 누가 많이 죽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바는 있습니다만 실제로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창궐한 것을 본 것은 처음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바이러스로 이렇게 오래까지 전 세계가 영향을 받는 일들이 있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요새 전염병이야 어느 정도 예측하고 백신도 있지만 이전에는 전염병이 걸리면 불태워 버리거나 하는 식으로 자연적인 소멸 방법을 사용했지 백신 같은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고 특히 유아들이 알지 못하는 질병으로 많이 죽어 갔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과연 유익한 것인지 말입니다. 육신이 평소에는 유익합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오감이 있어서 여러가지도 느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프게 되면 고통스럽습니다. 육신이 없으면 아픈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2. 육체에 관한 고대 철학: 벗고자 함
그러니 철학자들은 옛날부터 육신이 무엇이고 영혼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고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세부적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큰 관점에서는 육체가 저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죽고 나면 빨리 떨쳐 버리고 영혼으로만 살게 되니 그때는 고통이 없다는 식으로 영혼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영혼을 또 나누어서 혼에 속한 것과 영에 속한 것을 구분했습니다. 영에 속한 것은 신과 같은 것으로 해탈하여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혼에 속한 것은 짐승과 같은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신과 같이 된다는 개념이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해탈(니르바나), 즉 윤회를 끊고 신의 세계로 올라간다는 세계관을 가진 것입니다. 육체는 저급하므로 무시하고 함부로 사용해도 된다고 하는 것이 생기는데 바로 퇴폐철학입니다. 예술을 하고 철학을 하는 고상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중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깊이 빠진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어거스틴이었습니다. 그도 회심하기 전에는 이런 사상에 빠져 온갖 음란과 방탕에 빠졌었습니다. 당시 철학이 그랬습니다. 마니교라고 육체를 경시하고 영혼만 중요시하는 그런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퇴폐주의가 어떻게 보면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철학자들, 불교, 유교, 도교, 모든 이방신을 섬기는 족속들은 부활의 개념이 없습니다. 육체는 빨리 떨쳐 버려야 하는 것, 빨리 소멸시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혼의 세계로 넘어가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3. 육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입고자 함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땅에 있는 장막 집은 곧 육체라고 할 수 있고 이 몸이 무너지면 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장 4절이 말합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여기서 탄식은 일차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육체를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덧입고자 한다고 합니다. 세상 철학과 정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병이 들고 고난이 생길 때 육신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덧입고자 한다고 선언합니다.
4.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
그렇다면 어떻게 육체를 덧입느냐, 바로 후반부에 나오는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을 육체가 생명에 삼켜서 죽지 않은 육체로 입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앞절에 보면 '우리가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소위 어렵다는 구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육신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체, 생명에 삼키는 육신을 덧입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부활 전에 잠시 이 땅에서 없어질 수 있으나 끝내 육체의 부활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1) 육체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는 삶
고린도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많은 육체의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신의 부활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죄의 삯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의미할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11절에서도 같이 말합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이 말씀들은 우리 삶 전체, 죽음과 육신의 의미를 전망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10절과 11절에 연속으로 나오듯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이 육신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은 육신을 벗어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육신에 예수의 생명을 덧입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4절과 5절에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내 육체가 예수의 생명으로 덧입으려고 지금 육체 가운데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 육체가 예수의 생명을 덧입는 부활
우리 기독교에는 이 몸이 없어지면 좋겠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생명의 몸을 덧입기 위한 과정으로 육신의 과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몸에 덧입는 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예수를 살리신 것과 같이 우리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육신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육신 가운데 당하는 고난으로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누가 사나운 짐승의 광야를 지나 선교하러 가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는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책을 읽을 때에는 고상한 척 하다가 육신으로는 흥청망청 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이 있을지라도 쌓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화살이 나를 죽여도 나는 부활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영적 압박감, 불안함, 근심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또한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박해하고 내다버려도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받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5. 겉사람과 속사람
1)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짐
본문의 16절에서 18절은 4장과 5장을 같이 아우르는 우리 인생의 큰 주제입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겉사람과 속사람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새로워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낡아집니다.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좋고 비싼 것이라고 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녹슬고 헤집니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워낙 이런 말을 많이 쓰니 쉬운 것 같으나 세상에 날로 새로워지는 것은 사실상 없습니다. 그런데 속사람은 뭐길래 날로 새로워집니까. 이 겉사람은 환란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경은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함으로 규정합니다. 바울처럼 많은 고난을 당한 자가 성경에 없습니다. 태장, 돌, 강도, 시내, 광야, 바다 등 보통의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의 고난을 합친 것처럼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환란의 경함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앙인이 바로 이렇습니다. 겉사람에 속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고난을 지극히 크고 중한 영원한 것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이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처럼 겉사람을 내팽개치고 속사람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겉사람이 속사람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겉사람이 극심한 환란을 당할지라도 그것이 경한 것은 지극히 크고 영광스러운 것을 이루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속사람에 속한 겉사람으로 정한 것입니다. 거듭난 나는 내 실체인 속사람을 이루는 과정으로 겉사람의 고난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에게 육신이 짐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을 모두가 겪을 것입니다. 육체의 것이 영의 것에 방해가 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속사람에 속한 것으로서 영원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되 그것이 영과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으로 영원히 연결되는 것입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은 사실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속사람이 없습니다. 겉사람으로만 삽니다. 그러니 끝내는 낙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잘 나갈 때는 좋습니다. 사업을 하고 이윤을 남기자고 합니다. 그런데 육신이 후패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낙심합니다. 너무 불쌍합니다. 육신이 매고 있어 정신은 말짱한데 그것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속사람에 매입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거듭난 속사람 안에 겉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것, 주와 함께 고난당하는 것(롬 8:17),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갈 2:20)이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답답합니다. 그러나 영광을 받기 위한 고난으로 이것을 바라보게 되면 고난이 경함이 되는 것이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인해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뭔가 우리가 주를 위해 죽었다고 하면 성도가 낙심할까봐 바로 뒤이어 그리스도가 이를 위하여 다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로마서에도 고린도후서에도, 갈라디아서에도 나옵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겉사람과 속사람입니다.
겉사람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겉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속사람의 온전함을 이루는 키입니다. 제가 어디에선가 최근에 본 적이 있습니다. 내 몸을 썩게 두지 말고 닳아서 없어지게 하자고 말입니다. 자전거 튜브도 두 달만 안 쓰면 고무가 삭습니다. 내 몸을 썩게 두지 말고 닳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안 쓰면 썩습니다. 신발은 열심히 신으면 닳아서 반질반질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자전거 튜브도 삭아 버립니다. 심지어 칼도 그렇습니다. 썩게 만들지 말고 닳게 만드는 것입니다. 닳아서 없앨 때까지 사용해서 조금 덜 쓰면 더 살지 않겠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닳도록 살면 하나님 때까지 더 많이 살게 하실 것입니다. 닳게 사는 것이 오래 사는 것입니다. 쓰지도 않고 아껴 두고 내 몸을 가꾸면 썩습니다. 막 닳게 살아야 오래 삽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육신이 닳도록 기도에 더 애씁니다. 세상에서는 에너지를 쓰면 빨리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르겠습니다. 육신이 닳도록 살면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3) 겉사람이 속사람에 들어옴
겉사람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의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체가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 지금 우리는 이 생명의 부활, 복된 부활의 인침을 이미 우리 몸에 받았습니다. 부끄러운 부활이 아니라 말입니다. 지금 연약함이 있습니다. 죄도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 몸에 이 부활의 인침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난을 받은 것으로 비난도 받고 사도 됨에 대해 의심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겉사람을 그냥 두면 죄의 법을 섬깁니다. 그러나 속사람 안에 겉사람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7:22). 죄 지으려고 기도하는 사람 아무도 없지요? 그러면 됐습니다. 크게 하나님의 길에 서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러면 된 것입니다.
4) 육신의 약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능력을 누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금도 은도 돌도 나무도 아닌, 그저 흙으로 만든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몸에 보배를 가졌으니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보배가 그리스도의 빛,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 칼빈은 미래를 묵상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미래를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살 것, 그 생명의 의인의 복된 부활, 첫째 부활을 바라보며 우리가 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육신의 것으로 자랑할 것으로는 자기도 많다고 합니다. 그린도후서 11장 22절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인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사십 대를 맞으면 죽으니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맞은 것입니다. 태장을 세 번 맞습니다. 한 번만 맞아도 산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데반과 같이 돌에 맞았습니다. 세 번 파선했습니다. 제주도 가다가 세 번이나 배가 망가져서 빠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무조각을 안고 바다에 사흘간 떠 있었습니다. 강도를 당했습니다. 이 사도 바울을 보고 내가 주를 위해 고난 당한다고 누가 쉽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일이 그의 몸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그 몸으로 삼층천도 갑니다. 전부 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환란 당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요, 삼층천을 간 것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세 번이나 바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는 이런 것을 자랑하나, 그러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많이 하니 어쩔 수 없이 나도 말을 하지만,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 곧 은혜를 자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약한 것을 자랑해야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뭅니다. 내가 건강하면 왜 의사가 필요합니까.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사도 바울의 논법은 항상 이와 같습니다. 전부 그리스도의 것을 말합니다. 육신 가운데 십자가를 단단히 붙잡고 주 앞에 찬양할 때까지 이기며 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단단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 쓰고서 주 앞에 찬양할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셨네." 이번 주에는 이 찬송을 부르며 살길 바랍니다.
6. 결론
세 가지를 말씀드리며 마치고자 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고(롬 1:17), 은혜 위에 은혜요(요 1:16),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고후 3:18), 이 세 가지를 묵상하며 속사람으로 겉사람을 사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