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베푸시는 새 힘 | 사 40:28-31 | 문병호 목사 | 새 것 ・ 거듭난 것 ・ 값으로 사신 것 14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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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베푸시는 새 힘 | 사 40:28-31 | 문병호 목사 | 새 것 ・ 거듭난 것 ・ 값으로 사신 것 14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10801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녹취록>



1. 약한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은 친히 모든 일을 이루시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특히 그렇게 하심에 있어 강한 자가 아닌 약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그럼으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섭리입니다. 다윗은 말째였고 양을 치던 약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사용해서 블레셋의 거구 골리앗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가 봐도 오합지졸이요 전쟁을 모르는 그저 종살이 하던 노예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할례시키고 가장 약하게 만들어서 여리고성을 돌게 하여 그 성을 무너뜨립니다. 그리하여 누가 봐도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게 하십니다. 룻은 자랑할 만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의 모압 여인이었고 구차하게 이삭을 줍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장 약한 여인을 들어 그 가게에서 끝내 다윗과 예수가 나게 하는 역사를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약한 자들을 들어 가장 강한 자들을 이기게 하셔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섭리의 최고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연한 순과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가지와 같았습니다. 흠모할 것이 없고 힘이 없고 바람만 불어도 떨어질 것 같은 그런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물론 강한 최고의 능력을 지니셨지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지극히 약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시고 구속의 대역사를 이루셨습니다. 



2. 하나님에게서 새 힘을 앙망함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강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힘을 주시는 것인데 본문 31절은 새 힘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새 힘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새' 라는 말은 새 영, 새 것, 새 사람, 새 힘 등에 있어 창조적인 권능, 하나님이 만들어서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과관계가 없는 힘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주신 힘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얻은 힘이 아닙니다. 없는데 생기는 힘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 힘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골리앗을 넘어뜨린 힘이 다 이것입니다. 이 힘을 주시는 것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입니다. 앙망은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새끼새가 어미새가 먹이를 물어서 입에 넣어 주기를 바라며 짹짹거리며 입을 벌리는 그것입니다. 새 둥지에는 어미새들이 있지 않습니다. 그곳은 어미새들이 잠자는 곳이 아닙니다. 새끼 새들이 알 낳고 부화할 때까지 있는 곳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을 새 힘을 얻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힘을 얻으면 독수리가 날개 치듯 힘을 내는 것입니다. 새끼새가 독수리가 되는 그런 일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은 그러므로 믿고 경외하고 신뢰하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감사하고 여호와께 영광을 올립니다. 이런 말이 없겠지만, 이런 표현을 써 봤습니다. 우리 교회는 직선적 신앙을 갖자고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옆에 무엇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아이가 어머니 젖을 향하여 가는 것이 직선적인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 젖을 향하여 입을 내밀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달라드는 것이 직선적인 것입니다. 그 직선적인 신앙을 갖자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우리는 앙망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호와께서 새 힘을 주셔서 독수리와 같이 창공을 날게 하십니다. 



3. 마음과 육체의 힘을 주시는 하나님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 40:28). 우리는 피곤하고 곤비합니다. 육체적으로나 마음, 정신적으로나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곤비한 자에게 힘과 능력을 더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고 땅끝까지 창조하신 그 하나님입니다. 만물을 그의 말씀으로 지으시고 입 기운으로 만물을 이루십니다. 만물을 그의 힘으로 붙드시는 분입니다(히 1:3). 그러므로 우리에게 새 힘을 주는 것은 오직 여호와입니다. 우리는 힘이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저도 최근에 백신을 맞았는데 강의를 마치고 오는데 다리가 저리고 경련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지 아무렇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멀쩡해도 힘이 없으면 다 쓰러집니다. 힘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말입니다. 이 힘은 육체의 힘도 마음의 힘도 있습니다. 이 힘이 없으면 장정이라도 쓰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체와 마음의 힘을 모두 주십니다. 피곤은 육체적인, 곤비는 마음과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은 이 두 가지 모두의 힘을 주십니다. 요즘에는 마음의 힘이 없어서 쓰러지는 자들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반대였는데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신다는 말씀이 느헤미야서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힘을 믿고 의지하고 소망하고 그를 앙망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데 교독문을 보니 또 힘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교독문도 맞춰서 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새 힘이 됩니다. 새 힘이라는 것은 창조적인 힘이고 날마다 주시는 힘입니다. 한끼라도 우리에게 안 채워 주시면 힘이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채워 주시는 힘을 새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필요를 채우는 실제적인 위로


본문 이사야서 40장 마지막 절의 새 힘은 신약 부분입니다. 이사야는 66장, 성경의 권수와 같은데 신약 구약 구성이 동등합니다. 구약이 39장까지요, 40장부터는 신약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40장의 1절은 위로로 시작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그리고 11절은 말합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여기서 그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위로가 1절에 있고 11절에 목자가 나옵니다. 새 시대, 신약시대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미리 될 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 고난 사건을 미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31절, 새 힘을 얻는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관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 힘이라는 것은 그저 말로 되지 않습니다. 본문 1절의 위로라는 말은 그저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영육 간의 채워 주심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그저 할 수 있다고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이 마른 자에게 물을 먹이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목마른 자들에게는 음료가 되고 배고픈 자에게는 양식이 되고 쫓기는 자에게는 피할 바위가, 여름의 나그네에게는 구름기둥, 겨울의 나그네게에는 불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채워 주시는 위로가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공부하다가 시골에 가면 어머니가 밥을 한끼 지어 주십니다. 그러면 위로가 됩니다. 그것을 맛있게 먹고 그러면 내 마음이 위로가 됩니다. 이 위로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라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영육 간에 새 힘을 주신다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필요를 모두 공급하신다는 말입니다.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배고픈 자에게는 음식을, 도망하는 자에게는 피할 바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음료와 음식과 피할 곳이 있어야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새 힘이라는 것은 위로와 통하는 것입니다. 



5. 위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고린도후서에 위로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1장 3절에서 5절을 보면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신앙생활을 잘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너무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교회에 편지를 쓸 때 특별히 위로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위로는 헬라어로 '파라클레시스'라고 합니다. 위로를 하는 사람은 '파라클레토스'라고 합니다. '보혜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보혜사'라는 말은 난하주에 보면 '위로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파라클레시스'는 '파라칼레오'라는 말에서 나옵니다. '함께 간다'는 의미입니다. '칼레오'는 '불렀다'는 말입니다. 즉 불러서 함께 가면서 먹여 주고 격려해 주고 하는데 이것이 위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위로자(사 40:1)는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그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일을 이루시고 하늘로 가시면 보혜사 성령을 내려주시는데 이 영은 위로의 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새 시대는 위로자가 우리에게 오는 것인데 그 위로자는 어떤 위로자이냐, 목마른 우리에게 그의 피가 음료가 되고 배고픈 우리에게 그의 살이 양식이 되고 우리에게 반석과 도피처가 되시고 지성소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위로자인 것은 부요하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고 즐겁게 하시는 것이요, 그러므로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의 위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말로는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말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하지만 말로 하는 것이 아닌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진정한 위로자가 되십니다. 그 자신의 은혜의 그늘에 우리가 거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밤에는 불기둥, 한낮에는 구름기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11절 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위로가 무엇이냐, 목자가 오셔서 먹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먹이느냐, 신령한 젖과 꿀을 주시는데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목자이시자 우리를 위한 양입니다. 그 자신이 선한 목자인데 그 자신이 양이 되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위로를 구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위로를 구하냐,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시는데 원 위로자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셔서 위로하시며 친히 간구하시는 위로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일서는 대언자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가 오셔서 새 힘을 얻으리니이라는 위로자의 말씀으로 본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6. 나의 힘이신 여호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예전에 충현교회에 가면 이 말씀이 항상 적혀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시 21:1). 우리는 아침에 눈꺼풀 올리는 것도 주가 힘을 주셔야 합니다. 일어설 때도 힘을 주셔야 합니다. 자꾸 나약한 소리 해서 죄송합니다만, 어릴 때는 눈 뜨고 일어나고 달리고 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눈 뜨는 것도 일이고 일어나는 것도 일입니다. 걷는 것도 일입니다. 전부 일입니다. 그때마다 새 힘을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시는데 마음의 힘을 가지려면 하나님이 새 힘을 주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매우 약합니다. 여호와께서 새 힘을 주시면 아주 강해집니다. 어떤 것보다 강해집니다. 돌로 골리앗에게 던지게 됩니다. 다윗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새 힘을 주심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다윗의 시편이 이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그리고 사라에게 잉태하는 힘을 주셨습니다. 이미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인데 잉태할 수 있는 새 힘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큰지요. 어미새가 아기새를 먹이듯,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합니다. 우리 마음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괜히 기쁘고 아무 일 없어도 기쁩니다. 이 새 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의 힘입니다. 이제는 다 이루셔서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힘을 얻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한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용사가 용맹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약함을 자랑하셔야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뭅니다. 강함을 자랑하면, 건강을 자랑하면 의사가 떠나듯,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지 않습니다. 영적인 질서가 바로 이것입니다. 약한 것을 자랑하므로 우리는 그저 겸손합니다. 이것이 강한 것입니다. 새 힘은 힘줄이 움직여야 합니다. 새 마음, 새 뜻, 새 행실에는 힘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줄을 잘라야 하나님의 힘줄이 붙습니다. 에스겔서의 마른 뼈에 힘주과 살이 붙듯 말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 돌아올 때 에서가 기다립니다.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강한 자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하나님이 힘줄을 강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라 버리십니다. 환도 뼈가 위골되도록 해버립니다. 새번역에서는 허벅다리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힘을 못쓰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힘줄입니다. 이것을 밤새 잘라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육체적인 힘줄을 잘라 버렸는데, 하나님이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야곱은 힘줄을 가졌을 때의 이름, 이스라엘은 힘줄을 잘렸을 때의 이름입니다. 야곱은 인본적으로 형의 것을 낚아챈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음이라는 이름입니다. 어떻게 이겼나요, 힘줄이 잘리고 하나님이 새로운 힘줄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새 힘을 주신 것입니다. 밧단아람에서 하나님이 20년간 은혜를 주셨으나 거기에도 어쨌든 인본주의가 남아 있습니다. 야곱은 어떻게 보면 끈기가 있었고 성취욕과 그 결과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에서의 큰 힘 앞에서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서듯 야곱이 섰습니다. 에서 족속이 살았던 에돔은 지역이 전부 다 바위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거칠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육체의 힘줄을 잘라버리십니다. 육체적으로는 힘을 못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앙망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면 여호와가 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이름의 이스라엘은 사실 하나님이 져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앙망하면 말입니다. 새끼새처럼 짹짹거리며 입을 벌리고 있으면 어느 어미새가 먹이지 않을 수 있나요. 이것이 앙망입니다. 새 힘을 앙망하는 자가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도 찬송을 하나 해 보려고 합니다. "옛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을 주옵소서. 이 세상의 물결이 흉흉해도 날 평안케 하옵소서. 주 예수여 충만한 은혜 내 영혼에 부으소서. 주 예수만 나의 힘 되고 내 만족함 됩니다." 예수가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충만한 새 힘을 예수가 우리에게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 은혜를 날마다 찬미하고 영광 돌리는, 그리고 그것을 흡족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