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열심 | 사 9:6-7 | 문병호 목사 | 새 것 ・ 거듭난 것 ・ 값으로 사신 것 16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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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열심 | 사 9:6-7 | 문병호 목사 | 새 것 ・ 거듭난 것 ・ 값으로 사신 것 16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10815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녹취록>



1. 하나님의 속성과 열심


새 것, 거듭난 것, 그리스도의 값주고 사신 것이라는 주제로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씀 같으나 너무 은혜가 됩니다. 새 것, 새 일, 이는 곧 모두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그것의 성취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임을 보았습니다. 본문도 예수 그리스도, 한 아이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일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좌를 굳건히 하셨는데 그 일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뜻하시면 이루시고 이루신즉 모든 것이 선합니다. 하나님은 최선의 것을 뜻하기만 하시면 그 자체로 이루십니다. 뜻이 없이 이루시는 것도 없고 뜻했는데 이루지 못하시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뜻하시거나 이루시는 것은 최선이고 최상이고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무슨 일을 더하거나 덜하거나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더 잘하시거나 더 못하시거나 하는 것을 따질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뜻의 양과 질만큼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루심은 완전하심이고 완전하심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 무한, 영원, 불변하신 사랑이 한이 없으시므로 그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덜하고 더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야 쉬어 가고 빨리 가는 개념이 있으나 하나님은 항상 충만하고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은 하나님 그 자신입니다. 여호와 자신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열심입니다. 여호와는 모든 일에 열심이십니다. 어떤 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완전하게 수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때에 맞게. 이것을 우리는 경륜이라고 합니다. 경륜이라는 말이 자전거 대회에 쓰이기도 하는데 축을 두고 자전거 바퀴가 계속 도는 것, 이것을 의미합니다. 불변하게 계속 도는 것입니다. 들쑥 날쑥한 것이 아니라 축을 가지고 동 거리를 쉬지 않고 도는 것입니다. 회전이 일정하지만 힘이 없지 않으므로 불변하고 변개치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 가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그곳에 계십니다. 우리는 매번 마음이 변합니다. 변심, 개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어섬과 앉음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눈이 오는 날 걸어보면 내가 똑바로 가는 것 같아도 걸음이 삐뚤합니다. 마음이 옳다고 하지 우리의 족적은 삐뚤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항상 그곳에 그렇게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삼마입니다. 연초에 송구영신 예배에 본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이것을 미쁘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여름에 햇빛을 강하게 주시고 알곡이 익게 하십니다. 가을에는 걸맞게 계절을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추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미쁘십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우리의 변덕은 죽 끓듯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늘 내 편에 계십니다.



2. 하나님의 열심과 사역


이 여호와의 열심이 성경에 크게 두 곳에 나옵니다. 창조와 구원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은 전부 열심으로 보면 됩니다. 굳이 100%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만물을 지으시고 계속 통치하시고 사시사철 운행하시고 보존하십니다. 부요케 하십니다. 채우십니다. 이런 일들을 계속 하시기 때문에 칼빈은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심히 일하시는 그 모습이 만물에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만물에 나타납니다. 요새 매미가 소란하게 웁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요새 매미 소리를 들으면 서글픕니다. 이전에는 저 나무 위에서 우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내려와서 우는 것 같아서 곧 다할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매미는 몸의 절반을 떨며 웁니다. 매미가 이렇게 우는 것도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빗방울 하나가 내리는 것도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매미가 그렇게 우는 것을 보면 우리가 몇 년 남지 않았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먹을 것을 주시려고 비도 내리시고 땅도 윤택하게 하십니다. 사람이 만든것 같으면 어찌 그렇게 해마다 뿌려도 해마다 나겠습니까. 하나님이 지력을 매해 회복시키셔서 겨우 내내 썩히시고 봄에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 열심히 일하심이 우리를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은 영광의 눈부신 극장이라는 말을 칼빈이 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열심과 구원


1) 회개를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열심은 두 번째로 우리 구원에서 드러납니다. 창조의 열심은 피조물에서 드러난다면 구원의 열심은 구원받은 성도, 나에게서 드러납니다. 나에게 아들을 주셔서 날마다 새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심지어 나는 마땅히 빌 바를 모르는데 여호와는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내가 심지어 잘 때도 나를 위해 구하십니다. 자고 일어나면 우리의 심령이 회복되어 새 힘을 얻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구원의 열심의 결과입니다. 흙탕물이 새 물로 인해 맑아지듯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 역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열심이 내 죄도 정결하게 해 주십니다. 매일 죄를 짓지만 소망 가운데 회개하는 그 회개의 비밀이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 가운데 있습니다. 교부 버나드가 한 말처럼 쓰라리지만 그 가운데 꿀을 섞어서 먹는게 회개입니다. 우리가 회개한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회개도 은혜입니다. 회개 다음에 믿음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고 회개가 따릅니다. 


2)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편은 26절로 구성되었는데 4절에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라고 합니다. 이 인자하심을 헤세드라고 하는데 신약에서는 사랑, 곧 아가페로 드러납니다. 이 헤세드가 시편 136편에 매 절 반복됩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창조의 열심이 나옵니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5). 하나님의 지혜가 조금만 삐딱하면 와르르 피조물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지혜로 지으신 것입니다. 11절에는 구원의 열심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1). 이스라엘 백성을 우리가 가나안으로 들이실 때 하나님의 열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를 부르실 때도 보면 하나님을 위한 일도 아닌데 구원하려고 하는데 모세를 사용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보입니다. 요나도 요셉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모세의 의사를 존중해 주십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신 것, 이것도 하나님의 열심의 방식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교육을 시키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는 반석이요 양식임을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교육시키고 율법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격에 맞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애굽의 마지막 재앙에서 하나님이 1년 된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십니다. 이 피를 보고 그 가정의 장자가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열심의 핵심이 피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애굽인들의 화로 옆에서 고기를 얻어 먹는 것이 좋았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또 피할 길을 내려주십니다. 아이의 엉덩이를 훈육을 위해 때려도 다시 어루만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감싸십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면 불뱀을 내리셨을까요. 그래도 택함 받은 자를 남겨 두는데 그것이 바로 놋뱀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는 자를 남겨 주십니다. 곧 십자가의 피입니다. 높이 들린 장대의 피를 바라보는 자마다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의 구원의 열심이 바로 여기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전체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계속 불평합니다.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리시면 아멘을 천 번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 앞에서 또 자신의 의를 내세웁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이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4. 하나님의 열심: 예수 그리스도


이사야서의 예언은 한 아기, 한 아들을 처녀가 잉태하여 낳는다고 했는데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즉 이전에 있지 않았던 일을 유월절 어린양이 율법의 저주의 죽음을 죽으셔서(고전 5:7; 갈 3:13)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을 이루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어 피를 흘리게 하고 그것을 보고 믿는 자마다 주의 진노를 피해 영생을 얻고 구원을 누림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롬 8:32; 벧전 1:19). 그는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호와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더 해야 만족합니까. 날 위해 죽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데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애굽 시절을 그리워하겠습니까. 예수가 날 위해 피를 흘리고 죽으셨는데, 이를 이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을 두고 우리가 무엇을 더 바랍니까.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9).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무엇이 더 하나님의 열심이 있겠습니까. 해와 달의 움직임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열심의 표를 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죽을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와 상속자로 삼으시고 한 몸으로 부르신 여호와의 열심 외에 다른 찾을 것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먹이실 뿐 아니라 비밀스러운 경륜을 은밀히 스스로 다 이루시고 영원하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임마누엘 함께 계심으로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5. 하나님의 열심과 우리의 열심


1) 평강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조금은 볼 수 있어도 그 너머는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잘할 수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강은 있어야 합니다. 공부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해도 잘할 수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강의 왕의 평화는 무궁합니다. 


2) 지식을 좇은 열심


하나님의 경륜, 곧 정사입니다. 자전거 바퀴는 계속 돌아야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도 열심을 합니다. 그래서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하는 자기 백성을 삼는다고 하십니다. 부지런히 자기 일을 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우리를 해할 이가 없다고 하십니다(딛 2:14; 롬 12:11; 벧전 3:13). 엘리야에게는 여호와의 영광을 향한 열심이 특심(特甚)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열심은 하나님의 열심에 가닿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이 특별히 로마서 10장 2절 등에서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않은 것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의 열심의 한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진짜 열심히 살았던 자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최소 3군데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성경 말씀이 아닌 정통, 사람들의 유전에 더 열심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열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6). 성경에 악하고 게으르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부지런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열심을 일차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열심히 할 때 그것이 지식을 쫓은 열심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방향을 잘 맞춰서 가속페달을 밟아야 합니다. 반대 방향으로 향해서는 빠를수록 멀어질 뿐입니다. 지식의 쫓은 열심은 다름 아닌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실려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울며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씨를 뿌리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열심으로 큰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달리시고 나는 따라가고 실려가고 업혀갈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식을 쫓은 열심'입니다. 농부는 그저 심고 뿌릴 뿐입니다. 자라게 하는 이는 여호와이십니다. 농부는 절대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주시는 데까지 세상 사람 사랑하니 참 사랑 아닌가 하나님은 사랑이라 죄악에 빠졌던 우리까지 사랑하니 참 사랑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