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땅을 가서 밟음 | 수 1:1-9 | 문병호 목사 | 새 것 ・ 거듭난 것 ・ 값으로 사신 것 20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10912

조회수 624



언약의 땅을 가서 밟음 | 수 1:1-9 | 문병호 목사 | 새 것 ・ 거듭난 것 ・ 값으로 사신 것 20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10912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녹취록>



1. 새 시대: 광야를 떠나 가나안으로


시간에는 마디를 둘 수 없으나 하나님이 구약, 신약 시대 그리고 종말 이후 영원한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시기 구분은 영원한 뜻 가운데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새로운 시기 가운데 새로운 도약이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은 항상 인물을 두셔서 사용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은 어렵다고 할 수 있으나 사람이 어린아이 때 어려운 가운데 부모의 품에 있듯 광야의 생활은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오직 주님이 거저 주시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그런 시기입니다. 이와 같은 광야 생활을 마치고 언약의 땅, 여호와가 지시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셔서 애굽에 들어가게 하시고 백성을 건져 광야 생활을 하시게 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가나안에 들이지는 않으십니다. 산에 올라 사방을 길르앗부터 단까지, 에브라임, 므낫세, 납달리 즉 서해, 지중해까지 보게 하시며 여리고에서 계곡을 내려오면서 사해까지 소알 즉 소돔과 고모라까지 보게 하시면서 '이는 내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여 준 땅이나 너는 들어가지 못하리라' 신명기에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제는 땅에서 난 소산을 먹게 됩니다. 광야에서는 땅에서 아무것도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으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나안 땅에서 나는 소산을 먹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운 단계의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열심히 자녀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바깥에 있는 게 복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포도원에서 함께 일하는 것이 복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땅을 경작하면, 씨를 뿌리고 거두고 저장하는 복을 주시는 단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주 말씀하시는 씨 뿌리는 자의 시대가 이제 시작된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씨를 마련하고 맥추절, 오순절 등에서는 첫 열매를 거두고 수장절, 장막절 등에는 그것을 저장합니다. 이것에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삶을 모두 단계별로 보여 주기도 합니다. 씨를 뿌리고 거두고 저장하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2. 새 인물: 여호수아


이 새로운 단계에 하나님은 새로운 인물을 세우십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으로 많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세를 수종드는 자가 여호수아입니다. 수종드는 것은 그냥 옆에서 지팡이를 들고 함께하되 무엇보다 회막에 오갈 때 동행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을 여닫을 때 함께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새로운 땅을 들어가는 데 있어서 기점은 모세의 죽음입니다. 모세가 죽었으니 모든 백성과 함께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죽은 것이 무슨 힘이 된다고 일어나라고 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신명기에서 하신 약속, 모세는 들어가지 못하나 정탐을 하고 믿음으로 보고한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새로 난 자들만 들어갈 수 있게 하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이미 하셨으므로 새로운 시대, 모세의 죽음과 함께 약속된 시간, 광야 시대를 넘어서서 바로 가나안 시대, 예루살렘 시대, 성전 시대로 들어가는 그 기점에 여호수아를 세운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금도 가장 큰 종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를 그 자리에 놓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 마지막 큰 일에 하나님이 모세의 수종자를 두신 것을 봅니다. 수종자는 사실 가장 낮은 일을 하는 직분입니다. 몸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여호수아를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름 자체가 예수아, 구원자라는 의미가 있기는 하나 그가 충실했던 것은 모세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 가운데에서도 보면 더 큰 기적은 엘리사를 통해 많이 일으키신 것을 봅니다. 무엇보다 엘리사는 학교를 세웁니다. 엘리야는 한 사람을 세우지만 엘리사는 학교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 역시 다윗이 모두 준비하고 솔로몬이 짓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모세를 왜 가나안 땅에 들이지 않았는지 허전한 마음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언약을 이루는 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3. 하나님이 주신 기업: 발바닥으로 밟아 취함


땅의 약속, 후손의 약속, 복의 약속을 하셨는데 후손의 약속을 이백만 명이 넘는 자손으로 채워 주시니 이제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땅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입니다. 소알의 평지, 소돔과 고모라가 기름져 보였으나 아브라함이 있는 곳은 척박한 땅이라도 그곳을 지키십니다.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이 났던 그 가나안 땅입니다. 야곱이 얍복을 넘어와서 열두 지파에게 약속된 그 가나안 땅입니다. 이미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에 하나님이 충분히 약속을 보여 주셨던 땅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눈에 보이는 사방의 땅을 주는데 사람이 보기에 좋은 땅은 룻이 가져가고 척박한 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고 가나안의 약속된 땅을 이미 준비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물이 흘러서 물이 터지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물이 터지는 땅입니다. 지하수가 흘러서 터진다고 하는 말도 있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세겜 사람들, 원주민이 더 잘 알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나그네인데 어떻게 지하수를 찾을 수 있습니까. 

애굽의 사백 년, 광야의 사십 년, 근 사백오십 년 그 오랜 기간 동안 떠나 있던 그 땅으로 이제 발바닥으로 밟고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밟는 모든 땅을 너희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발바닥으로 밟는다는 것은 그저 지나가거나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닌 기업으로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터를 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빨리 지나간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발바닥으로 밟는다'는 표현을 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이 표현이 참 귀합니다. 여호와와 함께 하시는 내 발바닥으로 밟으면 그 땅이 내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함께 하실 때 밟는 것이지 나머지는 전부 스치는 것입니다. 

기업을 해도 사업을 해도 공부를 해도 우리가 밟아야 합니다. 그저 불안하게 지나가듯 하면 안 됩니다. 여호와의 함께 하심으로, 넉넉함으로, 무슨 일을 당해도 쿵쿵 밟듯 다녀야 합니다. 발바닥으로 밟아야 합니다. 그저 지나가는 것으로 어쩌다가 이겨 지나가는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이미 발바닥으로 밟았습니다. 언제요, 홍해를 발바닥으로 밟아 봤습니다. 누가 그 바다를 발바닥으로 밟을 수 있었습니까. 배로 건넜으면 얼마나 불안했을 그 바다를 바닥을 밟고 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화살과 병기와 말이 없지만 발로 밟아 가게 하신 것입니다.



4. 모든 시험을 이김: 여호와의 함께하심


이제 그들이 요단을 발바닥으로 밟으며 지나간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물적인 장애도 인적인 장애도 많습니다. 재물이 없어서 당하는 장애, 자연재해로 당하는 장애,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아모리가 기다리고 각종 강성한 이방 족속이 기다립니다. 에돔, 모압, 암몬, 그리고 겨우 들어왔는데 가나안의 더 강대한 민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오합지졸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이기나요. 애굽에서 가축도 재물도 모두 가지고 나왔는데 어찌 전쟁하는 상태일 수 있습니까. 전쟁할 때 가족과 아이와 가축을 가지고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궤를 매고 가는 그들을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도 능히 그들을 대적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에 대한 답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계셨던 것처럼 함께하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약속밖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병기와 지혜와 힘을 약속하시지 않으십니다. 함께 하심만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갈라놓고 밟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함께하시면서 발을 담글 때 갈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은 겨우 애를 써서 산에 길을 낸다고 해도 작고 가느다란 길일 뿐입니다. 그것마저도 힘들고 지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인도하심은 밟고 가게 하십니다. 받을 우리의 그릇이 있어서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받을 그릇조차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지막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그릇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릇 삼아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준비됐으니 채워주소서' 하지도 못합니다. 그저 은혜 임하면 공간도 생기고 그릇과 병이 함께 생기고 그 안에 기름과 식량을 채우시는 것입니다. 질그릇이든, 나무그릇이든, 은그릇이든, 금그릇이든 긍휼의 그릇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발을 담그는 순간 갈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미약하고 불안합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밟고 가는 것은 오직 여호와가 함께 하시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저 밟고 가기만 하라고 말씀하는 것인가요?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5.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가 함께하시는 표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지난주 하박국 말씀에서 본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달려가면서도 외울 수 있도록 마음판에 새기라고 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힘써 지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두 가지 불평을 합니다. 왜 불의한 이방 족속이 이기게 하시는지, 그리고 왜 백성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지 따지듯 물어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다른 말씀 없이 한마디로 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달리면서 외게 하라는 것입니다. 적들을 없애 준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대적은 점점 더 커집니다. 앗수르 무너뜨리면 바벨론이, 이후는 바사와 헬라와 로마가 생깁니다. 그것이 다니엘의 환상에서 나옵니다. 진리의 말씀을 좌표로 삼아아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딤후 2:15).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품에 안기면,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모세가 여호와의 품에 안겨 시내산에 올라간 것처럼, 빽빽한 주의 임재 가운데 있으면 금송아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밑에 있던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여호와의 임재 가운데 있으면 좌로나 우로나 우리가 치우치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는 그의 말씀을 좌표, 양식 삼습니다.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가장 중요한 표는 말씀의 지시와 말씀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붙들고 우리가 나갈 때 평안하다 하는 거짓 평강이 아니라, 그래서 불안한 걸음이 아니라 조금 남루하고 배고픈 것 같아도 밟으면서 가는 그것이 우리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6. 환경을 찾지 말고 은혜를 구하라


뭔가 조금 안 된다고 불안해하지 마시고 저벅 저벅 걸어 가십시오.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나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밟고 가게 하십니다. 지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한번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취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6). 피하거나 모면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저 어떤 사람을 안 보게 됐으면 좋겠다 정도가 아닙니다. 그냥 어떤 일이 얼른 지나가면 좋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여리고를 정복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생 라합이 말한 것처럼 이미 그들의 마음이 물과 같이 녹았습니다. 기생 라합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온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모르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모르는 자들인데 강성한 적들을 이겨온 것은 바로 하나님이 싸우시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언약궤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울과 같이 언약궤를 우상 삼아서는 안 됩니다. 언약궤를 900미터 뒤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먼저 물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이 법궤를 매고 물에 들어갈 때 물이 멈춥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마지막으로 나오니 물이 흐릅니다. 말씀이 시작하고 말씀이 맺는 것입니다.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궤의 의미입니다. 여호와의 함께하심은 바로 말씀이 함께하는 것이요, 말씀의 가고 멈추는 것이 우리의 가고 멈추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물이 얕은 곳을 찾지 말고 여호와의 깊은 은혜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단강 건너기에 가장 얕은 곳을 찾는다면 적병들도 활을 들고 그곳에 서 있을 것입니다. 환경과 형편이 어렵더라도 인간 생각에서는 물이 얕은 곳으로 가면 건너가기 쉬울지라도 활을 든 적들이 매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깊은 곳의 물을 멈추게 하십니다. 여호와가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방식은 세상의 방식과 정반대입니다. 이성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7. 하나님께 영광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4). 열두 돌을 취해 길갈에 기념비를 세운 때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일하십니다. 그를 경외하는 자와 그의 인자를 간구하는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요단도 가장 깊은 곳, 물이 많은 곳을 가르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손이 행하셨음을 드러내서 그를 경외하게 하시려 함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루시고 하셨음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행하신 것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할례를 거하게 하고 이제 걷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하게 하십니다.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수 5:14). 이 군대 장관은 예수님이십니다. 살을 베고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다리가 억세다고 하여 기뻐하지 말고 말이 힘이 세다고 기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유와 존재를 벗어 던지라는 것입니다. 신을 벗으면 그 동네는 바닥이 뜨거워서 걸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행하셔서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한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거할 처소는 주님뿐입니다. 이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시험과 환란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