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7 | 주일낮예배 |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2 | 말씀으로 함께 하심 | 신 30:11-14 | 문병호 목사
조회수 141
2021년 2월 7일 주일낮예배 설교 |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2
말씀으로 함께 계심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신명기 30:11-14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녹취록
1. 모압 언약
1) 호렙산 언약을 기억하라
우리가 갈라디아서 말씀을 살펴보고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십자가, 오직 성령 등 복에 대해서 살펴보고, 자유롭되 선한 열매를 맺는 자유, 그래서 믿음에는 사랑이 따른다는 것을 살펴보고 여러 말씀을 생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지난 주 신명기 1장의 말씀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펼쳐 풀어 주시는 말씀 가운데서 무엇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먼저 가시고 안아 주시고 친히 싸우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또한 살펴봤습니다. 본문은 30장으로 뛰어넘어 살펴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5장 등에서 말씀된 내용이, 가장 급할 때 다시금 말씀을 되새겨 주시는 것처럼 다시 한번 반복해 주시는 것을 본문에서 보고 있습니다. 본문은 특히 모압 평지에서 언약을 맺었다고 하여 모압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언약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행하면 너희가 복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또 한 가지 중요한 언약이 이전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19장 20장에 걸쳐 있는 호렙산 언약입니다. 이것은 산에서 받은 것인데 언약을 은혜로 말씀 듣고 지키면 복 받는다는 내용의 반복입니다. 본문은 호렙산 언약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기억하라는 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제가 유학할 때 독일의 어떤 한 분이 박사 논문을 쓰는데 기억에 대해 쓴다고 합니다. 구약에 있어서 기억한다는 개념이 무척 중요합니다. 신약에도 그런 말이 있기는 하지만 보혜사 성령의 진리의 영으로 다 우리에게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과 행한 것이 생각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의 기억, 기념 등이 신약에 들어오면 이 개념으로 승화됩니다.
2) 은혜 언약
본문 말씀은 모압 평지의 언약 중 복 받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복 받는 길에 대해 다시금 말씀해 주는데 그것이 바로 11절에서 14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이 어려운 것도 먼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먼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어려운 명령으로 보일수록 더 약속이 큽니다. 그래서 많은 사함을 받아 많은 사랑을 하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명령이 있는 곳에 반드시 말씀이 있습니다. 신령한 복을 누리고 하늘의 상급을 쌓으려면 무언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특별한 것을 뭘 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입에 있고 마음에 있으며 이것을 우리가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해질 수 있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그리심산의 축복입니다. 축복은 내가 말씀을 지키거나 가닿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은 항상 은혜입니다. 은혜가 복된 것이지 내가 잘해서 뭔가 이뤘다고 하는 것은 큰 착오입니다.
2. 선함: 진리 가운데 복됨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그 본질과 정점은 말씀이 우리 안에서 들려지고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은 보거나 만지거나 들어서가 아니라 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우리 입에 있고 고백되고 마음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되게 하시는데 진리로서 하십니다. 진리 가운데 복되다는 것이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토브', 신약의 '아가토스'라는 말의 중요성을 계속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둘 다 선하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도 착하다, 선하다는 말을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말씀에 올곧게 서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선하다는 것은 진리 가운데 복됨입니다. 분명히 알 것은 진리 가운데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데 복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떠나는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 복된 것이 영광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방 산당에 발을 들이지 않고 성소에서 여호와의 임재를 누린다는 것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말입니다. 기드온에서 일천번제를 솔로몬이 드렸지만 아직 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사실 온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진리입니다. 구약에서 선하다는 것은 영광이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이 선하지 않다고 한 것이 바로 그 이름으로 '이가봇', 영광이 떠난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출 3:12). 그 말을 들으니 모세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3. 여호와가 함께 하심
'너와 함께 한다'는 것은 영어로 'be with you'입니다. '하야'라는 단어가 있는데 여기서 '야훼'가 나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야훼라는 이름이 영어로 말하면 be동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강조하는 접속사가 사용되어 '반드시 너와 함께 있다'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이름을 묻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말할 때 어디 출신이고 키가 얼마다 등등 붙일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술어를 쓸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때도 '하야'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보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한다, 그것이 내 이름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있다'라는 것이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최고의 기도제목으로 살펴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니 어디든 계시고 전지 전능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최고의 기도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내 생각을 없애라고 하나님이 기도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대로 생각대로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내 원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우리 주님의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모세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다라는 것을 그대로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 8절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라고 증언합니다. 쉽게 말하면 끌려갔다, 데려가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호와가 함께 계셔서 말입니다. 지난 주 말씀과 같이 '안고 가신' 것입니다. 안고 걷는 것을 우리의 걸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안아서 걸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고도 우리가 걸었다고 해 주십니다. 아이가 잠시라도 함께 없으면 어디로 갑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고 가신 것을, 여호와가 함께 계신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는 곳마다 샘이 났습니다. 야곱도 벧엘에서, 요셉도 여호와의 함께하심으로 형통한 것입니다.
4.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표징: 말씀을 주심
그러면 우리가 여호와의 함께하심을 어떻게 압니까? 세상에서도 함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호합니다. 하물며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것은 더욱 모호합니다. 이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몇 번 살펴보았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자꾸 술어를 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이러하시니 저러하다는 등으로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스스로 계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모세의 하나님까지 덧붙여서 이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을가요? 그 표이자 증거가 뭘까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성경에서 아무리 살펴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인 '이 산에서 너희가 나를 섬긴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 산은 호렙산입니다. 율법을 주신 산입니다. 정확한 산의 위치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산에서 '섬긴다'는 말은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합니다.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즉, 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리니 이것이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이끌고자 하는 이스라엘은 혈통으로만 이스라엘입니다. 그 외에는 도(道)도 율법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모양이 없습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모세라서 그들을 건져내 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의 백성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호와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다는 증거가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건져 내면 이곳에서 말씀을 주시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5. 말씀의 임재: 예수 그리스도
출애굽기 3:12에서 '섬긴다'를 영어로 worship으로 번역된 것보다는 '하나님을 섬긴다'라는 우리 번역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로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삶입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여기서 나온 '징조'가 '오트'입니다. 즉 출애굽기 3장 15절의 반드시 함께 하시리라는 증거가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오는 징조와 같은 단어, '오트'로 쓰인 것입니다. 이는 바로 곧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 징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시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가자 그들이 금송아지를 섬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자신을 죽이고라도 그들을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나와 함께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주의 사자를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 이렇게 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다시 묻습니다. 모세가 적시 적소에 질문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임마누엘을 무엇으로 아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이 답하십니다.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이에 대해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시라'고 요청합니다. 영광을 어떻게 보입니까. 보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영광인데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영광은 '카보드'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선한 것은 말씀 가운데 복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세 앞으로 지나가게 한다고, 즉 앞에 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바로 모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은혜 베풀 자와 긍휼히 여길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기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한 것이 얼굴을 보지 못하고 등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모세에게 말입니다. 여호와에게는 사실 얼굴도 손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호와를 봤다고 하냔 말입니다. 선한 것을 너희 앞에 두고 내 이름으로 부르고 내가 네 이름을 기억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곧 임마누엘 하나님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많은 자연적 이적과 기사로 보여 주십니다. 요셉은 형통하게 하셨고 벧엘에서 야곱은 꿈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을 듣는다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 봤습니까?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데 임마누엘입니다.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본 것입니다. 이 영광은 바로 모세가 아까 물어본, 보여 주시기를 요청한 그 영광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답하신, 모든 선한 것을 지나가게 하시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고 했는데 그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의 임마누엘, 이사야 7장 14절의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의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진리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시니 그것이 바로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 위의 은혜인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말씀의 임재입니다.
6.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율법을 다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본문 신명기의 말씀은 그 자체만으로 그렇게 많이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압 평지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이 말씀에 대해 로마서에서도 우리가 이미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믿음의 말씀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이 믿음의 말씀은 행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의롭게 되는데, 말씀 자체는 폐지된 것이 아닙니다. 누굴 믿느냐 하니, 6절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롬 10:6).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신명기의 말씀을 절묘하게 연결시킵니다. 그리스도를 하늘이나 땅 속에서 찾지 말고, 말씀이 내게 가까워 내 입에 있고 내 마음에 있다, 곧 말씀이 그리스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 안에 거하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요 1:14)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이 가깝다'는 이 말씀은 말씀을 지켜 복된 것인데 그것의 성취와 완성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완성은 율법의 폐지가 아닌 율법을 다 이루셔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율법을 지키게 해 주시는, 그래서 하늘 상급을 받게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8절의 믿음의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입니다.
7. 결론
여호와를, 예수님을 하늘에서 찾지 마십시오. 먼 하늘 보지 마십시오. 저 산꼭대기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증거가 있습니다. 귀가 열려 말씀이 들리는 것이 바로 증거, 오트, 징조입니다. 임마누엘의 징조는 말씀이 들리는 것, 에바다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2021년 2월 7일 주일낮예배 설교 |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2
말씀으로 함께 계심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신명기 30:11-14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녹취록
1. 모압 언약
1) 호렙산 언약을 기억하라
우리가 갈라디아서 말씀을 살펴보고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십자가, 오직 성령 등 복에 대해서 살펴보고, 자유롭되 선한 열매를 맺는 자유, 그래서 믿음에는 사랑이 따른다는 것을 살펴보고 여러 말씀을 생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지난 주 신명기 1장의 말씀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펼쳐 풀어 주시는 말씀 가운데서 무엇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먼저 가시고 안아 주시고 친히 싸우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또한 살펴봤습니다. 본문은 30장으로 뛰어넘어 살펴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5장 등에서 말씀된 내용이, 가장 급할 때 다시금 말씀을 되새겨 주시는 것처럼 다시 한번 반복해 주시는 것을 본문에서 보고 있습니다. 본문은 특히 모압 평지에서 언약을 맺었다고 하여 모압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언약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행하면 너희가 복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또 한 가지 중요한 언약이 이전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19장 20장에 걸쳐 있는 호렙산 언약입니다. 이것은 산에서 받은 것인데 언약을 은혜로 말씀 듣고 지키면 복 받는다는 내용의 반복입니다. 본문은 호렙산 언약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기억하라는 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제가 유학할 때 독일의 어떤 한 분이 박사 논문을 쓰는데 기억에 대해 쓴다고 합니다. 구약에 있어서 기억한다는 개념이 무척 중요합니다. 신약에도 그런 말이 있기는 하지만 보혜사 성령의 진리의 영으로 다 우리에게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과 행한 것이 생각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의 기억, 기념 등이 신약에 들어오면 이 개념으로 승화됩니다.
2) 은혜 언약
본문 말씀은 모압 평지의 언약 중 복 받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복 받는 길에 대해 다시금 말씀해 주는데 그것이 바로 11절에서 14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이 어려운 것도 먼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먼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어려운 명령으로 보일수록 더 약속이 큽니다. 그래서 많은 사함을 받아 많은 사랑을 하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명령이 있는 곳에 반드시 말씀이 있습니다. 신령한 복을 누리고 하늘의 상급을 쌓으려면 무언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특별한 것을 뭘 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입에 있고 마음에 있으며 이것을 우리가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해질 수 있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그리심산의 축복입니다. 축복은 내가 말씀을 지키거나 가닿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은 항상 은혜입니다. 은혜가 복된 것이지 내가 잘해서 뭔가 이뤘다고 하는 것은 큰 착오입니다.
2. 선함: 진리 가운데 복됨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그 본질과 정점은 말씀이 우리 안에서 들려지고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은 보거나 만지거나 들어서가 아니라 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우리 입에 있고 고백되고 마음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되게 하시는데 진리로서 하십니다. 진리 가운데 복되다는 것이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토브', 신약의 '아가토스'라는 말의 중요성을 계속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둘 다 선하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도 착하다, 선하다는 말을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말씀에 올곧게 서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선하다는 것은 진리 가운데 복됨입니다. 분명히 알 것은 진리 가운데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데 복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떠나는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 복된 것이 영광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방 산당에 발을 들이지 않고 성소에서 여호와의 임재를 누린다는 것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말입니다. 기드온에서 일천번제를 솔로몬이 드렸지만 아직 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사실 온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진리입니다. 구약에서 선하다는 것은 영광이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이 선하지 않다고 한 것이 바로 그 이름으로 '이가봇', 영광이 떠난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출 3:12). 그 말을 들으니 모세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3. 여호와가 함께 하심
'너와 함께 한다'는 것은 영어로 'be with you'입니다. '하야'라는 단어가 있는데 여기서 '야훼'가 나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야훼라는 이름이 영어로 말하면 be동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강조하는 접속사가 사용되어 '반드시 너와 함께 있다'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이름을 묻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말할 때 어디 출신이고 키가 얼마다 등등 붙일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술어를 쓸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때도 '하야'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보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한다, 그것이 내 이름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있다'라는 것이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최고의 기도제목으로 살펴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니 어디든 계시고 전지 전능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최고의 기도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내 생각을 없애라고 하나님이 기도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대로 생각대로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내 원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우리 주님의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모세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다라는 것을 그대로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 8절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라고 증언합니다. 쉽게 말하면 끌려갔다, 데려가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호와가 함께 계셔서 말입니다. 지난 주 말씀과 같이 '안고 가신' 것입니다. 안고 걷는 것을 우리의 걸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안아서 걸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고도 우리가 걸었다고 해 주십니다. 아이가 잠시라도 함께 없으면 어디로 갑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고 가신 것을, 여호와가 함께 계신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는 곳마다 샘이 났습니다. 야곱도 벧엘에서, 요셉도 여호와의 함께하심으로 형통한 것입니다.
4.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표징: 말씀을 주심
그러면 우리가 여호와의 함께하심을 어떻게 압니까? 세상에서도 함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호합니다. 하물며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것은 더욱 모호합니다. 이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몇 번 살펴보았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자꾸 술어를 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이러하시니 저러하다는 등으로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스스로 계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모세의 하나님까지 덧붙여서 이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을가요? 그 표이자 증거가 뭘까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성경에서 아무리 살펴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인 '이 산에서 너희가 나를 섬긴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 산은 호렙산입니다. 율법을 주신 산입니다. 정확한 산의 위치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산에서 '섬긴다'는 말은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합니다.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즉, 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리니 이것이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이끌고자 하는 이스라엘은 혈통으로만 이스라엘입니다. 그 외에는 도(道)도 율법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모양이 없습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모세라서 그들을 건져내 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의 백성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호와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다는 증거가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건져 내면 이곳에서 말씀을 주시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5. 말씀의 임재: 예수 그리스도
출애굽기 3:12에서 '섬긴다'를 영어로 worship으로 번역된 것보다는 '하나님을 섬긴다'라는 우리 번역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로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삶입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여기서 나온 '징조'가 '오트'입니다. 즉 출애굽기 3장 15절의 반드시 함께 하시리라는 증거가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오는 징조와 같은 단어, '오트'로 쓰인 것입니다. 이는 바로 곧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 징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시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가자 그들이 금송아지를 섬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자신을 죽이고라도 그들을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나와 함께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주의 사자를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 이렇게 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다시 묻습니다. 모세가 적시 적소에 질문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임마누엘을 무엇으로 아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이 답하십니다.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이에 대해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시라'고 요청합니다. 영광을 어떻게 보입니까. 보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영광인데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영광은 '카보드'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선한 것은 말씀 가운데 복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세 앞으로 지나가게 한다고, 즉 앞에 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바로 모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은혜 베풀 자와 긍휼히 여길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기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한 것이 얼굴을 보지 못하고 등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모세에게 말입니다. 여호와에게는 사실 얼굴도 손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호와를 봤다고 하냔 말입니다. 선한 것을 너희 앞에 두고 내 이름으로 부르고 내가 네 이름을 기억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곧 임마누엘 하나님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많은 자연적 이적과 기사로 보여 주십니다. 요셉은 형통하게 하셨고 벧엘에서 야곱은 꿈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을 듣는다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 봤습니까?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데 임마누엘입니다.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본 것입니다. 이 영광은 바로 모세가 아까 물어본, 보여 주시기를 요청한 그 영광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답하신, 모든 선한 것을 지나가게 하시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고 했는데 그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의 임마누엘, 이사야 7장 14절의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의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진리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시니 그것이 바로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 위의 은혜인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말씀의 임재입니다.
6.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율법을 다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본문 신명기의 말씀은 그 자체만으로 그렇게 많이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압 평지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이 말씀에 대해 로마서에서도 우리가 이미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믿음의 말씀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이 믿음의 말씀은 행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의롭게 되는데, 말씀 자체는 폐지된 것이 아닙니다. 누굴 믿느냐 하니, 6절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롬 10:6).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신명기의 말씀을 절묘하게 연결시킵니다. 그리스도를 하늘이나 땅 속에서 찾지 말고, 말씀이 내게 가까워 내 입에 있고 내 마음에 있다, 곧 말씀이 그리스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 안에 거하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요 1:14)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이 가깝다'는 이 말씀은 말씀을 지켜 복된 것인데 그것의 성취와 완성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완성은 율법의 폐지가 아닌 율법을 다 이루셔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율법을 지키게 해 주시는, 그래서 하늘 상급을 받게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8절의 믿음의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입니다.
7. 결론
여호와를, 예수님을 하늘에서 찾지 마십시오. 먼 하늘 보지 마십시오. 저 산꼭대기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증거가 있습니다. 귀가 열려 말씀이 들리는 것이 바로 증거, 오트, 징조입니다. 임마누엘의 징조는 말씀이 들리는 것, 에바다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