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4 | 주일낮예배 |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3 | 듣고 청종함 가운데 함께 계심 | 삼상 15:22-24 | 문병호 목사
조회수 83
2021년 2월 14일 주일낮예배 설교 |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3
듣고 청종함 가운데 함께 하심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사무엘상 15:22-24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녹취록
1.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함께 계심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울이 하나님과 멀어지는데, 어떻게 해서 멀어지느냐, 다름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버려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말씀 가운데 함께 계심인데,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가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 함께 하심의 모습이라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그 영광을 말씀 가운데 나타내시고, 그 정점, 절정이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요 1:12-14). 그래서 그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떨기나무에 붙이 붙어서 타지 않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임재입니다. 여호와의 임재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 증거로 율법을 수여하신 것을 우리가 지난 주에 봤습니다. '오트'라는 히브리어를 말씀했습니다. 즉, 함께 하심의 증거가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두 돌판에 새기시고 그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의 증거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는 과거뿐 아니라 앞으로 될 일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건져 내시고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할테니 빨리 데리고 나오라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든지 약속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이 세상의 어떤 말과도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시하면 이미 목적지에 계시고 언약하면 이미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시는 대속과 전가의 은혜가 이미 역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창세 전에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역사상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꽃도 풀도 시들지만 영존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2.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임마누엘 하나님의 계시가 말씀입니다. 성자, 제2위 하나님이 말씀이신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누히 살펴본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그런데 그 예수가 무엇의 성취냐, 바로 임마누엘의 성취인 것입니다(마 1:23; 사 1:7). 이것을 우리가 징조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의 증거와 이사야 7장 14절의 징조가 히브리어로 '오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의 성취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은 구원인데 그 구원의 본질이 임마누엘, 예수가 우리와 하나가 되고 예수가 우리 안에 사는 것(갈 2:20)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함께 우리와 계시는 것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가 나설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우리 어머니들이 그러하셨듯 이불을 준비하고 빨고 꿰맨 후에 아이들에게 이불을 깔라고만 하는데 아이들은 자기가 다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에게 또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방황하고 유리했다고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안고 가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
1) 첫 번째 불순종
본문 말씀의 주인공은 사무엘도 사울도 아닙니다. 사실상 하나님이십니다. 연초에 긍정적인 본문을 잡고 싶었지만 그래도 본문은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보고자 합니다. 사울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키도 크고 준수하게 생겼습니다. 자기 생업에도 철저했고 효도도 했고 겸손하기도 했습니다. 베냐민 지파, 자신의 지파에 대해 별 볼일 없다고 표현했으며 기름을 부으러 가니 짐꾸러미 뒤에 숨기도 했습니다. 특히 10장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했고 새 사람이 되었고 새 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장 7절에는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하는 질문입니다. 사울이 구원을 받았을까요. 불과 이런 표현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몇 장 뒤에 사울에 대한 정반대의 표현이 나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질 때부터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왕에 대한 요구 등으로 볼 때 불안한 요소가 있기는 했습니다. 사울에 대해 하나님은 크게 두 가지 일을 책잡으십니다. 하나는 블레셋과의 전투, 나머지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의 일입니다. 블레셋은 해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고 아말렉은 더 밑에서 내려온 자들인데 강대하고 잔인한 민족들입니다. 두 전쟁에서 다 이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 다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긴 전쟁에서 정작 사울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첫 번째 밋마스 전투에서 블레셋이 올라옵니다. 이에 대해 사울이 먼저 전쟁을 하기 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로 합니다. 제사는 모두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제사를 사무엘이 드리게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칠 일 동안 기다려도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먼저 흩어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블레셋 사람들은 점점 밋마스라는 도시로 근접해 옵니다. 그러나 성경의 표현으로 부득이하게 번제와 화목제 중 번제를 먼저 사울이 직접 드리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거 아닙니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해서는 철저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썩은 물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흠 없고 점 없는 말씀 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전쟁을 이기게 하시는데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열한 시 오십구 분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사람들도 떠나고 적들도 몰려옵니다. 십자가에 흑암이 몰려들었을 때 주님이 '다 이루었다' 하면서 죽으시듯 항상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다려도 안 되니 뭐 어떻겠습니까' 하면서 이를 어기는 것입니다. '부득이하게' 입니다. '부득이하게'라는 것이 진정 그렇습니다.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망령되이 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씀이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맞는 자를 찾는다고 하십니다. 전쟁은 이깁니다. 그러나 사울은 망령되이 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2) 두 번째 불순종
이어서 나오는 아말렉과의 전투입니다. 이 전투도 분명히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데 그들의 소유를 남기지 말고 모든 짐승과 아이들까지 다 죽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적 상황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잔인하신 하나님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아말렉을 완전히 없애라고 하나님이 명령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이 전투에서 사울과 백성이 먼저 그 아말렉 왕을 살려 놓습니다. 그리고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기름진 것, 어린양의 좋은 것을 남겨 둡니다. 나중에 그 이유로 사울이 말하길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여 아말렉을 진멸하였으나 제사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겼다고 말입니다.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 다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제사 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겼다고 변명을 하니 본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두 번이나 후회하셨다는 말을 쓰십니다. 15장 11절과 31절입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이 나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그리고 이어지는 23절은 거역한 것이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우상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 하나님을 내가 조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예배드리고 내 기분대로 헌신하는 것이 바로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마음, 육체에 속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사울의 변덕
'사울의 정신분석'이라는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 사울이 한마디로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라는 책입니다. 사울에 대해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전쟁할 때 금식을 선포하고 어기면 죽일 것이라고 하는 등 열심을 보입니다. 법궤도 가져옵니다. 그런데 금식을 선포할 때 아들 요나단이 꿀을 찍어 먹으니 죽이지 않습니다. 법궤도 그렇습니다. 전쟁 중에 제단도 쌓습니다. 이런 사울의 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모습으로는 자기 마음대로 살려 놓고 나중에 예배드리겠다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열심이 있는데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사무엘이 없어지니 미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접한 무당을 찾아 사무엘을 찾아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그 약속은, 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 16:14). 여기서 말할 바는 아니지만 사울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교훈하시고자 하나님이 이 일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기록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중심이 합한 자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대할 때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사랑했다 하면서도 창으로 죽이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지켜야 할 군대를 풀어 사위를 잡으러 쫓아다닙니다. 사위 뽑을 때도 얼마나 시험을 거쳐 좋은 자로 뽑았습니까? 왜 사울이 이렇게 다윗을 죽이려 했을까요? 성경은 사울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즉 자기를 떠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적 시기심입니다(삼상 18:28-29). 사울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심을 알아서 더욱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더욱 무릎을 꿇고 함께 '아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위와 함께 하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4.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다윗
다윗은 쫓겨 갔습니다. 해변가에 있는 가드의 왕, 블레셋 쪽으로 도망칩니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 그 땅으로 쫓겨서 도망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노래가 퍼집니다. 그러니 다윗을 죽이려 하는데 다윗이 이를 면하기 위해 미친 척을 합니다. 그래서 압둘라 굴로 도망칩니다. 그때 지은 시편이 56편입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유리함을 계수하셨다는 것은 도망 다닌 거리를 아신다는 말입니다. 내 눈물을 업신여기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내 눈물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시적인 표현입니다. 다윗은 구약에서 가장 많이 도망다닌 사람입니다. 신약에서는 바울입니다. 성경에서 길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이 말을 한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같은 장 4절에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시 56:4; 10). 즉,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눈물 흘리며 유리하며 애쓴 것을 주의 책에 기록하라고 한 것이 8절의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말씀을 찬송하고 여호와를 의지한 것은 바로 말씀을 지킨 것을 의미합니다. 압둘람의 굴에서 다윗이 잡은 것은 말씀입니다. 내가 죽고 싶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찬송할지어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시편이 바로 56편이 바로 그때 쓴 글입니다.
5. 어린아이같이 하나님께 물으라
하나님이 사울을 죽게 하십니다. 길보아 전투에서 처참하게 죽게 하십니다. 이방 신전에 목이 걸리고 자식도 셋이 같이 죽습니다. 역대상에 보면 그 이유로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던 것을 꼽습니다. 안 물은 것이 죄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품에 안기고 물어야 합니다. 안 묻는 것이 죄입니다. 물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말입니다. 자기가 멋대로 행하면, 세 살짜리 아이가 라면 물을 끓이면 다칩니다. 다윗은 어땠을까요? 다윗에 대해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묻지 않았고 다윗은 물었습니다. 우리는 다 똑같습니다. 우리 지혜, 꾀, 힘 믿지 마십시오. 다윗이 도망갔을 때 그일라라는 동네를 구해 냅니다. 쫓겨 가면서도 자기 민족을 생각합니다. 그 때도 다윗은 묻자와 이르되, 아말렉을 칠 때도 묻자와 이르되 합니다. 헤브론에 가서 왕이 될까 어쩔까 할 때도 여쭈어 이르되 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때도 여쭈어 이르되 했습니다. 여쭌다는 것, 묻는다는 것은 동행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로 품에 안겨서 묻는 것입니다. 안고 가시는 것입니다. 사울은 정신병자 같고 다윗은 어린아이 같습니다. 두 간극은 큽니다. 다윗은 법궤를 매고 가면서 옷이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춥니다. 이것은 미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묻지 않고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묻는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6. 말씀 가운데 함께 계시고 이루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실 때 가장 자신을 잘 드러내십니다. 아브라함의 언약, 할례의 언약을 맺을 때 그렇습니다. 언약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보내셔서 언약 백성 삼아 주신 것입니다. 모든 언약과 명령을 다 행하신 예수로 우리의 언약을 삼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16:8). 앞에 있는 것, 오른쪽에 있는 것이 모두 함께 계심을 의미합니다. '앞에'라고 하면 엘리야가 떠오릅니다. 바알의 거짓 제사장들을 다 죽이고 도망칠 때 브엘세바에 갑니다. 거기에서 로뎀나무 아래서 죽고자 할 때 하나님이 까마귀로 먹이를 먹이시고 사십 주야로 달려 호렙산에 가게 하십니다. 호렙산은 십계명을 받은 산입니다. 거기에 보면 엘리야의 굴이라고 있습니다. 사실 지어낸 것이지만 말입니다. 어쨌거나 그 굴이 험합니다. 그런데 그 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 임한 것으로 성경이 말합니다. 여호와 말씀이 임해서 그 앞에서 산에 서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강한 바람, 지진, 불이 있을 때라도 여호와가 계시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 세상과 자연의 징조가 있어도 그것이 여호와의 계심의 증거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대신 세미한 음성을 말씀하십니다. 세미한 음성을 듣고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세미한 음성을 듣는 것이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우리가 행할 수 없는데 예수가 이 모든 일을 행하시고 우리에게 그 일을 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니 우리가 '아멘' 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7. 주의 말씀을 붙들고 부르짖는 자에게 위로가 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 39:12). 이런 구절들이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힘들 때면 눈에 보입니다. 시편에서 기도는 곧 부르짖음입니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시 89:15). 이것도 여쭙는 것입니다. 즐겁게 소리친다는 말은 여쭙는 것입니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시 105:3).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여러 생각하지 마십시오. 조금 있다 기도하면 즐거워진다고 생각하십시오. 이 즐거움이 있으면 다 이깁니다. 이 즐거움이 있으면 다 이깁니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 것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시 119:116). 지난 주 신명기 4장 4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붙어 떠나지 않는 것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신 4:4). 우리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8. 결론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그런데 타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그 생각을 하고 '아멘' 했습니다. 성경에 불이 붙는데 성경이 타지 않습니다. 성령의 불, 은혜의 불, 믿음의 불입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에 이 불이 붙어야 합니다. 그 불은 바로 성경입니다. 지진도 바람도 불도 아닙니다. 말씀입니다. 성경이 냉랭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 불이 붙는데 그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이 붙어서 타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청종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청종, 순종, 듣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불을 더 활활 타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멘' 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마시고 '아멘' 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먼저 행하시고 친히 싸우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믿음의 용장들은 엘리야건 누구건 다 혼자 말씀 붙들고 믿음의 굴로 들어갔습니다. 말씀 붙들고 아둘람 굴로 들어가십시오.
2021년 2월 14일 주일낮예배 설교 |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3
듣고 청종함 가운데 함께 하심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사무엘상 15:22-24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녹취록
1.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함께 계심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울이 하나님과 멀어지는데, 어떻게 해서 멀어지느냐, 다름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버려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말씀 가운데 함께 계심인데,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가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 함께 하심의 모습이라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그 영광을 말씀 가운데 나타내시고, 그 정점, 절정이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요 1:12-14). 그래서 그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떨기나무에 붙이 붙어서 타지 않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임재입니다. 여호와의 임재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 증거로 율법을 수여하신 것을 우리가 지난 주에 봤습니다. '오트'라는 히브리어를 말씀했습니다. 즉, 함께 하심의 증거가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두 돌판에 새기시고 그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의 증거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는 과거뿐 아니라 앞으로 될 일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건져 내시고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할테니 빨리 데리고 나오라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든지 약속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이 세상의 어떤 말과도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시하면 이미 목적지에 계시고 언약하면 이미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시는 대속과 전가의 은혜가 이미 역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창세 전에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역사상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꽃도 풀도 시들지만 영존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2.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임마누엘 하나님의 계시가 말씀입니다. 성자, 제2위 하나님이 말씀이신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누히 살펴본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그런데 그 예수가 무엇의 성취냐, 바로 임마누엘의 성취인 것입니다(마 1:23; 사 1:7). 이것을 우리가 징조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의 증거와 이사야 7장 14절의 징조가 히브리어로 '오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의 성취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은 구원인데 그 구원의 본질이 임마누엘, 예수가 우리와 하나가 되고 예수가 우리 안에 사는 것(갈 2:20)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함께 우리와 계시는 것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가 나설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우리 어머니들이 그러하셨듯 이불을 준비하고 빨고 꿰맨 후에 아이들에게 이불을 깔라고만 하는데 아이들은 자기가 다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에게 또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방황하고 유리했다고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안고 가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
1) 첫 번째 불순종
본문 말씀의 주인공은 사무엘도 사울도 아닙니다. 사실상 하나님이십니다. 연초에 긍정적인 본문을 잡고 싶었지만 그래도 본문은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보고자 합니다. 사울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키도 크고 준수하게 생겼습니다. 자기 생업에도 철저했고 효도도 했고 겸손하기도 했습니다. 베냐민 지파, 자신의 지파에 대해 별 볼일 없다고 표현했으며 기름을 부으러 가니 짐꾸러미 뒤에 숨기도 했습니다. 특히 10장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했고 새 사람이 되었고 새 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장 7절에는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하는 질문입니다. 사울이 구원을 받았을까요. 불과 이런 표현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몇 장 뒤에 사울에 대한 정반대의 표현이 나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질 때부터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왕에 대한 요구 등으로 볼 때 불안한 요소가 있기는 했습니다. 사울에 대해 하나님은 크게 두 가지 일을 책잡으십니다. 하나는 블레셋과의 전투, 나머지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의 일입니다. 블레셋은 해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고 아말렉은 더 밑에서 내려온 자들인데 강대하고 잔인한 민족들입니다. 두 전쟁에서 다 이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 다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긴 전쟁에서 정작 사울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첫 번째 밋마스 전투에서 블레셋이 올라옵니다. 이에 대해 사울이 먼저 전쟁을 하기 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로 합니다. 제사는 모두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제사를 사무엘이 드리게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칠 일 동안 기다려도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먼저 흩어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블레셋 사람들은 점점 밋마스라는 도시로 근접해 옵니다. 그러나 성경의 표현으로 부득이하게 번제와 화목제 중 번제를 먼저 사울이 직접 드리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거 아닙니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해서는 철저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썩은 물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흠 없고 점 없는 말씀 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전쟁을 이기게 하시는데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열한 시 오십구 분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사람들도 떠나고 적들도 몰려옵니다. 십자가에 흑암이 몰려들었을 때 주님이 '다 이루었다' 하면서 죽으시듯 항상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다려도 안 되니 뭐 어떻겠습니까' 하면서 이를 어기는 것입니다. '부득이하게' 입니다. '부득이하게'라는 것이 진정 그렇습니다.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망령되이 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씀이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맞는 자를 찾는다고 하십니다. 전쟁은 이깁니다. 그러나 사울은 망령되이 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2) 두 번째 불순종
이어서 나오는 아말렉과의 전투입니다. 이 전투도 분명히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데 그들의 소유를 남기지 말고 모든 짐승과 아이들까지 다 죽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적 상황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잔인하신 하나님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아말렉을 완전히 없애라고 하나님이 명령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이 전투에서 사울과 백성이 먼저 그 아말렉 왕을 살려 놓습니다. 그리고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기름진 것, 어린양의 좋은 것을 남겨 둡니다. 나중에 그 이유로 사울이 말하길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여 아말렉을 진멸하였으나 제사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겼다고 말입니다.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 다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제사 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겼다고 변명을 하니 본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두 번이나 후회하셨다는 말을 쓰십니다. 15장 11절과 31절입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이 나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그리고 이어지는 23절은 거역한 것이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우상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 하나님을 내가 조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예배드리고 내 기분대로 헌신하는 것이 바로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마음, 육체에 속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사울의 변덕
'사울의 정신분석'이라는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 사울이 한마디로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라는 책입니다. 사울에 대해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전쟁할 때 금식을 선포하고 어기면 죽일 것이라고 하는 등 열심을 보입니다. 법궤도 가져옵니다. 그런데 금식을 선포할 때 아들 요나단이 꿀을 찍어 먹으니 죽이지 않습니다. 법궤도 그렇습니다. 전쟁 중에 제단도 쌓습니다. 이런 사울의 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모습으로는 자기 마음대로 살려 놓고 나중에 예배드리겠다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열심이 있는데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사무엘이 없어지니 미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접한 무당을 찾아 사무엘을 찾아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그 약속은, 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 16:14). 여기서 말할 바는 아니지만 사울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교훈하시고자 하나님이 이 일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기록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중심이 합한 자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대할 때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사랑했다 하면서도 창으로 죽이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지켜야 할 군대를 풀어 사위를 잡으러 쫓아다닙니다. 사위 뽑을 때도 얼마나 시험을 거쳐 좋은 자로 뽑았습니까? 왜 사울이 이렇게 다윗을 죽이려 했을까요? 성경은 사울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즉 자기를 떠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적 시기심입니다(삼상 18:28-29). 사울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심을 알아서 더욱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더욱 무릎을 꿇고 함께 '아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위와 함께 하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4.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다윗
다윗은 쫓겨 갔습니다. 해변가에 있는 가드의 왕, 블레셋 쪽으로 도망칩니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 그 땅으로 쫓겨서 도망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노래가 퍼집니다. 그러니 다윗을 죽이려 하는데 다윗이 이를 면하기 위해 미친 척을 합니다. 그래서 압둘라 굴로 도망칩니다. 그때 지은 시편이 56편입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유리함을 계수하셨다는 것은 도망 다닌 거리를 아신다는 말입니다. 내 눈물을 업신여기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내 눈물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시적인 표현입니다. 다윗은 구약에서 가장 많이 도망다닌 사람입니다. 신약에서는 바울입니다. 성경에서 길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이 말을 한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같은 장 4절에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시 56:4; 10). 즉,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눈물 흘리며 유리하며 애쓴 것을 주의 책에 기록하라고 한 것이 8절의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말씀을 찬송하고 여호와를 의지한 것은 바로 말씀을 지킨 것을 의미합니다. 압둘람의 굴에서 다윗이 잡은 것은 말씀입니다. 내가 죽고 싶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찬송할지어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시편이 바로 56편이 바로 그때 쓴 글입니다.
5. 어린아이같이 하나님께 물으라
하나님이 사울을 죽게 하십니다. 길보아 전투에서 처참하게 죽게 하십니다. 이방 신전에 목이 걸리고 자식도 셋이 같이 죽습니다. 역대상에 보면 그 이유로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던 것을 꼽습니다. 안 물은 것이 죄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품에 안기고 물어야 합니다. 안 묻는 것이 죄입니다. 물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말입니다. 자기가 멋대로 행하면, 세 살짜리 아이가 라면 물을 끓이면 다칩니다. 다윗은 어땠을까요? 다윗에 대해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묻지 않았고 다윗은 물었습니다. 우리는 다 똑같습니다. 우리 지혜, 꾀, 힘 믿지 마십시오. 다윗이 도망갔을 때 그일라라는 동네를 구해 냅니다. 쫓겨 가면서도 자기 민족을 생각합니다. 그 때도 다윗은 묻자와 이르되, 아말렉을 칠 때도 묻자와 이르되 합니다. 헤브론에 가서 왕이 될까 어쩔까 할 때도 여쭈어 이르되 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때도 여쭈어 이르되 했습니다. 여쭌다는 것, 묻는다는 것은 동행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로 품에 안겨서 묻는 것입니다. 안고 가시는 것입니다. 사울은 정신병자 같고 다윗은 어린아이 같습니다. 두 간극은 큽니다. 다윗은 법궤를 매고 가면서 옷이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춥니다. 이것은 미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묻지 않고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묻는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6. 말씀 가운데 함께 계시고 이루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실 때 가장 자신을 잘 드러내십니다. 아브라함의 언약, 할례의 언약을 맺을 때 그렇습니다. 언약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보내셔서 언약 백성 삼아 주신 것입니다. 모든 언약과 명령을 다 행하신 예수로 우리의 언약을 삼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16:8). 앞에 있는 것, 오른쪽에 있는 것이 모두 함께 계심을 의미합니다. '앞에'라고 하면 엘리야가 떠오릅니다. 바알의 거짓 제사장들을 다 죽이고 도망칠 때 브엘세바에 갑니다. 거기에서 로뎀나무 아래서 죽고자 할 때 하나님이 까마귀로 먹이를 먹이시고 사십 주야로 달려 호렙산에 가게 하십니다. 호렙산은 십계명을 받은 산입니다. 거기에 보면 엘리야의 굴이라고 있습니다. 사실 지어낸 것이지만 말입니다. 어쨌거나 그 굴이 험합니다. 그런데 그 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 임한 것으로 성경이 말합니다. 여호와 말씀이 임해서 그 앞에서 산에 서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강한 바람, 지진, 불이 있을 때라도 여호와가 계시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 세상과 자연의 징조가 있어도 그것이 여호와의 계심의 증거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대신 세미한 음성을 말씀하십니다. 세미한 음성을 듣고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세미한 음성을 듣는 것이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우리가 행할 수 없는데 예수가 이 모든 일을 행하시고 우리에게 그 일을 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니 우리가 '아멘' 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7. 주의 말씀을 붙들고 부르짖는 자에게 위로가 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 39:12). 이런 구절들이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힘들 때면 눈에 보입니다. 시편에서 기도는 곧 부르짖음입니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시 89:15). 이것도 여쭙는 것입니다. 즐겁게 소리친다는 말은 여쭙는 것입니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시 105:3).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여러 생각하지 마십시오. 조금 있다 기도하면 즐거워진다고 생각하십시오. 이 즐거움이 있으면 다 이깁니다. 이 즐거움이 있으면 다 이깁니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 것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시 119:116). 지난 주 신명기 4장 4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붙어 떠나지 않는 것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신 4:4). 우리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8. 결론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그런데 타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그 생각을 하고 '아멘' 했습니다. 성경에 불이 붙는데 성경이 타지 않습니다. 성령의 불, 은혜의 불, 믿음의 불입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에 이 불이 붙어야 합니다. 그 불은 바로 성경입니다. 지진도 바람도 불도 아닙니다. 말씀입니다. 성경이 냉랭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 불이 붙는데 그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이 붙어서 타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청종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청종, 순종, 듣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불을 더 활활 타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멘' 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마시고 '아멘' 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먼저 행하시고 친히 싸우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믿음의 용장들은 엘리야건 누구건 다 혼자 말씀 붙들고 믿음의 굴로 들어갔습니다. 말씀 붙들고 아둘람 굴로 들어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