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8][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9)] 항상 성전에 계심 (대하 7:14-1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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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8][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9)] 항상 성전에 계심 (대하 7:14-18) 문병호 목사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17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법규를 지키면

18   내가 네 나라 왕위를 견고하게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버지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하리라




<녹취록>



1. 성전 완공 


솔로몬이 7년간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 낙성식 중에 하나님이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시는 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영원히 그곳에 계시며 그곳에 눈과 귀를 두시고, 그곳에서 복을 주시고 말씀의 뜻을 알리시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전에 6장을 보시면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고 난 후 열왕기에는 연설했다고 나오는, 백성을 전체적으로 축복하고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일이 마땅합니다. 연설하고 축복하고 기도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연설이라는 것은 성전 건축의 의미를 말한 것이요, 그리고 백성들을 축복하고 기도한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이 내용이 역대하 6장에 나오고 이어서 본문이 등장합니다. 역대하 6장의 말씀은 이 성전의 어떠함을 잘 나타냅니다. 우선 2절은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라고 합니다. 성전은 지난 주 본 것처럼 건축 후 완전히 훼파되고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파괴됩니다. 단지 지금에는 통곡의 벽이라 하여 성전 벽만 조금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하면 어떻게 영원히 계실 처소라고 하셨는가, 이것은 신약에 성전되신 주님, 성전보다 크신 이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됩니다. 또한 그를 믿기만 하면 우리가 성전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성전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곳에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지어진 특정한 형태의 장소와 건물이라면 그것은 크게 보면 예표요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하고 영원한 성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의 손이 이루셨도다"


"왕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입으로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그의 손으로 이루셨도다 이르시기를"(대하 6:4). 다윗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이루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나 다윗의 손이 아니라 말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것입니다.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말씀을 지키시되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대하 6:15). 이것은 예의상 하거나 둘러대는 말이 아닙니다. 주의 일을 하는 자의 마땅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교회를 하나님이 짓지요. 성전을 하나님이 짓지요. 식양대로 어김없이 말씀대로 지은 것입니다. 재료도 크기도 심지어 섬기는 사람도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사람의 열심이 아닙니다. 사람은 잘해야 울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울며 눈물로 씨를 뿌리는(시 126편) 것은 그저 사람이 할 일입니다. 울며 엉엉 다니면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재벌이라고 교회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십니다.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주의 손으로 이루십니다. 우리의 모든 고백이 이것입니다. 칼빈의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의 섭리는 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손에도 있습니다. 보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친히 일하십니다. 세상은 감독관이 잘하나 지켜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눈으로 감찰하시고 권고하실 뿐 아니라 손으로 직접 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집을 하나님이 친히 짓지 아니하셨겠습니까? 



3. "내 이름을 둘 만한 집"


그곳에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자기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부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요 본질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출 3:12). 그리고 하나님은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저러니까 하나님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른 이름을 붙이면 제한하는 것이 됩니다. 상천하지에 유일하신 하나님, 스스로 있는 자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그 이름을 둘 만한 곳이라고 하심은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하는 주의 전을 의미합니다. 



4. 지성소에 자리한 법궤


이어지는 11절은 그곳에 언약궤를 두었다고 합니다. "내가 또 그 곳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넣은 궤를 두었노라 하니라"(대하 6:11). 성전이 지어지니 이제 각각 따로 있던 성소/지성소, 법궤가 지성소 안에 들인 것입니다. 법궤는 주의 능력의 궤라고도 합니다. 두 돌판의 말씀입니다. 지난 주에 본 것처럼 말입니다.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있지만, 지금 성전을 건축할 때는 두 돌판만 남은 것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언약궤는 주의 능력의 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면서 한 말입니다. 성전은 바로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곳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영원히 계신 처소입니다. 신약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친히 보내셔서 그로 성전을 삼으셨습니다. 아들을 죽기까지 복종하게 하셔서 그 상한 살이 지성소가 되게 하시고 생명의 살 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십자가의 지성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 아들의 살이 찢긴 것이 휘장이 찢긴 것이요, 그 살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지성소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의미입니다. 구약의 말씀은 그러므로 이것을 미리 표한 것, 예표인 것이요 실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솔로몬의 기도


1) 언약의 열매


그 후에 솔로몬이 기도합니다. 이 때가 아마 솔로몬의 최고의 신앙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기도를 하는데 대를 놓고 높이가 1미터, 너비와 길이가 2미터 정도 되는 거기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이 정도 크기의 바위를 보시면 꼭 기도를 해 보십시오.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여기서도 보면 기도하면서 15절에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하신 분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시고 짓기 전에도 계셨습니다. 그러니 사실 성전에 들어와 계시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런 언약을 주셨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언약이 있으므로 우리도 모든 것을 합니다. 언약이 없으면 예배도 헌신도 부질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으므로, 그리고 그 말씀으로 이곳에 터를 잡고 성전을 지으라고 하셨으므로 그래서 우리가 '아멘' 하고 순종할 때 그 약속의 말씀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복, 말씀의 복입니다. 


2) 하나님이 성전에 들어가심


그래서 하늘의 하늘이라도 용납하지 못할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멋대로 하면 안 됩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성전을 지었는데 동쪽 문으로 영광이 들어가시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처를 정하여 들어가시는 것이지 우리가 임의로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과 수업하면서 그런 비유를 든 적이 있습니다. 튜브에 바람이 들어오면 그것이 모양을 잡는 것이지 먼저 튜브가 모양을 잡고 바람이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은혜가 들어오면서 내 자리가 잡히는 것이지 제가 준비된 자리니까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유의 하나님이 왜, 어떻게 우리 가운데 들어오십니까. 이렇게 보면 우리가 도구가 된다는 것은 은혜가 임해서 그런 것이지, 도구가 돼서 뭔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기도하는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힘들었고 수고했는지 아시냐고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셨다고 고백하고, 두렵고 떨리나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이곳에 좌정하시라고 말합니다. 하늘의 하늘도 하나님을 용납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들어오도록, 동기도 방법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하고"(대하 6:2). 


3) 환난 때 성전 기도


이후 성전 안에서의 기도와, 성전을 향하는 기도가 반복하여 나옵니다. 22절부터 42절은 솔로몬이 길게 기도합니다. 22절은 범죄하고 맹세를 하고 제단에서 기도하거든 들어주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24절은 이스라엘이 범죄를 해서 적국에 패하여 기도하거든 또 적군을 물리쳐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26절은 주의 백성이 범죄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주의 백성이 엉엉 울며 기도하면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르난 타작 마당에서 전염병이 임했을 때 다윗이 기도하니 불이 내려 응답하신 바로 그 자리입니다. 지금 기도하는 성전이 말입니다. 솔로몬은 제정신일 때 다윗이 하는 대로 합니다. 그것만 보면 됩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구하니 그런 것입니다. 다윗이 한 것을 그대로 한 것일 뿐입니다. 2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근이나 전염병이나 곡식이 시들거든, 농사 짓는 사람에게 간절한 일이 생기거든, 그때 손을 펴고 기도하면 도움을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전적으로 주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말씀하신 것을 주의 손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나는 손을 폈으니 하나님이 하시라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전염병을 전세계가 이길 수 없습니다. 출애굽 때와 별반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이 말입니다. 주를 향해 손을 펴야지 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 하나 이렇게 기도합니다. 지도자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32절을 보면 이방인에 대해서도 그들이 기도하거든 도와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36절은 놀라운 기도를 보여 줍니다. 포로로 잡혀갈 때 기도하거든 풀어 주시도록 말입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이 잡혀 간 후 바사 왕 고레스에게 하나님의 영에 그가 갑작스럽게 감동되어, 하나님의 전적 역사로 훔쳐온 것들을 다 내놓고 가서 성전 지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하수에로 왕 역시 가서 성벽을 재건하라고 합니다. 기도는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선대의 기도는 후대에 역사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우리 부모님들 바로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선대의 기도가 그냥 끊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자식들에게 급할 때 신호등 하나라도 주장하십니다. 그래서 별탈 없게 만들어 주십니다. 솔로몬이 이때 제정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는데 나중에 너무나 방종하는 것과 달리 말입니다. 솔로몬 이후 한 대를 못가고 나라가 쪼개집니다. 하나님 앞에 애통하고 구할 때가 복된 것이지 간증하고 다닐 때 복된 것이 아닙니다. 간증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면 됩니다. 그저 내 모습에 감동을 받게 되면 그런 것이지 굳이 할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 말하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은혜가 되냐고 말입니다. 왜 방송에 탤런트 등이 나와서 맨날 간증만 합니까. 성경 읽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 한국교회가 힘이 없는 것입니다. 


4) 성전이신 그리스도


"여호와 하나님이여 일어나 들어가사 주의 능력의 궤와 함께 주의 평안한 처소에 계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하옵건대 주의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입게 하시고 또 주의 성도들에게 은혜를 기뻐하게 하옵소서"(대하 6:41);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겔 43:5). 우리가 뭘 만들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의 생수가 동쪽 문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들어갑니다. 성전에 물이 가득 차는 것이 영광이요 주의 임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물가 옆으로 식물이 나는데 아픈 것을 낫게 하는 약재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있는 곳에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것이 에스겔의 환상입니다. 성읍의 중심이 성전입니다. 여호와 삼마, 여호와께서 그 성에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새 예루살렘, 그 성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전이 누구냐, 바로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입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이곳이 바로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리스도가 성전이요 우리는 그와 한 몸된 신부이니 우리가 성전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지막 상태입니다. 지금은 예표인 것입니다. 성전보다 큰 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 예수님과 우리가 믿어 하나되는데, 그 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가 되면 부활하고 마지막 심판을 거쳐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때는 예배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성전이 되십니다. 



6. 결론: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써 구하게 되고 은혜로써 응답을 받는다


그리고 본문 말씀이 나옵니다. 법궤가 있는 곳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다윗의 간절함이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교회에 와서 주의 이름을 많이 부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이 가장 빛나는 것이 이스라엘, 곧 여호와와 겨루어 이기었다는 그 이름입니다. 바로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이 네 가지가 은혜입니다. 우리가 악한 길을 떠나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그 길에서 빠져나옵니다. 우리가 준비되어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성전입니다. 이미 오르난 타작 마당도 봤지만, 교회의 출발은 회개입니다. 다윗이 잘못했을 때 재앙이 임하니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기도할 때, 그 죄사함을 여호와 이레, 이삭 대신 친히 준비하신 어린양을 제공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회개하는 곳, 속죄제, 속건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어 15절은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인다고 하십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말하면 엄마가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16절은 내 눈과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고 이름이 여기에 영원히 있음이라고 하십니다. 이 땅에서는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요한계시록과 같은 상황이 지금 바로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곳이지 지금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가운데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법규를 지키면"(대하 7:17).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항상 말씀으로 그러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 능력의 궤'라고 법궤를 칭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들려주시고 너희가 가서 행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능력을 말씀 그 자체를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고요한 곳에 앉아 혼자 성경을 읽는 것도 좋지만 성전에서 들려주는 말씀 그 자체에 이미 아멘과 능력의 역사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 이름을 그곳에 두고 항상 너희와 함께 있고 눈을 들어 귀를 기울인다고 하신 말씀과 약속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단어, 언약, 말씀의 약속인 것입니다. 성전의 임재와 말씀, 법궤의 능력이 언약의 백성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백성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