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5)] 예배와 안식일 (요 4:21-2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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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5)] 예배와 안식일 (요 4:21-26) 문병호 목사
(요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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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말씀과 예배
오늘은 예배에 대한 부분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됩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남편은 남편인지 잘 모릅니다. 아주 불행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습니다. 혈통이 섞이고 땅이 더럽혀졌습니다. 여러가지 사마리아 땅 자체의 조건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더럽혀진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마리아인의 한계와 함께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라고 기록합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수치로움이 많았던 자입니다. 그래서 여섯 시쯤, 지금 시간으로 정오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 지역은 매우 더운 곳입니다. 그래서 정오에 온다는 말은 사람들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그 수치의 정오가 이제 구원의 시간, 영광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내팽개쳐지고 세상에서 도무지 의지할 곳이 없는 그런 우리의 시간, 공간, 형편, 그때가 바로 어떻게 보면 주님이 나타나실 때입니다. 이 여인에게 유대에서 올라온 우리 주님이 나타나셔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내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따분하게 날마다 길어서 먹는 그런 물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 이것은 바로 구원이자 영생입니다. 샘물에 대해 먼저 말씀해 줍니다.
둘째, 구원에 이어 예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곤고함을 구원과 예배로써 위로하고 치료하십니다. 지금까지 예배의 장소나 산, 산당, 회당, 예루살렘을 따지지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때가, 그리고 지금까지는 모르는 것을 맹목적으로 예배했다면 이제는 알고 예배드리는 때가 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형편을 묻지 않고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 말씀하는 것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그 사람 자신의 됨됨이나 다른 것이 아닌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말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말씀과 영과 진리와 예배의 말씀을 듣고 사마리아 여인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그리고 와서 메시아를 보라고 합니다.
2. 말씀과 예배
우리가 곤고할 때 치료를 받는 것은 갈하지 않는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를 만나고, 그러고 나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가 온전치 않으면 마른 두레박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참 경건은 하나님의 계시를 내려받고 예배를 올려드리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을 내려받지 않으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모르는 것을 60년, 70년, 날마다, 새벽마다 예배하는 것입니다. 참 지식이 없이는 참 예배가 없습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전 5:1). 호세아서도 당대 음란함의 핵심이 아는 것이 없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헤세드’와 ‘다트’, 인자와 지식이 함께 있어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호 4:6);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말 2:7). 제사장의 입에서 말씀을 구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저도 여러분께 줄 것이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 조금 할 뿐입니다.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성도들이 목사의 입에서 구할 것은 윤리나 심리나 세상의 삶의 도리나 가치가 아닙니다. 목사님 입에서 구할 것은 율법,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나깨나 기도하고 말씀 붙들고 있는 것이 목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이 있어야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호세아 시대의 답답함의 중심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부재가 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출판 관련하여 간 곳에 기자들이 오고 여러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교개혁 전야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너무 희박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진리를 알리려고 책을 번역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호세아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안 들어오고 성전 뜰만 밟고만 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십니다.
요새 교회에 여러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사랑의교회 수석 부목사의 말씀이 그 교회는 60%가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산정현교회 목사님은 코로나 시대의 예배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리고 온라인 헌금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번제보다 여호와를 아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헌금보다 말입니다. 그저 계좌 이체가 됐다고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의 형상과 지식과 예배
하나님은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고 그로부터 영광 받으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모든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 19:1-6).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계심을 알려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열기가 가득 차서 만물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알려 주셔도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기 싫어합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저 눈 뜨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찾아야 하는데 사람과 다른 것을 찾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꾼다고 로마서 1:22-23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모르면 끝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다고 말씀합니다(롬 1:25).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 것이 다 우상숭배입니다. 오직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만을 섬겨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말씀 읽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끊어지고 세상에서도 선한 것으로 퍼뜨릴 수가 없습니다.
4. 자의적 숭배
사람의 계명에 따른 예배는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9),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골 2:22). 사람 위주의 예배가 요새 너무 많습니다. 어떤 교회는 주일 설교가 5분입니다. 일주일에 5분 말씀 듣는 것으로 되겠습니까? 종교개혁 때는 2시간 이상 했습니다. 영국에서 학교 주변에 예배한다고 하는 곳에 가 보니 말씀도 없고 그저 뛰어다니고 빙빙 돕니다. 그러다가 인도자가 기도한 후 예배 마쳤다고 집에 갑니다.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 따른 예배를 자의적 숭배(골 2:23)라고 합니다. 그것은 육체를 금하기는커녕 육체에 얽매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예배드리면 육체에 끝내 얽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래서 허무하고 허탄해집니다. 사람 얼굴만 보고 가는 것입니다. 일 년 내내 여호와의 면전에서 코람데오는 없고 사람 얼굴만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예배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합니다. 이제 주님이 오신 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게 하시기 위함인데 그 영이 바로 보혜사 성령입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 영생, 구원에 이어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예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곳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두 가지 가르침,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신약시대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중보자이시고 세세에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시고 길이자 진리고 생명이십니다. 그로 말미암지 않고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6. 말씀 붙들고 기도해야 영광을 돌린다
참 제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자기 자신을 드려 섬기는 데 있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신 6: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같은 것을 신약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 붙들고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송영이 안 나옵니다. 말씀 붙들고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것이 없습니다. 5분만 기도해도 다리가 저립니다. 그러나 말씀 붙들고 기도하면 한 시간, 두 시간도 기도하게 하십니다. 일어서기가 싫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고 기도해야 송영이 생깁니다. 아니면 송영이 없습니다. 자의적 숭배는 헛되고 곧 사라지고 맙니다. 내가 어떤 것으로 기쁘고 슬프고 하는 기복이 아닌 기쁘나 슬프나 말씀은 세세토록 영존하므로 시들거나 마르지 않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송영이 넘치고 빛이 가득 찹니다. 호세아서부터 여호와를 아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제물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의 말씀 듣고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 먼저 하는 것이 예배 기도, 공기도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중심입니다. 그러고 나서 사기도, 개인기도가 있습니다. 사실상 기도나 말씀이나 찬송이나 전부 다 예배입니다. 예배의 찬송이고 예배의 기도이고 예배의 말씀입니다. 말씀 선포가 예배 가운데 드려져야 설교라고 합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깊은 송영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이것이 바로 로마서의 영적 산 제물을 의미합니다. 항상 쉬지 않고 말입니다.
7. 말씀 붙들고 기도하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제가 이번주 학교 갔는데, 벌이 갑자기 와서 확 쏘았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금방 부어올랐습니다. 집에 오니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어제 설교 쓰면서 그 생각을 해 봤습니다. 벌 대신 차가 왔으면 어땠을까요? 확률이 뭐가 높을까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송영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눅 18:1),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교만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어제인가 그저께 뉴스에 사정은 모르지만 쉽게 절망하고 죽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오직 믿음으로 낙심하지 말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란은 못 견딜 만한 것이 오는 것입니다. 견딜 만한 것은 환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구렁텅이에, 다니엘이 사자 입 앞에,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은 못견딜 만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 앞에 서는 것은 못견딜 만한 것입니다. 소설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리십니다. 더 양심적이라, 더 선하고 착하다는 말이 요새는 그렇게 칭찬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담대해야 합니다. 다니엘이나 그 세 친구나 에스더나 모르드개나 홍해와 여리고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이나 환란 앞에서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견딥니까. 아침의 일을 위해 밤에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견디느냐 말입니다.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는 다릅니다. 바깥에서 놀 때는 다 같아 보여도 우리를 여호와의 집으로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조금 싸우고 다툴 수 있습니다. 이 지상의 삶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갈 곳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에게는 정죄함도, 두려움도, 장래에 환란도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8. 예배 속에서 기도와 말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예배의 주체가 목사가 아닌 모든 회중이듯, 예배 가운데서 회중의 기도의 주체도 모든 회중입니다.
예배는 성경 봉독과 설교의 선포와 믿음의 들음과 찬송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성경 봉독이 있어야 하고 말씀을 풀고 믿음의 들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찬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받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만 있는 말입니다. 예배는 설교의 선포와 믿음의 들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찬은 제정된 말씀과 믿음의 먹음이 있어야 합니다. 분별하지 않고 먹는 것은 오히려 죄를 더하게 합니다. 설교는 믿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가장 은혜로울 때는 목사가 아닙니다. 제 모습입니다. 저도 설교 말씀을 많이 받아 적을 때는 설교한 목사님은 기억도 안 납니다. 제가 은혜 받아서 적은 것입니다. 목사는 그 주에 설교할 것을 선포할 뿐입니다. 성도가 받아 먹어야 합니다. 믿음의 들음, 딱딱한 것을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9. 말씀과 영광
1) 요한복음과 영광
사도 요한은 오늘 말씀을 쓴 자입니다. 사도 요한이 사랑의 사도라고 하지만 저는 영광의 사도라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이전에 있던 교회에서 요한복음을 강해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정중앙인 12장에 이사야 6장의 성전의 환상이 언급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중심되는 것은 영광입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때에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고 스랍, 천사가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스랍의 하나가 제단에 핀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을 지집니다. 그러니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성전 환상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듣기는 해도 듣지 못하고 봐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미 십 분의 일이 남았는데 더 쳐 없앱니다. 그루터기를 말합니다. 그리고 남은 그루터기에는 하나님이 지식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거룩함, 영광이 사도 요한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영광
헬라어로 '독사', 즉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합니다. 바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참 빛으로 오셨는데 그 빛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구원을 이루러 오셨는데 그들이 주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사랑합니다. 영광을 중심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세베데의 아들입니다. 우뢰의 아들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성격이 괴팍했는데 그가 변화되어 주의 영광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영광이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사야 6장에서 나타나신 주님과 요한복음 12장과 요한계시록에서 체험한 영광의 임재가 같습니다. 우리가 묵상해야 할 예수님의 모습은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에 묘사된 그것입니다. 그 예수께 영광을 올리는 데 중요한 것은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1:3). 동방정교회가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것을 가장 강조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지식입니다. 잡다한 도구들이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대성교회에서는 예배 전에 "모든 영광 하나님께"라는 찬송을 드렸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할 때에도 듣는 자와 읽는 자와 행하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과 그로 인한 감사로 빛이 내 안에 확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과 소망이 없이 영광의 송영이 내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6-7).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입니다. 이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고 그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합니다. 그 질그릇인 우리가 바로 성전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성전입니다. 고린도전후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붙잡으면 하나님의 집이라.
10. 결론
말씀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영광 돌릴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기도가 안 됩니다. 몸을 뒤틀게 됩니다. 어려운 말씀을 공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듣고 그 들은 말씀으로 기도하십시오. 그 말씀이 나에게 천금과 같은 보화가 되고 보배가 되고 길을 알려 주고 수렁에서 건져 내고 마지막까지 나를 붙들어서 간혹은 사렙다 과부와 같이 먹고 죽고자 하는 충동이 있어도 회복되는 일이 있습니다.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 험악합니다. 죄를 짓는 모습도 짓고 나서 행동하는 모습도 험악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영광 돌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020071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5)] 예배와 안식일 (요 4:21-2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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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말씀과 예배
오늘은 예배에 대한 부분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됩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남편은 남편인지 잘 모릅니다. 아주 불행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습니다. 혈통이 섞이고 땅이 더럽혀졌습니다. 여러가지 사마리아 땅 자체의 조건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더럽혀진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마리아인의 한계와 함께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라고 기록합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수치로움이 많았던 자입니다. 그래서 여섯 시쯤, 지금 시간으로 정오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 지역은 매우 더운 곳입니다. 그래서 정오에 온다는 말은 사람들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그 수치의 정오가 이제 구원의 시간, 영광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내팽개쳐지고 세상에서 도무지 의지할 곳이 없는 그런 우리의 시간, 공간, 형편, 그때가 바로 어떻게 보면 주님이 나타나실 때입니다. 이 여인에게 유대에서 올라온 우리 주님이 나타나셔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내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따분하게 날마다 길어서 먹는 그런 물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 이것은 바로 구원이자 영생입니다. 샘물에 대해 먼저 말씀해 줍니다.
둘째, 구원에 이어 예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곤고함을 구원과 예배로써 위로하고 치료하십니다. 지금까지 예배의 장소나 산, 산당, 회당, 예루살렘을 따지지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때가, 그리고 지금까지는 모르는 것을 맹목적으로 예배했다면 이제는 알고 예배드리는 때가 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형편을 묻지 않고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 말씀하는 것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그 사람 자신의 됨됨이나 다른 것이 아닌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말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말씀과 영과 진리와 예배의 말씀을 듣고 사마리아 여인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그리고 와서 메시아를 보라고 합니다.
2. 말씀과 예배
우리가 곤고할 때 치료를 받는 것은 갈하지 않는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를 만나고, 그러고 나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가 온전치 않으면 마른 두레박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참 경건은 하나님의 계시를 내려받고 예배를 올려드리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을 내려받지 않으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모르는 것을 60년, 70년, 날마다, 새벽마다 예배하는 것입니다. 참 지식이 없이는 참 예배가 없습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전 5:1). 호세아서도 당대 음란함의 핵심이 아는 것이 없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헤세드’와 ‘다트’, 인자와 지식이 함께 있어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호 4:6);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말 2:7). 제사장의 입에서 말씀을 구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저도 여러분께 줄 것이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 조금 할 뿐입니다.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성도들이 목사의 입에서 구할 것은 윤리나 심리나 세상의 삶의 도리나 가치가 아닙니다. 목사님 입에서 구할 것은 율법,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나깨나 기도하고 말씀 붙들고 있는 것이 목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이 있어야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호세아 시대의 답답함의 중심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부재가 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출판 관련하여 간 곳에 기자들이 오고 여러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교개혁 전야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너무 희박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진리를 알리려고 책을 번역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호세아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안 들어오고 성전 뜰만 밟고만 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십니다.
요새 교회에 여러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사랑의교회 수석 부목사의 말씀이 그 교회는 60%가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산정현교회 목사님은 코로나 시대의 예배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리고 온라인 헌금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번제보다 여호와를 아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헌금보다 말입니다. 그저 계좌 이체가 됐다고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의 형상과 지식과 예배
하나님은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고 그로부터 영광 받으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모든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 19:1-6).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계심을 알려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열기가 가득 차서 만물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알려 주셔도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기 싫어합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저 눈 뜨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찾아야 하는데 사람과 다른 것을 찾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꾼다고 로마서 1:22-23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모르면 끝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다고 말씀합니다(롬 1:25).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 것이 다 우상숭배입니다. 오직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만을 섬겨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말씀 읽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끊어지고 세상에서도 선한 것으로 퍼뜨릴 수가 없습니다.
4. 자의적 숭배
사람의 계명에 따른 예배는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9),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골 2:22). 사람 위주의 예배가 요새 너무 많습니다. 어떤 교회는 주일 설교가 5분입니다. 일주일에 5분 말씀 듣는 것으로 되겠습니까? 종교개혁 때는 2시간 이상 했습니다. 영국에서 학교 주변에 예배한다고 하는 곳에 가 보니 말씀도 없고 그저 뛰어다니고 빙빙 돕니다. 그러다가 인도자가 기도한 후 예배 마쳤다고 집에 갑니다.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 따른 예배를 자의적 숭배(골 2:23)라고 합니다. 그것은 육체를 금하기는커녕 육체에 얽매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예배드리면 육체에 끝내 얽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래서 허무하고 허탄해집니다. 사람 얼굴만 보고 가는 것입니다. 일 년 내내 여호와의 면전에서 코람데오는 없고 사람 얼굴만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예배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합니다. 이제 주님이 오신 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게 하시기 위함인데 그 영이 바로 보혜사 성령입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 영생, 구원에 이어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예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곳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두 가지 가르침,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신약시대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중보자이시고 세세에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시고 길이자 진리고 생명이십니다. 그로 말미암지 않고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6. 말씀 붙들고 기도해야 영광을 돌린다
참 제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자기 자신을 드려 섬기는 데 있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신 6: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같은 것을 신약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 붙들고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송영이 안 나옵니다. 말씀 붙들고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것이 없습니다. 5분만 기도해도 다리가 저립니다. 그러나 말씀 붙들고 기도하면 한 시간, 두 시간도 기도하게 하십니다. 일어서기가 싫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고 기도해야 송영이 생깁니다. 아니면 송영이 없습니다. 자의적 숭배는 헛되고 곧 사라지고 맙니다. 내가 어떤 것으로 기쁘고 슬프고 하는 기복이 아닌 기쁘나 슬프나 말씀은 세세토록 영존하므로 시들거나 마르지 않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송영이 넘치고 빛이 가득 찹니다. 호세아서부터 여호와를 아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제물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의 말씀 듣고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 먼저 하는 것이 예배 기도, 공기도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중심입니다. 그러고 나서 사기도, 개인기도가 있습니다. 사실상 기도나 말씀이나 찬송이나 전부 다 예배입니다. 예배의 찬송이고 예배의 기도이고 예배의 말씀입니다. 말씀 선포가 예배 가운데 드려져야 설교라고 합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깊은 송영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이것이 바로 로마서의 영적 산 제물을 의미합니다. 항상 쉬지 않고 말입니다.
7. 말씀 붙들고 기도하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제가 이번주 학교 갔는데, 벌이 갑자기 와서 확 쏘았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금방 부어올랐습니다. 집에 오니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어제 설교 쓰면서 그 생각을 해 봤습니다. 벌 대신 차가 왔으면 어땠을까요? 확률이 뭐가 높을까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송영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눅 18:1),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교만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어제인가 그저께 뉴스에 사정은 모르지만 쉽게 절망하고 죽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오직 믿음으로 낙심하지 말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란은 못 견딜 만한 것이 오는 것입니다. 견딜 만한 것은 환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구렁텅이에, 다니엘이 사자 입 앞에,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은 못견딜 만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 앞에 서는 것은 못견딜 만한 것입니다. 소설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리십니다. 더 양심적이라, 더 선하고 착하다는 말이 요새는 그렇게 칭찬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담대해야 합니다. 다니엘이나 그 세 친구나 에스더나 모르드개나 홍해와 여리고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이나 환란 앞에서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견딥니까. 아침의 일을 위해 밤에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견디느냐 말입니다.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는 다릅니다. 바깥에서 놀 때는 다 같아 보여도 우리를 여호와의 집으로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조금 싸우고 다툴 수 있습니다. 이 지상의 삶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갈 곳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에게는 정죄함도, 두려움도, 장래에 환란도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8. 예배 속에서 기도와 말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예배의 주체가 목사가 아닌 모든 회중이듯, 예배 가운데서 회중의 기도의 주체도 모든 회중입니다.
예배는 성경 봉독과 설교의 선포와 믿음의 들음과 찬송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성경 봉독이 있어야 하고 말씀을 풀고 믿음의 들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찬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받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만 있는 말입니다. 예배는 설교의 선포와 믿음의 들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찬은 제정된 말씀과 믿음의 먹음이 있어야 합니다. 분별하지 않고 먹는 것은 오히려 죄를 더하게 합니다. 설교는 믿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가장 은혜로울 때는 목사가 아닙니다. 제 모습입니다. 저도 설교 말씀을 많이 받아 적을 때는 설교한 목사님은 기억도 안 납니다. 제가 은혜 받아서 적은 것입니다. 목사는 그 주에 설교할 것을 선포할 뿐입니다. 성도가 받아 먹어야 합니다. 믿음의 들음, 딱딱한 것을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9. 말씀과 영광
1) 요한복음과 영광
사도 요한은 오늘 말씀을 쓴 자입니다. 사도 요한이 사랑의 사도라고 하지만 저는 영광의 사도라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이전에 있던 교회에서 요한복음을 강해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정중앙인 12장에 이사야 6장의 성전의 환상이 언급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중심되는 것은 영광입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때에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고 스랍, 천사가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스랍의 하나가 제단에 핀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을 지집니다. 그러니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성전 환상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듣기는 해도 듣지 못하고 봐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미 십 분의 일이 남았는데 더 쳐 없앱니다. 그루터기를 말합니다. 그리고 남은 그루터기에는 하나님이 지식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거룩함, 영광이 사도 요한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영광
헬라어로 '독사', 즉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합니다. 바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참 빛으로 오셨는데 그 빛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구원을 이루러 오셨는데 그들이 주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사랑합니다. 영광을 중심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세베데의 아들입니다. 우뢰의 아들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성격이 괴팍했는데 그가 변화되어 주의 영광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영광이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사야 6장에서 나타나신 주님과 요한복음 12장과 요한계시록에서 체험한 영광의 임재가 같습니다. 우리가 묵상해야 할 예수님의 모습은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에 묘사된 그것입니다. 그 예수께 영광을 올리는 데 중요한 것은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1:3). 동방정교회가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것을 가장 강조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지식입니다. 잡다한 도구들이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대성교회에서는 예배 전에 "모든 영광 하나님께"라는 찬송을 드렸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할 때에도 듣는 자와 읽는 자와 행하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과 그로 인한 감사로 빛이 내 안에 확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과 소망이 없이 영광의 송영이 내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6-7).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입니다. 이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고 그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합니다. 그 질그릇인 우리가 바로 성전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성전입니다. 고린도전후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붙잡으면 하나님의 집이라.
10. 결론
말씀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영광 돌릴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기도가 안 됩니다. 몸을 뒤틀게 됩니다. 어려운 말씀을 공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듣고 그 들은 말씀으로 기도하십시오. 그 말씀이 나에게 천금과 같은 보화가 되고 보배가 되고 길을 알려 주고 수렁에서 건져 내고 마지막까지 나를 붙들어서 간혹은 사렙다 과부와 같이 먹고 죽고자 하는 충동이 있어도 회복되는 일이 있습니다.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 험악합니다. 죄를 짓는 모습도 짓고 나서 행동하는 모습도 험악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영광 돌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