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5)] 부활과 심판 (계 13:8; 20:15; 21:27)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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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5)] 부활과 심판 (계 13:8; 20:15; 21:27) 문병호 목사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21:27)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도입


우리는 평범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맑은 공기, 사람이 모여 교제하는 것 등이 모두 감사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전염병이 연초부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사도신경 말씀을 나누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해 말씀을 계속 나누어 오다가 오늘 마지막으로 나누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십자가지기교회를 섬기며 기적적인 은혜를 베푸셔서 기독론 책을 쓰고, 기독교 강요 초판과 마지막 판을 라틴어에서 번역하게 하시고 이런 저런 반응도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독신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연재하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어느 낙도나 교회의 당회에서 이런 것을 읽을 텐데, 이 연약한 종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니 두렵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문화, 윤리, 선교는 조금은 편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교리에 대한 것은 팽팽한 긴장이 있어서 좁고 좁은 문 중의 좁은 문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오늘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제32, 33장 부분입니다. 이곳에서는 “종말”을 다루는데, 소종말은 인생의 죽음을 가리키고, 대종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어떤 사람은 영생에, 어떤 사람은 영벌로 가는 것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한 번의 설교로 이 긴 주제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 소종말: 죽음


여러분은 종말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어떠십니까? 불안합니까? 초조합니까? 다급합니까? 저는 어느 때부터 종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평강, 평화를 생각하게 됩니다. 땅을 보면 힘들고, 하늘을 보면 좀 평안하듯이 말입니다. 지상의 시간과 천상의 시간. 끝이라는 것이 부담이 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품이라고 생각됩니다. 로마서 10:4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끝, 즉 완성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종말은 멸망이나 멸절이 아니라 완성이고 성취이며 온전하게 되는 것이며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1)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삶이 영혼만의 삶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은 다 시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작이 없으시지만, 그 외의 것들은 다 시작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모태에서 조성될 때, 영혼과 육체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끝은 없습니다. 시작이 있지만, 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영혼과 육체로 시작되고 죽으면 영혼으로 계속 살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불멸합니다. 인간의 존재는 끝나거나 사라지지 않고 그 정체성이 유지됩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우리는 영혼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영혼과 몸의 삶이 죽음 이후에는 영혼의 삶으로 변화됩니다. 삶의 멸절이 아니라 삶의 전이입니다. 삶이 옮겨가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로 살다가 죽음의 순간부터 영혼으로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게 되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됩니다. 


2) 죽음 이후의 신자 및 불신자의 영혼 상태


창세기 2, 3장, 전도서 12:7, 사도행전 13:36을 보면, 죽게 되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되고 영혼은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영혼을 받으시는데, 어떤 영혼만 받으시느냐, 바로 자기 백성의 영혼만 받으십니다. 그 영혼의 처소가 두 군데로 확연하게 갈립니다. 천국, 천당, 낙원, 새하늘과 새땅은 조금씩 개념은 다르지만, 다 같이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분명하고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하나님의 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순교할 때,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도 죽으실 때 그 영혼이 떠나셨는데, 그것은 아버지께 그 영혼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믿지 않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즉시 지옥으로 빠져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죽지 않고 영혼으로 살지만,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은 다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에서 몸과 영혼을 다 멸하실 수 있으십니다. 어떤 영혼이라도 죽지 않습니다. 지옥에서 가느니 영혼이 없어지는 게 나으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태를 살아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믿지 않는 자들은 죽으면 그 영혼이 즉시 지옥으로 가고,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다는 것, 즉 영생은 살아 있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거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무엇이냐고 정의를 내리자면, 기차가 철로로 쭉 가듯이, 영혼과 육체의 기차로 철로를 가다가 어느 순간 영혼의 기차로만 철로를 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삶에서 영혼의 삶으로 전이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멸망으로 여겨지거든 죽음이라는 말을 쓰지 마시고 영혼의 삶이라고 말하십시오. 영혼과 육체(몸)의 삶이 이 땅의 삶이라면 영혼의 삶은 죽음을 뜻합니다. 영혼의 삶은 계속되지 않고, 주님이 재림하시면, 부활을 하게 됩니다. 부활할 때 영혼과 육체의 삶이 됩니다. 그러나 그 육체는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부활할 때까지를 중간상태라고 합니다. 즉 최종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죽음 이후의 영혼은 독자적인 실체로서 활동한다


영혼은 독자적인 실체입니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있기 때문에 영혼만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유할 수 없고 성경으로 믿을 뿐입니다. 영혼은 불멸하고 인격적인 실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과 몸이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어서 영혼만이 있을 때도 영혼은 독자적으로 의식하고 알고 활동합니다. 

주님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알려주셨습니다. 부자는 편하게 살고 나사로는 비참하게 살다가 둘 다 죽었는데,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즉 천국에 갔고, 부자는 음부, 즉 지옥에 갔습니다. 나사로는 위로를 받았다고 했지만, 부자는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이렇게 의식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시켜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부자와 나사로 사이는 구렁이 있어서 넘어갈 수 없음을 듣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아직 죽지 않은 자기의 형제들이 회개하여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달라고 했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가는 것도 안 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의식하고 활동하지만, 영혼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행하고 의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것을 ‘잠자다’라는 표현을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죽으면 영혼들은 서로 알 수 있고, 서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즉 인격적인 활동을 합니다. 영혼이 잔다는 것은 이단적 가르침입니다. 이런 주장을 영혼수면설이라고 합니다. 

사울이 마음이 급해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라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갑니다. 그때 사무엘이 말을 합니다. 죽어도 인격적 활동을 합니다. 변화산상에서 주님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주님과 더불어 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대화는 육체가 있는 음성은 아니었지만 그런 활동을 한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영혼과 육체로 살다가 영혼으로만 산다가 어느 기간이 지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영혼과 육체가 다시 결합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4) 죽음 이후의 신자의 영혼은 영화된다


죽음 후에 우리 신자들의 영혼은 즉시 영화롭게 됩니다. 이것을 영화라고 합니다(히 12:23). 십자가상의 한 강도에게 주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셨듯이, 신자들의 영혼은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합니다(고후 5:8; 빌 1:23).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이 빨리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싶으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곳에서도 일을 주셨으니 그것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혼이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죽으면 그 영혼이 즉시 온전히 거룩해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빛과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봅니다(고후 3:18; 4:6; 고전 13:12). 제가 종말에 관한 성경 구절을 많이 말씀드리는 이유는, 종말에 관해서 막연히 말씀드리는 것처럼 들릴까 봐 그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과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영혼으로 즉시 거룩해지고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고 그의 빛과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종말에 관하여 다른 것을 묵상하지 마시고, 이것을 묵상하십시오.

우리는 예수 앞에서 기도하고,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제사장들과 천사들과 만물과 더불어 새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입니다. 부활 전의 우리의 모습이 이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23에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몸의 충만한 속량입니다. 이것은 부활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 이후의 삶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혼의 삶입니다.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시면 죽음을 보지 않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종말론입니다. 마지막 때에 관한 비본질적인 것보다 그리스도가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퍼즐이 아닙니다. ‘실상’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단은 피하십시오. 


5) 죽음 이후에 영혼이 가는 곳


우리는 어느 곳에 갈까요? 천국은 어디에 있을까요? 천국은 분명히 어느 곳입니다. 영혼은 안 보이지만 이동할 수 있어서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많은 이들이 삼층천 등을 연구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천국이 어디냐고 물으면,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인성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고, 신성에 따라서는 모든 곳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우편이 바로 천국입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생각은 신앙의 진보가 없고 다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그의 빛과 영광 가운데 하나님을 보며 몸의 충만한 속량을 기다리는 것만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죽어 영혼으로만 그곳에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은 즉시 지옥에 던져입니다. 그래서 형벌 아래서, 형벌을 받으며 심판의 날까지 갇히게 됩니다(눅 12:5; 벧후 2:9).  



3. 대종말: 재림, 부활, 심판


1) 재림: 임마누엘


마지막 때 주님께서 재림하십니다. 재림은 주님이 보좌 우편에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내려오신다고 했습니다. 재림은 분명히 있습니다. 재림은 역사적 사전으로서 약속대로 있을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재림이 고백됩니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영광으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모든 천사와 함께 하늘로부터 강림하십니다. 이것은 그때 믿음의 눈으로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찌를 사람도 보지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먼저 일어납니다. 그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고 공중에 들림을 받아 변화됩니다. 그래서 공중에서 그를 영접하며 “그와 항상 함께 있게” 됩니다. 즉 임마누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있게 됩니다. 


2) 부활: 성질은 변하나 동일한 몸


그때 우리 믿는 자들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의 형체와 같이 홀연히 변화됩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몸은 어디에 있다가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나님의 비밀과 은혜와 섭리의 영역입니다. 한때 신자의 몸을 잘 보존해야 한다고 여겨질 때가 있었지만, 그 몸이라는 것은 썩고 흩어지고 없어집니다. 매장은 신앙의 덕을 위해서 권해지긴 합니다. 장례의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몸이 동일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제 몸은 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 그 몸은 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지금 몸을 그때도 동일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몸이 아니라 지금의 몸인데, 지금의 몸은 썩어 없어질 수 있습니다. 부활의 몸이 나의 몸이 됩니다. 

우리의 소망은 부활의 소망입니다. 죽음 이후의 우리 몸은 분리되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의 우리 몸의 상태에 대해서 너무 관심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보다 우리의 이름이 중요합니다. 

부활 때 우리의 몸은 동일한 몸이지만, 다만 성질이 변합니다. 성질은 변하나 동일한 몸입니다. 어떻게 변하냐면, 우리의 낮은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됩니다. 우리의 부활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똑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다 변화됩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육의 몸이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부활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묵상만 할 뿐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묵상해야 합니다. 이런 영역은 묵상하고 그곳에 서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희락와 화평을 주셔서 기쁘게 하십니다. 지금까지 죽고 다시 산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죽음에 대해 증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둘째 사망이 없는 것이 주님의 택함 받은 자들에게 해당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의 부활을 첫째 부활, 생명의 부활, 의인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부활 가운데 의인의 심판으로 갑니다. 


3) 심판: 놀라운 위로


부활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것은 심판을 위함입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십니다. 배교한 천사들도 심판합니다. 아버지는 심판을 아들에게 다 맡기셨습니다(요 5:22).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심판주십니다. 왜 아들이 심판주이실까요? 아주 중요한 말씀인데요, 요한복음 5:27에 “그의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인자됨이란 사람됨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되심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맡겨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구원의 의를 이루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가 모든 의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의의 심판주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심판주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신 사람은 의인이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은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심판주라는 것은 이미 긍휼의 심판이고 은혜의 심판입니다. 날 위해 죽으신 분이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 성경 구절을 읽었는데, 심판의 결과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요한계시록 21:27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마지막 때의 심판에 말과 행위와 공적을 모두 재 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따라 잘못된 것은 불못에 던져지고, 죽임을 당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생명수의 샘물을 값없이 주십니다. 이 성경 구절이 답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그가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십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까지 은혜가 나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고 불못에 들어가지 않으며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예수를 믿으면 구원에 이르고, 값없는 생명수를 얻고, 그 예수를 믿지 않으면 생명수는커녕 목이 말라서 거지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을 간구하게 되는 처지가 됩니다. 우리는 그 목마름을 예수님이 가져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목마름이 없습니다. 그가 반석의 생수시고, 내 배에 생수가 흐릅니다. 이 가르침이 우리를 휘감아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심판을 묵상하면 놀라운 위로가 된다고 기독교 강요에 쓰고 있습니다. 심판이 어떻게 놀라운 위로가 됩니까? 심판은 우리에게 은혜의 확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생, 새하늘과 새땅으로 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다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섬깁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모습입니다.



4. 결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전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를 고백합니다. 제가 잠깐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형제와 자매 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고, 함께 일으킴을 받고, 함께 하늘에 앉힘을 받고, 그와 함께 상속자 되고, 그와 함께 지체 되고, 그와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죽음 후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부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있으며, 부활 이후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로서 의인의 심판으로 영생에 들어가고 새하늘과 새땅의 새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가 등불이 되시는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그의 얼굴을 보고 그를 섬긴다. 우리에게 이 소망이 유일하고 참되니,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2).” 

찬송가 303장 3절이 종말신앙이라고 여겨집니다. 함께 부르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진 풍파 쉬지 않고 불어도

주님 안에 보호받는 우리 마음 편하다

늘 깨어서 기도하고 저 천국을 바라며

주님만을 기다리니 어찌 찬양 안 할까.”


이 찬양을 다 외웁시다. “늘 깨어서 기도하고 저 천국을 바라며 주님만을 기다리니 어찌 찬양 안 할까.”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주여 이 땅에 오셔서 코로나 19 상황을 종결시켜 주시옵소서. 어찌 하나님의 섭리가 없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진 풍파 쉬지 않고 불어도 주님 안에 보호받는 우리 마음 편하다.”

여러분, 기도가 뭡니까? 하나님을 부르며 내놓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