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7)] 서원의 은혜 (신 23:21-23) 문병호 목사
조회수 137
[2020072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7)] 서원의 은혜 (신 23:21-23) 문병호 목사
(신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신 23:22)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신 23:23)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성경의 맹세
제가 최근에 <<기독교 강요>>를 번역했습니다. 이 책은 4권 80장 1,277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 80장이 다 중요한 주제이지만 그중 한 장이 맹세에 할애되어 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3장 중에 제22장, 한 장이 맹세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기독교 강요>>를 읽을 때 맹세에 대해 이렇게 한 장을 할애하여 다룬 것에 의아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거론되는 개념들이 있는데 우상, 맹세 등이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여호와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 망령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헛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즉, 헛 맹세하지 말고 참 맹세 혹은 실한 맹세는 하고 그것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신 10:20).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맹세에 대한 것이 계속 나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섬기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합니다.
2. 언약과 맹세
우리가 맹세할 때는 가장 답답할 때,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때 입니다. 사실상 맹세라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진실한 것이고 어떻게 보면 무디고 답답한 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맹세를 하는 사람들은 맹세를 다 못 지키더라도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내가 자녀를 책임지겠다고 해서 어떻게 우리가 다 집니까. 그러나 그것으로 나무라지는 않습니다. 맹세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관심과 사랑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우리가 많은 맹세를 하고 살아갑니다.
1) 언약: 하나님이 시간 안에서 약속을 성취하심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시간 안에 계시지 않고 시간 너머에서 시간을 지으신 분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지으시고 역사 가운데 들어오셔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큰 모습이 약속과 성취입니다. 그 약속과 성취에 대한 것을 우리는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시는 맹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시간 안에 가두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지으신 분입니다. 물리학자들은 몇 억 광년 등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보며 대중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기독교를 조롱하곤 합니다. 아무리 물리학자들이 시간을 이야기하고 해도 하나님은 그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것이고 인간은 그것을 그저 탐험할 뿐입니다. 우리가 덜 미쳐서, 덜 알아서 그렇지 더 먼 곳으로 미칠 수 있다면 오히려 더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 책, 천체물리학 책 등을 많이 읽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시간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래야 영생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영생은 무수한 시간 동안 산다는 말이 아니라 시간 너머까지 산다는 개념입니다. 물론 그것을 우리가 신적 개념으로 보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간 안에서 활동하시는 모습, 그것은 바로 약속하고 성취하는 언약의 모습입니다.
2) 맹세: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인간의 반응
그리고 이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맹세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것은 전제가 여호와를 경외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언약에 의지해서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신실하시고 변개치 않으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그 맹세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맹세는 헛 맹세가 아닌 참 맹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간에 맹세했습니다. 그것을 공적 맹세, 예배 가운데 맹세라고 합니다. 지난 주 서리집사를 임명하고 세례 서약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맹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맹세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 맹세입니다. 이것은 우리 편의 약속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 당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서원의 은혜"라고 한 것입니다.
3. 서원과 맹세
사실 서원과 맹세를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굳이 나누자면 맹세는 사람끼리 약속하는 것이요 서원은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맹세는 사람끼리 혹은 교회 안에서 서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바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간에 하는 것이고 서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맹세는 'oath'이고 서원은 'vow'입니다. 서원은 하나님을 약속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곧 서원은 예배와 기도입니다. 예배와 기도 자체가 서원입니다. 금요일 시편 강해에서 반복적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전부 서원 기도라고 말입니다. 모든 기도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믿음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나의 심령의 간구,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맹세와 서원은 사실상 다르지 않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다만 맹세는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고 야고보서, 신명기 등에서 나오듯 하늘로도 맹세하지 말고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네 머리, 즉 자신의 생명/목숨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맹세를 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지으시고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므로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하늘도 무너지고 땅도 녹아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에 계신, 살아 계신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죽은 것들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4. 모든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며, 모든 기도는 서원 기도이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이므로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움직이지만 분명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모든 기도는 서원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맹세라는 말이 <<기독교 강요>>의 80장 중 한 장을 차지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요새는 맹세를 그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미국은 반대로 너무 많이 맹세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에 대해 성경의 말씀을 모아 길게 한번 써 보았습니다.
"맹세는 전능하시고 편재하시고 절대 의, 선, 주권을 지니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사심을 두고, 그를 경외하고 섬기고 의지하는 가운데, 옳고 그름에 따라 그른 것과 아닌 것을 명백히 분별해서, 진실과 공의와 정의로 해야 한다."
이것에 어긋나는 맹세는 전부 다 미신이고 전부 다 우상숭배입니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 45:23);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사 65:16). 간절한 사람은 무릎을 꿇고 입에서 기도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맹세입니다. 살려만 주시면 하나님 일 하겠다고 맹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거짓이 없습니다. 공의와 의와 진실로 맹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도 가만히 보면 선지서의 간절함이 맹세에 배어 나옵니다. 신명기도 이스라엘 민족의 간절함이 맹세에 배어 나옵니다. 복수하거나 남에게 해코지하거나 내 기분을 채우려고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공의와 의와 진실과 선을 놓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절대 의와 절대 선에 무릎을 꿇고 진리와 지식 가운데 무릎을 꿇고 복을 구하는 것이 맹세이고, 그렇게 하면 여호와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맹세하라고 하시고, 맹세한 것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5. 참 맹세는 하나님이 지키게 하신다
맹세는 우리 심령의 간구의 절정입니다. 맹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맹세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오. 참 맹세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헛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 맹세를 하면, 내 영혼의 깊은 간구와 소원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세우고 인도하시고 건지소서,' '반석 위에 세우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움직이소서, 그리하면 종이 여호와를 위해 평생 살리이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내 자질도 아니고 내 공로도 아닙니다. 이미 은혜입니다. 우리는 맹세를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참 맹세를 하게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6. 서원의 동시성: 내가 서원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그 서원을 지키게 하신다
구약에 보면 맹세는 제사와 함께 드립니다. 번제, 화목제, 낙헌제와 함께 감사제로 서원의 제물을 가져오라고 합니다(신 12:11). 서원은 하나님께 하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믿고 신뢰하면서 여호와께 우리가 약속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서원하고 지키라고 할 때, 우리가 지키면 사실상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키면 하나님이 지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에 발을 담글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인데, 그때 여호와가 물을 정지시킵니다. 일용할 양식을 두고 기도하라고 한 것도 서원입니다. 1년이 아니라 말입니다. 매번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가 약속한 것을 지킬 때 내가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신 것입니다. 서원하게 하신 것도 서원을 지키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서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원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혼자 동쪽, 서쪽, 남쪽으로 다녔습니다. 혼자 말입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칠천 용사가 있었습니다. 엘리야 눈에 보이지 않는 칠천 용사가 엘리야가 움직일 때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시적으로 역사합니다.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주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 그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 계셔서 모레 그 이후의 것까지 미리 준비해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살아 계셔서 그때그때 역사하십니다.
7. 우리가 할 준비는 기도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준비한다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준비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서원하는 것입니다.
제가 유학을 갈 때 학비도 그렇고 모든 것이 도저히 감당이 안 됐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할 수 있는 만큼 해 본 것이 당시에는 나의 준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준비는 나의 기도입니다. 준비는 내가 발을 담그는 것입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놓고 기도할 때 서원한 것입니다. 한나의 서원이 한 시대를 연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합니까? 아마 엘리야도 그랬을 것입니다. 자신을 도울 사람들을 세어 준비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명도 없었습니다. 겨우 까마귀하고 사렙다 과부 한 명만 붙여 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실망할 때 하나님이 칠천 용사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준비가 안 됐으나 하나님의 시각으로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건너갈 다리가 준비되었는지 아닌지를 살핍니다. 그러나 사실상 서원은 내가 징검다리에 발을 올릴 때 여호와가 내 발을 붙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서원의 동시성, 불변성, 영원성이라고 이야기해 봅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본질적인 준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큰 일을 시킬 때 혼자 있게 하십니다. 야곱도 벧엘의 밧단아람까지, 얍복강에서도 혼자 있게 하셨습니다. 성경의 인물은 분명히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하신 후 큰 일을 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 다른 것이 아니라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서원 기도입니다. 우리는 내년에 내일 뭘 먹을까 항상 준비에 철저하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내일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벌이 쏘는 것을 차가 달려드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아이를 차가 치는 것을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고 아기고 준비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미리 알 수 없습니다.
8. 서원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미리 감사하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를 번역할 때 저는 건강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일에 매진하기 위해서 부지런함은 주셨으니 건강을 주시라고 말입니다. 관절이 아프고 소화도 안 돼서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 장 한 장 할 때마다 하나님이 건강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은 6일 일하고 첫날 오는 주일 예배가 저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번제와 화목제와 낙헌제와 함께 서원의 제물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건강을 주시면 무엇을 하겠습니다'라는 서원이 예배 때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오늘 예배 드리고 설교하고 나면 새 힘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월요일부터 감당을 해 나갔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런 의미에서 모두 서원입니다. 내가 뭘 할테니 하나님이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격동시켜서 기도하게, 서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다 서원의 기도입니다. 서원이라는 것이 별난 것이 아닙니다. 서원에 대해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무엇을 바치면 하나님이 무엇을 갚아주시는 것으로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서원은 예배와 감사의 요소에 들어갑니다. 내 공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미리 감사하는 것입니다.
9. 서원은 은혜의 표이다
그래서 서원은 보이지 않는 은혜가 보이게 되는 것의 표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해설을 쓰신 A. A. 핫지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서원은 성례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보이는 표징으로 드러내는 것이 성례입니다. 세례와 성찬이 보이지 않는 은혜를 드러내는 것처럼 서원은 보이지 않는 은혜를 지금 내가 기도하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기도하기 위해 굳게 잡은 손이 보이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내가 굳게 잡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중얼거리는 한나의 입술이 하나님의 은혜의 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말이 너무 좋았습니다. 서원은 성례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공의에 무릎을 꿇고 그의 진리와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원은 은혜인 것입니다. 기도는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이루었다라는 것을 우리의 기도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차서 뭘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감사가 차는 것입니다. "아멘, 아멘" 해야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빌립보에 가면 자주 장사 루디아가 있다,' '데살로니가에 가면 야손의 집이 있다'고 미리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땅을 밟으면 물에 발을 담그면 그때 알려 주십니다. 보여 주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여, 이루소서, 날 위해 이루소서"라고 성도님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큼이요? 입이 흐물흐물해질 만큼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한나가 입을 중얼거린 것입니다. 방언이니 아니니 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입에 길이 생기고 기도의 언어가 나옵니다. 막 외치다 보면 가슴에도 길이 생기고 목에도 입에도 길이 생깁니다. 신비주의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이 결코 여호와께 감사드릴 수 없습니다. 서원이라는 것이 모든 성경에 나옵니다. 그래서 맹세를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서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서원입니다.
10. 서원의 실제
1)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원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신 23:23). 자원하는 마음은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성경은 모두 전부 은혜라고 읽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기도합니다. 내가 의지를 발휘해서 무언가 해 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원하는 심령을 주십니다. 그때 번제와 낙헌제와 함께 서원제를 드립니다.
2) 서원의 소망
서원이 소망입니다. 서원은 여호와께서 하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시고 지금 감사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될 일을 지금 나에게 확신시키고 감사의 제물을 드리게 하시는 것이 서원입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닙니다. 현재이고 미래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서원의 기도입니다.
3) 내 서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서원은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서원은 내가 주체가 아닙니다. 한나도 주체가 아닙니다. 사무엘서를 한나 중심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사무엘도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서는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불변하십니다.
4) 서원의 은밀성: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저는 서원에 대해서 '은밀성'이라고도 써 봤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밀하게 혼자 있게 하시고 그때 하나님을 만나고 바라보게 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여 하나님 앞에 맹세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천 번을 이삭의 말씀을 읽어도,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이 나서 이방인들이 가져가도 또 땅을 파면 또 난 것을 볼 때 이전에는 몰랐으나 그 우물을 하나하나 파는 것 자체가 기도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도 모든 성경의 다른 인물도 그렇습니다. 우물 하나를 파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요. 그렇게 힘들게 발견하면 누군가 가져가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11. 결론
말씀의 결론을 시편 말씀으로 짓고자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1-4). 시편은 다윗의 삶이자 경험이고 은혜의 간증입니다. 그냥 읽으면 안 됩니다. 한 인간이 쓴 시를 그저 올려 놓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 기도하고 서원합니까. 바로 이때입니다.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시 54:5). 5절까지는 기도라고 합니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시 54:6). 시편 강해를 하면서 말한 것처럼 시편에는 하나님의 어떠하심, 자기의 형편, 기도, 그리고 감사가 나옵니다. 바로 한 절 전에 곧 죽을 듯했던 다윗이 주의 성실하심, 신실하심으로 기도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으로 기도하는 것(딤후 2:13)입니다. 이곳에 서원이 있습니다. 간구와 감사가 함께 있습니다. 끝내 여호와께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원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위험한 지경에 두신 것은 여호와를 찾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눈물과 애통함이 있다면 여호와를 찾을 만할 때 찾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사는 소망입니다. 서원이 없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서원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먹을 밥 달라는 것입니다. 밥 주면 여호와의 영광의 도구가 되고 그 힘으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성도에게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천 년 만 년 반석, 바위라도 뚫어서 하나님은 성도를 숨겨 주십니다. 지키십니다.
[2020072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7)] 서원의 은혜 (신 23:21-23)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성경의 맹세
제가 최근에 <<기독교 강요>>를 번역했습니다. 이 책은 4권 80장 1,277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 80장이 다 중요한 주제이지만 그중 한 장이 맹세에 할애되어 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3장 중에 제22장, 한 장이 맹세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기독교 강요>>를 읽을 때 맹세에 대해 이렇게 한 장을 할애하여 다룬 것에 의아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거론되는 개념들이 있는데 우상, 맹세 등이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여호와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 망령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헛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즉, 헛 맹세하지 말고 참 맹세 혹은 실한 맹세는 하고 그것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신 10:20).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맹세에 대한 것이 계속 나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섬기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합니다.
2. 언약과 맹세
우리가 맹세할 때는 가장 답답할 때,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때 입니다. 사실상 맹세라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진실한 것이고 어떻게 보면 무디고 답답한 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맹세를 하는 사람들은 맹세를 다 못 지키더라도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내가 자녀를 책임지겠다고 해서 어떻게 우리가 다 집니까. 그러나 그것으로 나무라지는 않습니다. 맹세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관심과 사랑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우리가 많은 맹세를 하고 살아갑니다.
1) 언약: 하나님이 시간 안에서 약속을 성취하심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시간 안에 계시지 않고 시간 너머에서 시간을 지으신 분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지으시고 역사 가운데 들어오셔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큰 모습이 약속과 성취입니다. 그 약속과 성취에 대한 것을 우리는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시는 맹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시간 안에 가두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지으신 분입니다. 물리학자들은 몇 억 광년 등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보며 대중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기독교를 조롱하곤 합니다. 아무리 물리학자들이 시간을 이야기하고 해도 하나님은 그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것이고 인간은 그것을 그저 탐험할 뿐입니다. 우리가 덜 미쳐서, 덜 알아서 그렇지 더 먼 곳으로 미칠 수 있다면 오히려 더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 책, 천체물리학 책 등을 많이 읽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시간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래야 영생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영생은 무수한 시간 동안 산다는 말이 아니라 시간 너머까지 산다는 개념입니다. 물론 그것을 우리가 신적 개념으로 보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간 안에서 활동하시는 모습, 그것은 바로 약속하고 성취하는 언약의 모습입니다.
2) 맹세: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인간의 반응
그리고 이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맹세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것은 전제가 여호와를 경외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언약에 의지해서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신실하시고 변개치 않으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그 맹세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맹세는 헛 맹세가 아닌 참 맹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간에 맹세했습니다. 그것을 공적 맹세, 예배 가운데 맹세라고 합니다. 지난 주 서리집사를 임명하고 세례 서약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맹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맹세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 맹세입니다. 이것은 우리 편의 약속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 당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서원의 은혜"라고 한 것입니다.
3. 서원과 맹세
사실 서원과 맹세를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굳이 나누자면 맹세는 사람끼리 약속하는 것이요 서원은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맹세는 사람끼리 혹은 교회 안에서 서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바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간에 하는 것이고 서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맹세는 'oath'이고 서원은 'vow'입니다. 서원은 하나님을 약속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곧 서원은 예배와 기도입니다. 예배와 기도 자체가 서원입니다. 금요일 시편 강해에서 반복적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전부 서원 기도라고 말입니다. 모든 기도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믿음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나의 심령의 간구,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맹세와 서원은 사실상 다르지 않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다만 맹세는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고 야고보서, 신명기 등에서 나오듯 하늘로도 맹세하지 말고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네 머리, 즉 자신의 생명/목숨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맹세를 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지으시고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므로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하늘도 무너지고 땅도 녹아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에 계신, 살아 계신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죽은 것들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4. 모든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며, 모든 기도는 서원 기도이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이므로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움직이지만 분명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모든 기도는 서원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맹세라는 말이 <<기독교 강요>>의 80장 중 한 장을 차지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요새는 맹세를 그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미국은 반대로 너무 많이 맹세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에 대해 성경의 말씀을 모아 길게 한번 써 보았습니다.
"맹세는 전능하시고 편재하시고 절대 의, 선, 주권을 지니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사심을 두고, 그를 경외하고 섬기고 의지하는 가운데, 옳고 그름에 따라 그른 것과 아닌 것을 명백히 분별해서, 진실과 공의와 정의로 해야 한다."
이것에 어긋나는 맹세는 전부 다 미신이고 전부 다 우상숭배입니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 45:23);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사 65:16). 간절한 사람은 무릎을 꿇고 입에서 기도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맹세입니다. 살려만 주시면 하나님 일 하겠다고 맹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거짓이 없습니다. 공의와 의와 진실로 맹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도 가만히 보면 선지서의 간절함이 맹세에 배어 나옵니다. 신명기도 이스라엘 민족의 간절함이 맹세에 배어 나옵니다. 복수하거나 남에게 해코지하거나 내 기분을 채우려고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공의와 의와 진실과 선을 놓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절대 의와 절대 선에 무릎을 꿇고 진리와 지식 가운데 무릎을 꿇고 복을 구하는 것이 맹세이고, 그렇게 하면 여호와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맹세하라고 하시고, 맹세한 것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5. 참 맹세는 하나님이 지키게 하신다
맹세는 우리 심령의 간구의 절정입니다. 맹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맹세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오. 참 맹세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헛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 맹세를 하면, 내 영혼의 깊은 간구와 소원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세우고 인도하시고 건지소서,' '반석 위에 세우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움직이소서, 그리하면 종이 여호와를 위해 평생 살리이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내 자질도 아니고 내 공로도 아닙니다. 이미 은혜입니다. 우리는 맹세를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참 맹세를 하게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6. 서원의 동시성: 내가 서원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그 서원을 지키게 하신다
구약에 보면 맹세는 제사와 함께 드립니다. 번제, 화목제, 낙헌제와 함께 감사제로 서원의 제물을 가져오라고 합니다(신 12:11). 서원은 하나님께 하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믿고 신뢰하면서 여호와께 우리가 약속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서원하고 지키라고 할 때, 우리가 지키면 사실상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키면 하나님이 지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에 발을 담글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인데, 그때 여호와가 물을 정지시킵니다. 일용할 양식을 두고 기도하라고 한 것도 서원입니다. 1년이 아니라 말입니다. 매번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가 약속한 것을 지킬 때 내가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신 것입니다. 서원하게 하신 것도 서원을 지키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서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원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혼자 동쪽, 서쪽, 남쪽으로 다녔습니다. 혼자 말입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칠천 용사가 있었습니다. 엘리야 눈에 보이지 않는 칠천 용사가 엘리야가 움직일 때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시적으로 역사합니다.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주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 그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 계셔서 모레 그 이후의 것까지 미리 준비해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살아 계셔서 그때그때 역사하십니다.
7. 우리가 할 준비는 기도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준비한다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준비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서원하는 것입니다.
제가 유학을 갈 때 학비도 그렇고 모든 것이 도저히 감당이 안 됐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할 수 있는 만큼 해 본 것이 당시에는 나의 준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준비는 나의 기도입니다. 준비는 내가 발을 담그는 것입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놓고 기도할 때 서원한 것입니다. 한나의 서원이 한 시대를 연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합니까? 아마 엘리야도 그랬을 것입니다. 자신을 도울 사람들을 세어 준비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명도 없었습니다. 겨우 까마귀하고 사렙다 과부 한 명만 붙여 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실망할 때 하나님이 칠천 용사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준비가 안 됐으나 하나님의 시각으로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건너갈 다리가 준비되었는지 아닌지를 살핍니다. 그러나 사실상 서원은 내가 징검다리에 발을 올릴 때 여호와가 내 발을 붙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서원의 동시성, 불변성, 영원성이라고 이야기해 봅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본질적인 준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큰 일을 시킬 때 혼자 있게 하십니다. 야곱도 벧엘의 밧단아람까지, 얍복강에서도 혼자 있게 하셨습니다. 성경의 인물은 분명히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하신 후 큰 일을 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 다른 것이 아니라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서원 기도입니다. 우리는 내년에 내일 뭘 먹을까 항상 준비에 철저하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내일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벌이 쏘는 것을 차가 달려드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아이를 차가 치는 것을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고 아기고 준비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미리 알 수 없습니다.
8. 서원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미리 감사하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를 번역할 때 저는 건강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일에 매진하기 위해서 부지런함은 주셨으니 건강을 주시라고 말입니다. 관절이 아프고 소화도 안 돼서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 장 한 장 할 때마다 하나님이 건강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은 6일 일하고 첫날 오는 주일 예배가 저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번제와 화목제와 낙헌제와 함께 서원의 제물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건강을 주시면 무엇을 하겠습니다'라는 서원이 예배 때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오늘 예배 드리고 설교하고 나면 새 힘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월요일부터 감당을 해 나갔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런 의미에서 모두 서원입니다. 내가 뭘 할테니 하나님이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격동시켜서 기도하게, 서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다 서원의 기도입니다. 서원이라는 것이 별난 것이 아닙니다. 서원에 대해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무엇을 바치면 하나님이 무엇을 갚아주시는 것으로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서원은 예배와 감사의 요소에 들어갑니다. 내 공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미리 감사하는 것입니다.
9. 서원은 은혜의 표이다
그래서 서원은 보이지 않는 은혜가 보이게 되는 것의 표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해설을 쓰신 A. A. 핫지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서원은 성례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보이는 표징으로 드러내는 것이 성례입니다. 세례와 성찬이 보이지 않는 은혜를 드러내는 것처럼 서원은 보이지 않는 은혜를 지금 내가 기도하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기도하기 위해 굳게 잡은 손이 보이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내가 굳게 잡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중얼거리는 한나의 입술이 하나님의 은혜의 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말이 너무 좋았습니다. 서원은 성례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공의에 무릎을 꿇고 그의 진리와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원은 은혜인 것입니다. 기도는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이루었다라는 것을 우리의 기도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차서 뭘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감사가 차는 것입니다. "아멘, 아멘" 해야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빌립보에 가면 자주 장사 루디아가 있다,' '데살로니가에 가면 야손의 집이 있다'고 미리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땅을 밟으면 물에 발을 담그면 그때 알려 주십니다. 보여 주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여, 이루소서, 날 위해 이루소서"라고 성도님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큼이요? 입이 흐물흐물해질 만큼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한나가 입을 중얼거린 것입니다. 방언이니 아니니 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입에 길이 생기고 기도의 언어가 나옵니다. 막 외치다 보면 가슴에도 길이 생기고 목에도 입에도 길이 생깁니다. 신비주의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이 결코 여호와께 감사드릴 수 없습니다. 서원이라는 것이 모든 성경에 나옵니다. 그래서 맹세를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서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서원입니다.
10. 서원의 실제
1)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원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신 23:23). 자원하는 마음은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성경은 모두 전부 은혜라고 읽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기도합니다. 내가 의지를 발휘해서 무언가 해 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원하는 심령을 주십니다. 그때 번제와 낙헌제와 함께 서원제를 드립니다.
2) 서원의 소망
서원이 소망입니다. 서원은 여호와께서 하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시고 지금 감사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될 일을 지금 나에게 확신시키고 감사의 제물을 드리게 하시는 것이 서원입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닙니다. 현재이고 미래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서원의 기도입니다.
3) 내 서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서원은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서원은 내가 주체가 아닙니다. 한나도 주체가 아닙니다. 사무엘서를 한나 중심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사무엘도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서는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불변하십니다.
4) 서원의 은밀성: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저는 서원에 대해서 '은밀성'이라고도 써 봤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밀하게 혼자 있게 하시고 그때 하나님을 만나고 바라보게 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여 하나님 앞에 맹세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천 번을 이삭의 말씀을 읽어도,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이 나서 이방인들이 가져가도 또 땅을 파면 또 난 것을 볼 때 이전에는 몰랐으나 그 우물을 하나하나 파는 것 자체가 기도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도 모든 성경의 다른 인물도 그렇습니다. 우물 하나를 파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요. 그렇게 힘들게 발견하면 누군가 가져가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11. 결론
말씀의 결론을 시편 말씀으로 짓고자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1-4). 시편은 다윗의 삶이자 경험이고 은혜의 간증입니다. 그냥 읽으면 안 됩니다. 한 인간이 쓴 시를 그저 올려 놓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 기도하고 서원합니까. 바로 이때입니다.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시 54:5). 5절까지는 기도라고 합니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시 54:6). 시편 강해를 하면서 말한 것처럼 시편에는 하나님의 어떠하심, 자기의 형편, 기도, 그리고 감사가 나옵니다. 바로 한 절 전에 곧 죽을 듯했던 다윗이 주의 성실하심, 신실하심으로 기도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으로 기도하는 것(딤후 2:13)입니다. 이곳에 서원이 있습니다. 간구와 감사가 함께 있습니다. 끝내 여호와께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원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위험한 지경에 두신 것은 여호와를 찾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눈물과 애통함이 있다면 여호와를 찾을 만할 때 찾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사는 소망입니다. 서원이 없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서원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먹을 밥 달라는 것입니다. 밥 주면 여호와의 영광의 도구가 되고 그 힘으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성도에게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천 년 만 년 반석, 바위라도 뚫어서 하나님은 성도를 숨겨 주십니다. 지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