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0)] 교회의 본질과 당위 (엡 4:13-16) 문병호 목사
조회수 213
[2020081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0)] 교회의 본질과 당위 (엡 4:13-16) 문병호 목사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어머니 교회
방금 부른 찬송은 제가 특별히 많이 부르고 은혜도 많이 받은 곡입니다. 언제인가 한번은 산의 골짜기를 지나는데 "우리 주 목소리 한번만 발하면 세상이 망하겠네"라는 가사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쨌거나 세상의 모든 일을 영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의 전염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모두 그렇습니다. 어려움이 없이 영광이 없습니다. 환란이 극하고 괴로움이 심할 때 피난처 되시는 주님이 오시는 곳입니다. 오늘 찬송에서 '피난처'는 특히 교회를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도피처라는 곳에 우연히 사람을 죽인 자가 숨어 죽음을 피하고 변명을 할 기회를 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피난처가 신약의 교회입니다.
제가 공부할 때 생각해 보면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을 그렇게 기다렸습니다. 주중에 공부하다가 산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한참 걸어내려오면 100년이 넘은 교회가 있어서 그곳으로 항상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이 교회는 면 소재지가 아닌 바로 산 밑에 있어서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그 동네는 불교가 너무 강해서 교회를 마을에 세울 수 없으니 아마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는 교회를 어머니로 둔다고 키프리아누스라는 사람의 말을 칼빈이 인용했습니다. 얼마 전에 집을 가는데 어린 아이가 할머니 등에 업혀서 저를 쳐다봅니다. 돌도 안된 것 같은 아이였습니다. 제가 집에 가는 그 길을 내려가는데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치니 그 아이가 계속 저를 쳐다보면서 서로 지나가는데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웃음을 짓는데 얼마나 예쁘고 여유가 있어 보여 좋던지요. 그 일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것은 어머니의 품이고 가장 '푸근'한 것은 할머니의 등이라고 생각을 해 봤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어머니의 품이 되고 할머니의 등이 되는 그런 포근함과 푸근함이 있는 곳입니다.
2. 교회의 본질
1) 가족과 교회
지난주 결혼에 대해 배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결혼에 이어 교회가 나오는 것은 주목해 볼만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 때 자신을 넘어서는 관계에서 가장 첫째는 가족입니다. 그리고 교회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세상의 영달과 상관없이 가족과 교회 관계가 원만할 때 행복합니다. 누구라도 일과가 끝나면 집으로 들어갑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모든 일에 종말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해가 질 때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이 바로 집입니다. 주중의 생활은 또한, 6일간 곤하고 지치고 눌린 삶에서 7일째 교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산중에서 이전에 공부할 때 예배드리는 주일만을 기다리던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가정과 교회를 하나로 묶어 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정이 바로 구약의 교회의 모습이고 신약에는 예수님이 친히 몸이 되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한 몸 됨이 부부의 한 몸 된 것과 같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
교회를 영어로 church라고 하는데 헬라어와 라틴어로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깔레오'를 수동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가 교회의 어원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인데, 이 부르심은 내 뜻대로가 아니요, 하나님이 창세 전에 정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입니다. 예정과 선택, 소명에 따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소명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교회의 성도의 부르심, 둘째는 교회에서는 직분, 세상에서는 직분으로 주는 소명입니다. 본문의 맥락은 첫 번째, 구원의 부르심입니다. 예정과 선택은 사실 같은 말인데 성경이 구분하여 말하니 저희도 그렇게 합니다. 예정, 선택, 소명하셔서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
그런데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어떻게 합니까? 세상의 건축은 재료와 공법 등을 따집니다. 교회는 그 본질이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자기 몸을 제물로 단번에 영원히 드리신 그 공로와 피 값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피 값으로 사신 교회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피'라는 말이 생명이요, 자기 자신을 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교회를 산 것이 아닌, 부르신 자들을 사셔서 그 부르신 자들의 모임이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4)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
교회는 윤리적으로 성향이나 지역이나 연고나 혈통에 따라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따라 모이는 곳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그러므로 본문 12절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립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왜요, '몸'이라는 것은 생명이고 '자기 자신'이라는 말도 생명과 같은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그리스도를 몸의 구주라고 부릅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우리 예수님은 그 몸의 구주시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 되시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하신 주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고 교회의 몸이 되고 교회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나 의가 교회의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1) 교회의 유일성
주도 한 분이시고 교회도 하나인 것입니다. 지난 주 부부를 나눌 수 없다고 배웠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더더욱 나눌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고 우리는 다 지체입니다. 이 손과 발은 머리에 붙어 있어야 살아 있고 손과 발입니다. 머리에서 떨어져 나가면 아무 의미가 없는 물체입니다. 어떤 사람은 손이고 어떤 사람은 발로 서로 상합하여 한 머리에 붙어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특히 이 말은 언약의 주를 의미합니다. 그가 머리되심으로 그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신 것입니다. 언약이라고 하면 머리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께 붙어있는 지체입니다. 우리는 서로 몸의 한 부분이 되어 한 머리에 붙어있는데 머리는 하나지만 지체는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2) 성도들의 교제
그러면 교회의 성도들의 연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머리에 붙어 있으면 교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머리에 온전히 왼손, 오른손에 붙어 있으면 왼손에 모기가 물리면 오른손이 잡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하지만 머리에서 떨어지면 왼손과 오른손이 교회에 붙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전도사, 부목사 때부터 본 것이 그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면 성도 서로 간의 연합이 온전해집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도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해야 성도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도를 많이 부르고 모인다고 해서 사랑하고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어야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서로 자연스럽게 그러하듯 말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요,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인 것입니다.
명절에 집에 모일 때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우리 식구는 왜 이렇게 작냐고 푸념하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명절에 우리 식구가 적지만 다 왔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몸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적지만 식구가 적다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명이라도 빠지면 마음이 쓰이는 것입니다. 지체의 적고 많음을 떠나 몸은 하나입니다. 생명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명공동체입니다. 생명은 하나입니다. 한 사람이 두 생명일 수 없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컸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버려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교회나 서머나교회는 작았습니다. 하지만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몸이 크다고 칭찬하시지 않습니다.
5) 교회의 보편성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다윗의 교회만 교회가 아닙니다. 처처에 교회의 처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 처소가, 작은 교회가 다 충만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떤 모양, 어떤 모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교회에 우리가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합니다. 그 이름으로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그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들만 율법, 성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막힌 담이 없습니다. 지성소의 길을 연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가는 그 지성소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찢겨진 살을 통로 삼아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외국인이나 나그네가 없습니다. 누구나 한 형제 자매로 천국의 시민권을 갖는 자들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기업은 곧 유업이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바로 우리의 유업입니다. 쉽게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좋다 싫다, 목사가 좋다 싫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꾼 된 자로 스스로를 말했습니다. 바로 교회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영원한 기업입니다. 땅끝까지 교회를 세우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이 바로 그 뜻입니다.
이제는 이방인이나 외국인의 구별이 없으니 사람과 인종이나 국가를 가리지 않고 교회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게르만족도 이전에는 짐승이나 다름없는 야만족으로 취급받았고 어거스틴도 게르만의 침입을 보면서 <<하나님의 도성>>을 썼습니다. 그러나 게르만족이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이고 칼빈도 그렇게 보면 게르만족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곳 모든 시대에 있어야 합니다. 인종이나 국가를 가려서는 안 됩니다.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 모든 시대에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남미에는 천주교가 강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세워질 때 기복신앙이나 이런 것들이 많이 섞여서 개혁적인 전통적인 교회가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희 학교의 한 학생이 스페인어로 이번 번역된 기독교강요를 번역하겠다고 합니다. 그것을 주제로 박사 과정을 해 보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작은 일로 시작될 줄로 믿습니다. 그 학생이 아르헨티나에서 왔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신학교 하나 세우라고 말입니다. 제가 가서 강의한다고 말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면 땅 끝까지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 도시에는 교회가 많으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 바로 옆 빌딩에도 주의 뜰 교회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본래 제가 있는 집 근처에 아주 작은 규모로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한 번 더 옮기고 그 이후에 지금 저희 옆 건물로 온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어려우면 세 번이나 옮겼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한 생명이 똑같이 한 공기의 밥을 먹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하나님의 양분이 어디에 쓸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한 공기의 양분을 어디에 쓸 것입니까. 제가 이번 주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유튜브를 찾느냐, cts나 CBS에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기도를 해 보니 동의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기독교 강요>>를 나눠서 강의한다면 규모가 있는 방송국에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기독교 강요>> 번역한 것도 <<기독론>>을 쓴 것도 이 모든 일을 저는 십자가지기교회의 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진실된 제 신앙입니다. 십자가지기교회가 없었다면 제가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학교에 대해 100%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지기교회도 해야 한다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두 가지 못할 것 같아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 왔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면 한 가지 하는 것보다 두 가지 동시에 할 때, 두 가지에 더 뛰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는 한 몸입니다. 한 가정입니다.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됩니다. 누구라도 교회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많이들 말을 합니다. 그러나 막상 해 보면 쉽지 않습니다.
6)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
교회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 교회도 특정한 공간에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직분도 있습니다. 또 예배 순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규모와 질서가 있습니다. 규모 있고 질서 있게 하라는 말은 품위 있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것은 유일하게 한 교회만 있는데 택함 받은 사람들의 총합, 즉 비가시적 교회가 그것입니다. 이 비가시적 교회로는 우리가 모두 한 형제자매입니다. 이 근처에 있는 교회들도 모두 한 형제자매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각각의 장소와 위치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서로 더 낫게 여기고 서로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7) 하나님의 집
교회는 벧엘입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창 28:19).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믿는 백성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기업입니다. 세상에서는 집이 있어야 하고 사업을 하려면 터도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집은 교회입니다. 세상의 소유는 집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영적인 소유는 교회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의 유업이라는 것입니다.
3. 교회의 당위
1) 성도의 보호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이 말씀은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교회는 어린아이가 자라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것을 닮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악한 것들이 모두 교회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사람 속임수, 간사한 유혹입니다. 처음 보면 다 좋아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간사한 유혹입니다. 그리고 온갖 교훈의 풍조가 들어옵니다. 세상의 윤리입니다. 세상의 덕, 번영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밀려 들어올 때 피난처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여호와의 영의 임재로 담을 치고 있으면 댐이 무너져도 절대 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으나 교회에서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사자의 협박으로, 어떤 때는 뱀의 혀와 같이 간사한 속임수로 다가올 때 교회가 우리는 막아 주는 것입니다.
2) 믿음(지식)과 사랑
교회에서는 자라야 합니다. 자라는 것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대해서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믿는 일과 아는 일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아는 것이 곧 믿는 것입니다. 상호 동의어입니다. 제대로 아는 것이 믿는 것이고 제대로 믿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따르는 것이 사랑입니다(엡 4:15).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온전치 않은데 사랑이 따를 수 없습니다. 소경이 한강변에 앉아 있는데 다른 소경이 와서 자신과 같이 가자고 하면 사랑이 아니라 같이 죽는 것입니다. 길을 아는 사람이 소경을 데려가야 합니다. 먼저 진리와 아는 것이 있어야 사랑에서 자라갑니다. 그래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온전히 충만한 가운데, 범사의 사랑 가운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 교만해집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곧 내가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저도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는 없습니다. 그 외에는 전부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는 사랑은 말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간사한 유혹, 풍조입니다. 요새만큼 사랑한다고 많이 말하고 쉽게 말하는 시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새만큼 미움이 많은 세대도 없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안 됩니다. 결단코 안 됩니다. 칸트라는 철학자가 실패한 것은 믿음이 없이 영구한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칸트 철학으로는 히틀러가 나온 것입니다.
3)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감: 은혜를 받음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는 것과 믿는 것에, 본문 13절과 15절을 잘 봐야 합니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충만해서 사랑 안에서 자라는데 범사에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갑니다. 이 자라감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간다는 것은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더 잘 기대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정말 엎드려 은밀히 기도하는, 가장 잘 의지하는 사람이 가장 잘 사랑합니다. 기도도 말씀 생활도 안하고 사랑하는 것은 나의 사랑, 자기 사랑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엎드려 은밀히 기도할 때만 가능합니다. 구제는 자기가 먹으면서 남도 나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굶으면서 자기 먹을 것을 나눠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몸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각 몸이 서로 상합하여 자라갑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교회에 대해 글도 쓰고 책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4. 결론
하나님이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성도님도 많은 일을 하고 싶어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아이입니다. 너무 조급해서도 안 됩니다. 사도행전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에서 말씀 읽고 말씀 듣고 그 가운데 소명을 발견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많이 기도하시고 많이 말씀 보십시오. 저를 위해서도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기독신문>에 연재하는 것도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이 일을 통해 지면에 나갑니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 이 책도 칼빈의 책입니다. 번역도 잘못된 것도 있고 하겠으나 우리가 기도해서 이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 십자가지기교회가 해 보자는 마음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와 같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는 열쇠를 가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상급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0081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0)] 교회의 본질과 당위 (엡 4:13-16)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어머니 교회
방금 부른 찬송은 제가 특별히 많이 부르고 은혜도 많이 받은 곡입니다. 언제인가 한번은 산의 골짜기를 지나는데 "우리 주 목소리 한번만 발하면 세상이 망하겠네"라는 가사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쨌거나 세상의 모든 일을 영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의 전염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모두 그렇습니다. 어려움이 없이 영광이 없습니다. 환란이 극하고 괴로움이 심할 때 피난처 되시는 주님이 오시는 곳입니다. 오늘 찬송에서 '피난처'는 특히 교회를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도피처라는 곳에 우연히 사람을 죽인 자가 숨어 죽음을 피하고 변명을 할 기회를 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피난처가 신약의 교회입니다.
제가 공부할 때 생각해 보면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을 그렇게 기다렸습니다. 주중에 공부하다가 산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한참 걸어내려오면 100년이 넘은 교회가 있어서 그곳으로 항상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이 교회는 면 소재지가 아닌 바로 산 밑에 있어서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그 동네는 불교가 너무 강해서 교회를 마을에 세울 수 없으니 아마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는 교회를 어머니로 둔다고 키프리아누스라는 사람의 말을 칼빈이 인용했습니다. 얼마 전에 집을 가는데 어린 아이가 할머니 등에 업혀서 저를 쳐다봅니다. 돌도 안된 것 같은 아이였습니다. 제가 집에 가는 그 길을 내려가는데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치니 그 아이가 계속 저를 쳐다보면서 서로 지나가는데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웃음을 짓는데 얼마나 예쁘고 여유가 있어 보여 좋던지요. 그 일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것은 어머니의 품이고 가장 '푸근'한 것은 할머니의 등이라고 생각을 해 봤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어머니의 품이 되고 할머니의 등이 되는 그런 포근함과 푸근함이 있는 곳입니다.
2. 교회의 본질
1) 가족과 교회
지난주 결혼에 대해 배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결혼에 이어 교회가 나오는 것은 주목해 볼만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 때 자신을 넘어서는 관계에서 가장 첫째는 가족입니다. 그리고 교회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세상의 영달과 상관없이 가족과 교회 관계가 원만할 때 행복합니다. 누구라도 일과가 끝나면 집으로 들어갑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모든 일에 종말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해가 질 때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이 바로 집입니다. 주중의 생활은 또한, 6일간 곤하고 지치고 눌린 삶에서 7일째 교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산중에서 이전에 공부할 때 예배드리는 주일만을 기다리던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가정과 교회를 하나로 묶어 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정이 바로 구약의 교회의 모습이고 신약에는 예수님이 친히 몸이 되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한 몸 됨이 부부의 한 몸 된 것과 같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
교회를 영어로 church라고 하는데 헬라어와 라틴어로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깔레오'를 수동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가 교회의 어원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인데, 이 부르심은 내 뜻대로가 아니요, 하나님이 창세 전에 정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입니다. 예정과 선택, 소명에 따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소명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교회의 성도의 부르심, 둘째는 교회에서는 직분, 세상에서는 직분으로 주는 소명입니다. 본문의 맥락은 첫 번째, 구원의 부르심입니다. 예정과 선택은 사실 같은 말인데 성경이 구분하여 말하니 저희도 그렇게 합니다. 예정, 선택, 소명하셔서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
그런데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어떻게 합니까? 세상의 건축은 재료와 공법 등을 따집니다. 교회는 그 본질이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자기 몸을 제물로 단번에 영원히 드리신 그 공로와 피 값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피 값으로 사신 교회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피'라는 말이 생명이요, 자기 자신을 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교회를 산 것이 아닌, 부르신 자들을 사셔서 그 부르신 자들의 모임이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4)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
교회는 윤리적으로 성향이나 지역이나 연고나 혈통에 따라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따라 모이는 곳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그러므로 본문 12절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립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왜요, '몸'이라는 것은 생명이고 '자기 자신'이라는 말도 생명과 같은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그리스도를 몸의 구주라고 부릅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우리 예수님은 그 몸의 구주시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 되시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하신 주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고 교회의 몸이 되고 교회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나 의가 교회의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1) 교회의 유일성
주도 한 분이시고 교회도 하나인 것입니다. 지난 주 부부를 나눌 수 없다고 배웠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더더욱 나눌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고 우리는 다 지체입니다. 이 손과 발은 머리에 붙어 있어야 살아 있고 손과 발입니다. 머리에서 떨어져 나가면 아무 의미가 없는 물체입니다. 어떤 사람은 손이고 어떤 사람은 발로 서로 상합하여 한 머리에 붙어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특히 이 말은 언약의 주를 의미합니다. 그가 머리되심으로 그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신 것입니다. 언약이라고 하면 머리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께 붙어있는 지체입니다. 우리는 서로 몸의 한 부분이 되어 한 머리에 붙어있는데 머리는 하나지만 지체는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2) 성도들의 교제
그러면 교회의 성도들의 연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머리에 붙어 있으면 교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머리에 온전히 왼손, 오른손에 붙어 있으면 왼손에 모기가 물리면 오른손이 잡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하지만 머리에서 떨어지면 왼손과 오른손이 교회에 붙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전도사, 부목사 때부터 본 것이 그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면 성도 서로 간의 연합이 온전해집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도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해야 성도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도를 많이 부르고 모인다고 해서 사랑하고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어야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서로 자연스럽게 그러하듯 말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요,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인 것입니다.
명절에 집에 모일 때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우리 식구는 왜 이렇게 작냐고 푸념하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명절에 우리 식구가 적지만 다 왔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몸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적지만 식구가 적다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명이라도 빠지면 마음이 쓰이는 것입니다. 지체의 적고 많음을 떠나 몸은 하나입니다. 생명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명공동체입니다. 생명은 하나입니다. 한 사람이 두 생명일 수 없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컸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버려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교회나 서머나교회는 작았습니다. 하지만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몸이 크다고 칭찬하시지 않습니다.
5) 교회의 보편성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다윗의 교회만 교회가 아닙니다. 처처에 교회의 처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 처소가, 작은 교회가 다 충만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떤 모양, 어떤 모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교회에 우리가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합니다. 그 이름으로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그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들만 율법, 성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막힌 담이 없습니다. 지성소의 길을 연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가는 그 지성소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찢겨진 살을 통로 삼아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외국인이나 나그네가 없습니다. 누구나 한 형제 자매로 천국의 시민권을 갖는 자들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기업은 곧 유업이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바로 우리의 유업입니다. 쉽게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좋다 싫다, 목사가 좋다 싫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꾼 된 자로 스스로를 말했습니다. 바로 교회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영원한 기업입니다. 땅끝까지 교회를 세우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이 바로 그 뜻입니다.
이제는 이방인이나 외국인의 구별이 없으니 사람과 인종이나 국가를 가리지 않고 교회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게르만족도 이전에는 짐승이나 다름없는 야만족으로 취급받았고 어거스틴도 게르만의 침입을 보면서 <<하나님의 도성>>을 썼습니다. 그러나 게르만족이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이고 칼빈도 그렇게 보면 게르만족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곳 모든 시대에 있어야 합니다. 인종이나 국가를 가려서는 안 됩니다.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 모든 시대에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남미에는 천주교가 강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세워질 때 기복신앙이나 이런 것들이 많이 섞여서 개혁적인 전통적인 교회가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희 학교의 한 학생이 스페인어로 이번 번역된 기독교강요를 번역하겠다고 합니다. 그것을 주제로 박사 과정을 해 보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작은 일로 시작될 줄로 믿습니다. 그 학생이 아르헨티나에서 왔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신학교 하나 세우라고 말입니다. 제가 가서 강의한다고 말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면 땅 끝까지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 도시에는 교회가 많으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 바로 옆 빌딩에도 주의 뜰 교회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본래 제가 있는 집 근처에 아주 작은 규모로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한 번 더 옮기고 그 이후에 지금 저희 옆 건물로 온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어려우면 세 번이나 옮겼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한 생명이 똑같이 한 공기의 밥을 먹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하나님의 양분이 어디에 쓸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한 공기의 양분을 어디에 쓸 것입니까. 제가 이번 주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유튜브를 찾느냐, cts나 CBS에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기도를 해 보니 동의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기독교 강요>>를 나눠서 강의한다면 규모가 있는 방송국에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기독교 강요>> 번역한 것도 <<기독론>>을 쓴 것도 이 모든 일을 저는 십자가지기교회의 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진실된 제 신앙입니다. 십자가지기교회가 없었다면 제가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학교에 대해 100%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지기교회도 해야 한다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두 가지 못할 것 같아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 왔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면 한 가지 하는 것보다 두 가지 동시에 할 때, 두 가지에 더 뛰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는 한 몸입니다. 한 가정입니다.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됩니다. 누구라도 교회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많이들 말을 합니다. 그러나 막상 해 보면 쉽지 않습니다.
6)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
교회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 교회도 특정한 공간에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직분도 있습니다. 또 예배 순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규모와 질서가 있습니다. 규모 있고 질서 있게 하라는 말은 품위 있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것은 유일하게 한 교회만 있는데 택함 받은 사람들의 총합, 즉 비가시적 교회가 그것입니다. 이 비가시적 교회로는 우리가 모두 한 형제자매입니다. 이 근처에 있는 교회들도 모두 한 형제자매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각각의 장소와 위치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서로 더 낫게 여기고 서로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7) 하나님의 집
교회는 벧엘입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창 28:19).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믿는 백성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기업입니다. 세상에서는 집이 있어야 하고 사업을 하려면 터도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집은 교회입니다. 세상의 소유는 집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영적인 소유는 교회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의 유업이라는 것입니다.
3. 교회의 당위
1) 성도의 보호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이 말씀은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교회는 어린아이가 자라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것을 닮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악한 것들이 모두 교회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사람 속임수, 간사한 유혹입니다. 처음 보면 다 좋아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간사한 유혹입니다. 그리고 온갖 교훈의 풍조가 들어옵니다. 세상의 윤리입니다. 세상의 덕, 번영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밀려 들어올 때 피난처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여호와의 영의 임재로 담을 치고 있으면 댐이 무너져도 절대 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으나 교회에서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사자의 협박으로, 어떤 때는 뱀의 혀와 같이 간사한 속임수로 다가올 때 교회가 우리는 막아 주는 것입니다.
2) 믿음(지식)과 사랑
교회에서는 자라야 합니다. 자라는 것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대해서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믿는 일과 아는 일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아는 것이 곧 믿는 것입니다. 상호 동의어입니다. 제대로 아는 것이 믿는 것이고 제대로 믿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따르는 것이 사랑입니다(엡 4:15).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온전치 않은데 사랑이 따를 수 없습니다. 소경이 한강변에 앉아 있는데 다른 소경이 와서 자신과 같이 가자고 하면 사랑이 아니라 같이 죽는 것입니다. 길을 아는 사람이 소경을 데려가야 합니다. 먼저 진리와 아는 것이 있어야 사랑에서 자라갑니다. 그래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온전히 충만한 가운데, 범사의 사랑 가운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 교만해집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곧 내가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저도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는 없습니다. 그 외에는 전부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는 사랑은 말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간사한 유혹, 풍조입니다. 요새만큼 사랑한다고 많이 말하고 쉽게 말하는 시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새만큼 미움이 많은 세대도 없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안 됩니다. 결단코 안 됩니다. 칸트라는 철학자가 실패한 것은 믿음이 없이 영구한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칸트 철학으로는 히틀러가 나온 것입니다.
3)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감: 은혜를 받음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는 것과 믿는 것에, 본문 13절과 15절을 잘 봐야 합니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충만해서 사랑 안에서 자라는데 범사에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갑니다. 이 자라감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간다는 것은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더 잘 기대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정말 엎드려 은밀히 기도하는, 가장 잘 의지하는 사람이 가장 잘 사랑합니다. 기도도 말씀 생활도 안하고 사랑하는 것은 나의 사랑, 자기 사랑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엎드려 은밀히 기도할 때만 가능합니다. 구제는 자기가 먹으면서 남도 나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굶으면서 자기 먹을 것을 나눠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몸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각 몸이 서로 상합하여 자라갑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교회에 대해 글도 쓰고 책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4. 결론
하나님이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성도님도 많은 일을 하고 싶어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아이입니다. 너무 조급해서도 안 됩니다. 사도행전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에서 말씀 읽고 말씀 듣고 그 가운데 소명을 발견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많이 기도하시고 많이 말씀 보십시오. 저를 위해서도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기독신문>에 연재하는 것도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이 일을 통해 지면에 나갑니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 이 책도 칼빈의 책입니다. 번역도 잘못된 것도 있고 하겠으나 우리가 기도해서 이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 십자가지기교회가 해 보자는 마음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와 같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는 열쇠를 가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상급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