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23][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1)] 성도의 교제와 성례 (행 2:41-4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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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3][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1)] 성도의 교제와 성례 (행 2:41-42) 문병호 목사 


(행 2: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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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성도의 교제와 성례


본문의 두 구절은 성도의 교제와 성례가 함께 들어있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성례와 세례가 나옵니다. 42절에는 교제와 성찬이 나옵니다. 초대교회에서 떡을 떼는 것은 성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두 절은 '서로 교제하는' 성도의 교제와 세례, 그리고 떡을 떼는 성찬이 나옵니다. 즉, 신약의 두 가지 성례가 모두 나오는 것입니다. 



2. 교제


성도의 '교제'라고도 하고 '교통'이라고도 합니다. 교제는 communion이고 교통은 communication으로 구별이 됩니다만 같이 쓰기도 합니다. 교제라는 말은 조금 더 신분적이고 본질적인 개념입니다. 하늘에서 우리의 신분을 인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저 인간 사이의 교분을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만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백성에게 마땅히 따르는 것이 성도의 교제요, 그것이 있으면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제와 교통은 신분적인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법정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백성, 천국 시민, 사랑의 아들의 나라의 백성 등은 모두 신분을 말합니다. 즉, 모두 주어지는 것입니다. 애써 어느 가정의 자녀가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저 주어지는 것이지 열심히 일해서 자신의 출생 가정을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3.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도 교제의 시작


1) 우리와 교제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더불어 먹고 마셨습니다. 주님의 별명이 있었다면, 물론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비꼬는 이야기로 한 것이지만, 먹고 마시는 자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유다 지파인데 자꾸 이 사람 저 사람, 세리, 창기 다 만나고, 거라사 지방도 사마리아 지방도 다니고 무덤가의 미친 자도 만나고 다니시니 말입니다. 저라도 만나기 꺼려할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 다 만나고 다니신 것입니다. 만난 것뿐 아니라 먹고 마셨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정결례 중 중요한 것으로 부정한 자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금했습니다. 심지어 부정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깼을 때 그것도 받으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주님이 이 땅에 와서 보여 주신 교제와 교통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예수님은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매일 그들과 같이 주무셨습니다. 우리도 친한 친구들끼리만 집에 초대하고 같이 자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 것은 그러므로 긴밀하고 가리지 않는 교제의 모습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보다 더 큰 교제를 보여 주십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 주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고 우리 안에 아예 들어오셔서 그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 안에 거하게 되는, 교제의 완성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교제의 완성은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만나주시는 것, 음식 드시는 것 등은 우리가 누리는 이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17:20; 갈 2:20; 요 14:17).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속에 계시는데 그 방법은 예수님이 살과 피를 주셔서, 그저 육신의 음료와 양식뿐이 아니라 자기 몸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의 시작입니다. 예수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가 각자 우리 안에 거하시니 우리가 서로 당연히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 돼지는 새끼를 많이 낳습니다. 그러면 젖을 다 물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것입니다. 각자가 주님의 젖을 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가족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한 피 받아 한 생명입니다. 여러 젖꼭지를 각자가 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양분을 섭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교제라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새끼 돼지들이 어미 젖을 물고 있는 것,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성도 각자가 서로에게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최고의 모습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성경에는 형제요 자매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교제입니다. 교제라는 것은 본질적인 은혜로 신분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굳이 우리가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도 각자가 그리스도와 교제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 부서를 섬겨 봤습니다만, 가장 성도의 교제가 온전할 때는 중학생, 고등학생이 각자 주님과 긴밀히 교제하고 기도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럴 때 그 안에 성도의 교제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입니다. 먼저 성도 각자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 있고 그래서 성도 각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선행하는 것입니다. 이 후 성도 서로 간의 교제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로서의 기도, 저의 기도입니다. 교제는 많은 듯 하나 기도, 말씀은 없다면 위험합니다. 그렇게 지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저도 시행착오를 해 보았습니다. 그것 자체로서 나쁜 것은 아니나 그것이 우선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 각자 각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그것이 성도의 교제로 필히 따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를 본받음


한 성령으로 한 주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고전 6:17; 고전 12:13; 엡 4:4)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고(엡 3:17) 우리 안에 살고 거하십니다(갈 2:20; 요일 3:24). 우리 성도님들은 이런 말씀을 따르고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 말씀이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의 시작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 그리스도가 주시는 분량대로, 젖을 나눠 먹는 그 분량대로 은혜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롬 15:5).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고 우리 속에 거하시면, 우리가 그의 양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고 젖을 먹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말로 우유를 마시니 송아지가 된다고 그러니 대든다고 재미 있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젖, 음료를 마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젖입니다. 그것을 마셔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성도의 교제의 출발입니다. 성도는 한 주의 성령으로 합하여 한 몸을 이룹니다. 이것이 가정 개념입니다. 가정은 옛 말로 식구라고도 합니다. 한 솥밥을 먹으니 말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가족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젖을 나눠 먹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힘쓸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진정 사랑한다면 먼저 내가 그리스도에게 붙들려야 합니다. 내가 저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저 사람 따라서 예배를 안 온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와 예배에 충실하여 그를 위해 간구하는 것이 신령한 교제입니다.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도 다 해 줄 수 없습니다. 능력이 부족할 뿐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해야 성도 서로 간의 연합이 따릅니다. 자연스럽게 따릅니다.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감사의 손을 들면 우리 안에 온전한 교제가 일어납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 복음 선포에 후속하는 세례와 성찬


성도는 함께 예배드리고 교제하고 떡을 떼고 서로 기도에 힘씁니다. 본문 41절은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42절 그 가르침을 따른다고 합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성령을 받아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는 일을 말할 때 이 앞의 구절을 빼먹습니다. 말씀을 받아 가르침을 따른 것을 말입니다. 성례의 능력은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례 때는 반드시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이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아 성찬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 성경은 앞장에는 성도의 교제, 뒷장에는 성례를 절묘하게 배치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귀고 하나되는 일은 참 귀한 일입니다. 주님도 형제와 자매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귀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지 않고 그런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소한 그리스도에 붙어 있음 가운데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 가운데 사랑입니다. 칼빈은 성도의 교제를 이야기하면서 온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있을 때 교제가 온전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있을 때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이 때 교제가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성경을 보고 직시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영적인 질서입니다. 무슨 신비주의 같은 것, 꿈 같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 말씀의 질서가 바로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요엘서를 인용하고 말씀을 전하니(행 2:33) 정리가 되고 그러니 교제가 시작한 것입니다. 같은 성경을 보고, 예루살렘에서 결박이 있다는 똑같은 환상을 봐도 장로는 가지 말라고 했으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 갑니다. 중요한 것은 환상을 봤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그 환상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 기도하는 한나에게 술에 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잘 모르면 말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같이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붙들려야 합니다. 그때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이 있으며, 그럴 때 교제가 온전합니다. 항상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 직선적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수직적인 차원에서 진리의 일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적 차원에서 수평적인 형제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교회를 낳는다


지난 주 말씀도 이것을 언급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3-15). 먼저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있어 충만해진 후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자라가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없이 산중에 혼자 수도하면 무엇합니까? 이스라엘에 갔을 때 헤브론 산에 가는데 한 사람이 수사복을 입고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 대해 물어보니 저 바위산의 어떤 수도원에 속한 사람인데 남이 없을 때 물을 길르러 온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충만한 후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자라 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성도의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교회이지, 교회를 잘 골라서 그 안에 있는 성도와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돼지 새끼 각자가 돼지 젖꼭지를 물고 있으면,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있어서 교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성도와 하나된 택하심, 정하심, 부르심, 그리하여 우리가 인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온전한 사귐이 있는데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있어서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있습니다. 교회 연합 기구, 선교단체 등 어떤 것도 다른 의가 있지 않습니다. 

요즘 센터교회라고 해서 교회가 연합해서 사역을 한다고 하는데 교회론으로 봐서 절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각자 교회가 중요하지 교회가 모여 뭔가 연합체를 이루고 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뭔가 새롭게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것은 아닙니다. 분당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을 중심으로 부교역자들이 여러 자매교회를 세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저 부목사님들이 위임을 받아 나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남서울교회는 남서울에 있어야지요. 분당 남서울교회가 말이 됩니까. 남서울교회가 센터이고 분당 남서울교회가 지소입니까? 비판하는 것이라기보다, 이런 것들도 성경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어릴 때 우리 교회가 무지막지한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참 교회였습니다. 좋은 목사님이 어디있고 중심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교회 목사님이 최고라는 것은 각 교회의 목사님이 차등이 없다는 것입니다. 센터는 예수님이지 무슨 센터 교회가 따로 있습니까.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 신령한 음료를 주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무슨 센터를 따로 말합니까. 그리스도가 각자를 파송하는 것입니다. 도마를 인도로 바울을 유럽으로 파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교제를 잘 알아야 합니다. 연합을 하고 무슨 조직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본질은 성도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 된 지교회 각자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멀리 버스를 태워 성도를 데려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온전하여 말씀이 중심이 되면 그것이 교회의 연합이요 성도의 교제라는 것입니다. 거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6. 은혜의 방편: 말씀, 기도, 성례


본문 이후의 말씀 중 44절에는 '다함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군중이나 무리의 신앙이 아닌, 각자 각자가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함께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하나를 이루어 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교제를 주셨고 성례를 주셨습니다. 성례는 말씀과 기도와 함께 은혜의 방편입니다. 이 세 가지는 교회 안에서의 말씀, 교회 안에서의 기도, 교회 안에서의 성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자가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각자가 말씀 묵상할 수 있고 은밀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특별한 섭리가 교회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의 말씀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설교의 말씀을 반드시 새기고 되새기십시오. 말씀 듣고 성경 보십시오.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또한 교회에서의, 교회 이름의 기도가 은혜의 방편입니다. 잘 아실 것은 성례가 은혜를 주는 시작이 아니라 믿음이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세례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을 인치는 것이 세례입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성찬을 행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본문 41절은 신도의 수가 나옵니다. 신도라는 말이 성경에 자주 나오지 않습니다. 믿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이후 44절에는 믿는 사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롬 10:17). 말씀을 듣고 믿고 구원에 이른 자들의 표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이고 성찬입니다. 즉 본질은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7. 결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아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받은 의를 인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육체의 할례를 내세웠는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인친 것이 세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붙들 것은 성례가 귀하지만 앞서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당은 성례가 앞섭니다. 그래서 영세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사제에게 공로가 있고 교회에 공로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말씀을 듣고 교제하고 말씀을 듣고 떡을 떼었습니다. 코로나로 많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어린이들이 너무 힘들고 학생들도 힘들고 직장도 힘듭니다. 이럴 때 평안하다는 것은 거짓된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 육체의 곤고함이 있으나 이럴 때야말로 말씀,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많이 우시고 많이 기도하시기 바립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헤가 우리 안에 더 충만한 역사가 있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